전쟁...../해군이야기

한 전함을 통해 본 오스트리아 사회사

구름위 2012. 12. 22. 11:36
728x90

1. 한 오스트리아 전함의 이야기

인간사에 있어서 모든 조직이나 구조는 전체 사회의 하부체계로써 모체인 사회의 구조나 형태로부터 영향을 받는다는 것은 앞서 얘기했습니다. 그렇다면 군대 역시 하부체계의 하나로써 그 내부에서 일어나는 여러 양태들 역시 상부체계인 사회의 반영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번 이야기의 발단은 SMS 라데츠키라는 한 오스트리아 전함의 에피소드에서 시작됩니다.

1918년 11월, 1차 세계대전의 패배로 인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붕괴되자 일부 해군 장교들은 숙적인 이탈리아에게 함선이 넘어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 라데츠키와 츠리니라는 2척의 전노급전함을 이끌고 모항을 탈출하여 인근에 정박중이던 미국 함대에 항복 및 자함의 인수를 요청했습니다. 그들의 순진한 행동은 미국이 이 전함들을 잠시 자국해군 소속으로 취역시켰다가 도로 이탈리아 해군에게 넘기는 것으로 종료됐지만, 여기서 주목할 점은 저 사건 자체가 아니라 2척의 배가 미 해군에 접수될 당시 Hazlett이라는 한 장교가 라데츠키의 내적인 부분에 대해 상세한 보고서를 남겼다는 것입니다. 그 세부 내용은 다음과 같았죠.


[전노급전함 SMS 라데츠키]


[정박상태로 조사를 받고 있는 라데츠키]

(*주 : 다음 내용은 http://www.d3.dion.ne.jp/~ironclad/wardroom/USSRadetzky/radetzky.htm 로부터 발췌했습니다.)

===============================================================================================================================
(전략) ... 라데츠키는 아름다운 선을 지닌 평갑판형 함선으로써, 연돌은 2개이며 상부구조물은 작고 기능적으로 되어있어서 정말로 군함다운 배인 것 같다. 그러나, 이 전함은 어떻게 보아도 쾌적함을 목적으로 건조됐다고 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단, 장교의 경우에 한해서만.

승조원의 생활환경은 좁고 어두컴컴하며 숨이 막힐 것 같다. 반면에 사관실은 대단히 넓고 대부분 제대로 된 창문이라고 부르기에 충분한 크기의 현창을 갖고 있다. 하급 장교의 침실에도 욕실이 부속되어 있고 개인 당번병을 위한 작은 방도 준비돼 있다. 함장실은 함미 부분에 긴 복도까지 구비한 일군의 호화로운 방들로써, 거의 함미 일대를 점령하다시피 하고 있다.


[(좌) 라데츠키의 자매함 츠리니의 함장실 / (우) 오스트리아 장갑순양함의 사관실]


[(좌) 승조원 거주구 / (우) 함내 영창]

승조원의 거주구가 형편없는 것도 충분히 열악한 상황이지만, 상갑판에는 그보다 더한 처지를 말해주는 시설들이 몇 개 있다. 12개의 방이 1조가 된 영창이 있고 그 중앙에는 몇 개 정도의 처형대가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근처의 벽에는 가죽 끝에 몇 개의 작은 구슬이 달려있는 물체, 즉 그토록 유명하고 또 무시무시한 "고양이 채찍"이 걸려있었다. ... (후략)

(출처 :
http://www.d3.dion.ne.jp/~ironclad/wardroom/USSRadetzky/radetzky.htm)
===============================================================================================================================


이상의 내용에서 볼 때, 오스트리아 해군에 있어서 수병들의 처우는 대단히 열악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처형대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고양이 채찍이란 통칭 "cat o' nine tails" 이라는 별명을 가진 가죽채찍을 말하는 것인데, 수병이 근무 중에 어떤 잘못을 저질렀거나 했을 때 사관이 채찍으로 그 수병을 사정없이 내리치는 용도로 쓰이는 물건입니다. 이런 채찍질은 16-17세기경, 혹은 그 이전 시기부터의 범선시절 때부터 행해지곤 했는데, 아무리 건장한 남자라도 20대 이상을 맞으면 널부러지기 시작하고 40대 이상을 맞으면 살아남기가 힘들었습니다.


[채찍질을 당하고 있는 수병 : 19세기 중엽]

17세기 당시에는 여러 가지 사소한 이유로 (복장이 불량하다거나, 갑판사관에게 말대꾸를 했다거나, 작업중에 실수를 했다거나 등등) 종종 사관에 의한 자의적인 처벌이 가해졌고, 그러한 반감이 쌓이고 쌓여서 종종 선상반란이 일어나는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런 구세기적 유형의 형벌이 20세기 초반의 군함에 여전히 잔재해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이 당시에 채찍질이 어떤 형식으로 행해졌는지 알 수 없지만, (혹시 17세기와는 달리 엄격한 원칙이 정해지고 횟수도 일정하게 규제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니까요) 동시대에 대다수의 국가들이 이미 이런 채찍질을 금지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역시 라데츠키의 경우는 수병의 인권과 처우문제가 대단히 열악했다고 보입니다.

함상생활의 문제 또한 마찬가지이며 특히 거주구역의 경우 수병들은 공간이 부족해서 바닥에까지 자리를 펴놓고 지내는 실정임에도, 장교들은 욕실과 당번병이 부속된 개인실을 배정받을 정도이며 함장은 아예 호텔 같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전반적으로 볼 때 라데츠키의 제반환경에는 수병의 인권과 생활은 무시되어도 좋은 것인 반면, 장교와 고급사관들은 "당연히" 쾌적한 생활을 누릴 권리가 있으며 수병들을 처벌하고 통제할 권한이 있다는 발상이 깔려있는 듯 보입니다. 이것은 수병과 장교 사이의 엄격한 계급적 차이와 차별을 상정하는 것이며, 기본적으로 "인간은 평등하지 않고 신분과 지위에 따라 차등한 권리를 지닌다"는 신분사회적인 발상이 담겨있는 것이죠.  
  

[오스트리아 해군의 장교들]


[오스트리아 해군의 수병들]


[갑판위의 장교들과 신사숙녀들, 그리고 뒤에서 그것을 지켜보는 수병들]


[수병의 일상 : (좌)석탄 하역 작업 / (우)갑판 위에서 세탁을 하는중]


[수병의 일상 : 갑판 청소]

이러한 차별이나 혹독한 대우는 결코 그 자체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조직의 상태와 환경은 그것을 낳은 사회의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고, 해군 역시 예외는 아니지요. 즉, 라데츠키의 경우에서 보듯이 오스트리아 해군에 불평등과 차별 등이 나타났다면 그것은 오스트리아 사회 전반의 계급문제와 사회구조가 해군이라는 조직과 그 하부를 이루는 한 전함에 투영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동시기의 타국해군의 경우와 비교해보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지요.


2. 동시기 타국해군에서의 수병들의 처우와 계급차별문제

범선 해군시대의 사관은 일반적으로 귀족 또는 이에 준하는 지주계급 출신이 많았고, 당시에는 장교라 하면 곧 중상류층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하층계급 출신자가 사관이 된다는 것은 불가능하지는 않았지만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죠. 미국을 제외하고는 혁명 이전의 프랑스나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이 모두 이와 같이 "사회에서의 신분=군대에서의 계급"이라는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19세기 중·후반에 들어서면서 사회혁명으로 구체제가 무너지고 급격한 기술발달로 인해 각 병과의 전문성이 높아짐에 따라, 점차적으로 비귀족층에게도 장교직이 개방되기 시작하였고 수병들의 처우도 점차 개선되어나가기 시작했죠. 그리고 이러한 처우 개선은 당시 각 국가의 사회에 얼마나 자유주의 사상이 확산되었는지에 따라 다소 차등적으로 전개되었습니다.

1) 가장 선진적인 사례 : 미국

[전함 USS 미네소타의 수병들 (1910∼1912년경)]

미국의 경우는 건국 당초부터 신분개념이 없는 공화국이었으므로 상대적으로 유럽 국가들과 같은 차별이 적었습니다. 1845년에 해군학교(뒷날의 해군사관학교)가 설립되었을 때는 각 주 및 준주의 의원정수에 비례해서 입학생을 받는 제도가 확립되었고, 교과과정에 있어서도 병과사관과 기관사관의 구별이 없었으므로 양자간에 차별이 일어날 여지가 없었습니다. 유럽의 경우, 기술자들은 중·하류계층의 후손이라는 인식 때문에 병과사관과 기관사관을 구별하여 이들 사이에 모종의 차별이 있었던 반면, 미국은 기술자에 대한 편견이 적었으므로 아예 제도적 차원에서 차별이 일어날 여지를 없앤 것이지요.

수병의 처우에 있어서도 많은 개선의 노력이 있어서, 수병의 영구고용과 이를 위한 교육훈련에 대한 모색이 이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미국에는 민간선원이 12만명 가까이 있었음에도 연간 3천명 정도의 수병 수요를 채우기 어려운 실정이었는데, 이 때문에 수병의 급여를 인상하고 능력이나 전공에 따라 적절한 승진이 행해지는 식으로 처우를 개선하여 수병에의 지원을 확대하려는 계획이 세워집니다. 1862년 7월에는 능력과 전공에 따라 수병이 준사관으로 진급하는 것을 가능케하는 법률이 공포되고, 18세 이상의 수병에 대한 조직적인 교육훈련이나 유리한 급여 및 보너스제도가 도입되었습니다. 이와 병행하여 가죽채찍으로 때리는 형벌의 금지, 함내에서의 금주 등의 조치가 취해짐으로써, 미 해군에서 수병이 처한 환경은 크게 개선되었습니다.

2) 다소 보수적이었던 변화 과정 : 영국

[HMS Borodino의 승조원들(1918)]

영국해군은 본래 귀족이나 젠트리 계층을 중심으로 장교층을 형성했고, 중류계급 출신은 함장이나 사령관의 연고자가 아니고서는 장교가 되기 어려웠습니다. 또한 병과사관과 비 병과사관 사이에는 엄격한 구별이 존재하여 병과사관이 정사관으로 간주되어 우대를 받았던 반면, 비 병과사관은 준사관으로 간주되었고 일종의 후방요원으로 취급되었죠. 스스로 전투의 일선을 담당한다고 자부하는 병과사관들은 이런 비 병과사관들에 대한 우월감을 갖고 있었고 이들에 대해 암묵적인 차별을 가했습니다. 즉, 군 조직의 계급이 대체로 사회에서의 신분 차와 일치하였고 특히 장교층에서도 귀족&젠트리 출신의 병과와 중류계급이 중심이 된 비 병과라는 어느 정도의 신분적 도식이 성립되었던 것이죠.

이런 상황이니 장교와 수병 사이에는 인식면에서부터 현격한 차이가 존재했습니다. 즉, 당시의 영국해군에는 "장교=신사", "하사관 및 수병=하층민"이라는 인식이 깔려 있었으며, 이는 급료의 지불방식에 있어서도 신사인 장교들에게는 매월 1일에 급료를 선불했지만, 하사관과 수병에게는 매주 금요일마다 그 주의 급료를 주급 형식으로 후불하는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이는 장교들은 신사이므로 인격적으로 믿을 수 있는 존재이지만, 하사관과 수병들은 급료를 미리 받으면 탈주하거나 도망칠 수 있다는 전통적인 발상에서 나온 것입니다. 물론 16∼17세기에는 경력이나 직업·신분을 불문하고 항구의 건달이나 부랑자·범죄자 등등을 닥치는대로 수병으로 징집했기 때문에 그런 일이 종종 있었습니다만, 19세기 이래의 수병들은 이미 체계적인 교육과 훈련을 받는 전문직업인으로 변모해가고 있었는데도 그들에 대한 인식은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여전히 고루한 단계에 머물러있던 것이죠.

그러던 것이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장교양성체계에 변화가 생기자 점차적으로 중·하류 계급 출신에게도 장교의 문호를 개방하기 시작했고, 비 병과사관들 사이에서 직종간 수평화 운동이 전개되면서 점차 병과간 차별도 철폐해가는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19세기 중반부터는 장교 후보생에 대한 체계적 교육 노력이 있어왔고, 1902년에는 드디어 정규 해군사관학교가 설립되었습니다. 입학조건에는 특별히 계급적 요건이 명시되지는 않았고, 졸업하여 임관한 후에는 4∼5년간 병과·기관과·해병과 사관을 두루 역임하여 병과간의 대립과 차별을 해소시키려는 노력을 하게됩니다. 이것에 의하여 바로 전문과정별 차별이 해소된 것은 아니지만, 낡은 옛 신분사회제도와 연계된 해군사관의 지위를 개혁하려는 시도였던 것이죠. 또한 장교가 되기 위한 길도 보다 다양화하고 폭을 넓혀서, 1903년에는 공립학교 졸업생을 지원에 의해 단기예비사관으로 임명하는 제도가 마련되었고 1913년에는 공립학교 졸업생을 정규 해군장교로 채용하는 과정이 개설되었습니다.

수병의 지위와 처우도 개선되었는데, 1815년에는 구시대의 악명높은 제도인 "수병 강제징집제"를 실질적으로 중단하고 1833년에는 공식적으로 폐지하게 됩니다. 동시에, 이전처럼 수병을 그때그때 모집했다가 해고하는 시스템이 아니라 하나의 직업으로써 체계적인 교육·훈련을 행하고 경우에 따라 승급도 시키는 제도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제기되기도 했습니다. 그리하여 19세기 후반이 되면 각지에 수병을 지원하는 소년들을 수용하여 기초교육을 시키는 학교가 생겨났고, 이들 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수병이 된 사람들은 연공에 따라 승진하여 하사관이 되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준사관이 될 수도 있었지요. 이러한 수병의 승급제도는 계속적으로 확대되어, 20세기에 이르면 수병이 정사관으로 대위에 임관하는 것도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조치에도 불구하고 영국의 보수적인 특성 때문에 저런 문제들이 완전히 해소된 것은 1차대전에 와서야 가능했습니다. 전쟁으로 인한 해군인력의 확장, 특히 잠수함의 위협으로 인한 대잠세력의 급격한 확장 때문에 정규 사관학교 졸업생 외에도 필연적으로 하사관·민간인 층으로부터 장교를 선발하지 않을 수 없었죠. 그에 따라 "장교=신사"라는 도식이 붕괴되었고, 군 내부의 평등문제가 해결되지 않고서는 합리적으로 전쟁수행능력을 발휘할 수 없다는 발상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그제서야 비로소 해군 내부의 완전한 민주화가 이루어져서 계급간의, 직종간의 차별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었죠.

3) 근대성과 구 시대적 잔재의 혼재 : 일본

[중순양함 쵸카이의 승조원들(1942)]

근대 일본해군의 시초는 막부가 1855년 외륜선 건조를 추진한 것을 기점으로 하여, 1872년에 메이지 정부에 의해 해군이 독립한 것에서 시작합니다. 당시 일본해군은 범선해군의 전통이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기 때문에 구 시대의 잔재로부터는 자유로울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1876년에 정식 해군사관학교가 설립되었을 당시 학칙에 "어떤 번이나 현, 화족과 서인을 막론하고 15세 이상으로 사관학교에서 교육을 마친 자는 사관이 될 수 있다"고 명시함으로써 신분과 지역에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장교가 될 수 있는 문호를 개방했다는 점 등이 바로 그것이죠.

그러나 그 이면에는 영국의 해군제도를 모방했기 때문에 그 인식면에서도 영국의 엘리트 중심주의적인 단점을 그대로 물려받았다고 볼 수 있었습니다. 즉, 정규 사관학교 출신의 장교는 (출신계급이 어떻든간에) 엘리트이지만, 그외의 비병과사관이나 하사관, 수병 등은 신뢰도가 떨어지는 하류층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이를테면 최초 교육단계부터 사관학교와 기관학교라는 식으로 분리교육을 실시하는 등 전투병과와 비전투병과의 차별이 여전히 잔존했습니다. 당시 비전투병과의 장교들은 문관으로 취급되었고 1915년에 준사관이라는 형태로 무관에 편입되었으나 여전히 전투나 작전수행에 있어서는 비전투병과 장교가 무관으로써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즉 전투시의 지휘권 승계문제가 대표적인 예인데, 그 내용은 "지휘관 부재시에 그 지휘권을 계승하는 것은 반드시 정규 사관학교를 졸업한 전투병과 사관에 한정하며, 기관학교·경리학교 출신의 기관과 사관이나 주계과 사관에게는 절대로 지휘권의 계승을 허락하지 않는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상황에 따라서는 기관과 중령이 정규 사관학교 출신 신참소위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어이없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었죠. 이러한 신분제 차이는 직종간 수평화 운동이 전개되면서 서서히 이슈화되었고, 전쟁말기인 1944년에야 비로소 해결됐습니다.

같은 장교끼리도 이렇게 차별이 심한데, 하사관이나 수병의 경우는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한 예로, 함재 수상기로 정찰을 내보냈는데 그 조종사가 하사관이라는 것을 알고는 "하사관의 말은 신뢰할 수 없다"며 정찰보고를 그대로 묵살했다는 사례도 있었으며 사병의 경우는 "1전 5리로 징집된 목욕탕 물 같은 존재" (징집시에 지급되는 여비가 1전 5리였는데 이것이 당시 목욕탕 요금과 같았다고 해서 물처럼 쓰고 버리는 소모품이라는 의미가 있었죠)로써 인권이 상당 부분 경시되었고 특히 하사관 등에 의한 가혹한 사적제재라는 관행은 여러 차례의 정화 노력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척결되지 못했습니다.

이런 문제점들이 2차대전 시기까지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일본이 영국을 모방했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영국의 제도라는 씨앗을 심은 일본사회라는 토양 자체가 권위주의적이고 反자유주의적 성격을 지녔던데 기인하는 것입니다. 일본은 영국과 같은 군대의 대중화나 민주화 경험을 하지 못했으므로 (1차대전 시에 별로 한 일도 없었고, 따라서 급격히 인력을 늘릴 일도 없었으니까요) 영국과 같은 변화를 겪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1920년대의 짧은 정당정치 시대를 제외하고는 사회체제 자체가 천황제 중심의 권위적, 보수적 구조였기 때문에 저런 구시대적인 차별이 2차대전기까지 그대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겠죠.

4) 가장 후진적인 사례 : 러시아

[(좌)러시아 수병들 / (우)「전함 포템킨」의 한 장면]

위의 국가들과는 사뭇 다른 양상을 보이는 것이 바로 러시아입니다. 러시아 해군에서 정규 병과사관이 되는 길은 2가지였는데, 그중 하나는 페테르부르크에 있는 해군사관양성단에서 6년간의 교육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이 양성단은 12∼14세의 소년들을 경쟁시험으로 선발하는데, 수험자격은 육해군 사관 또는 귀족의 자제로 한정되었습니다. 제 2의 방법은 고등교육을 마친 청년이 해군에 지원하여 선발시험을 거쳐 임관하는 것입니다.

한편 기관과 및 비 병과사관은 16∼19세의 청년을 시험으로 선발하여 해군기술학교에서 3년간의 교육을 거친 뒤 장교로 임관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이들 비 병과사관에 지원하는 것은 병과사관보다는 출신계급의 제약이 덜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자본주의와 산업발전이 뒤쳐진 러시아에서는 귀족과 농민층 외에는 중간계급이라 부를만한 사람들이 많지 않았고, 따라서 일반지원계의 병과사관이나 기술학교 출신인 비 병과사관의 비중은 그다지 높지 않았습니다.

수병의 경우는, 해안에 임한 지방에서 21세의 성인남성을 징집하여 충원하였습니다. 복무연한은 현역 7년, 예비역 3년으로 합계 10년이었고, 선발시험에 의해 하사관이나 준사관으로 나아가는 길도 열려있었습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수병들이 농노출신으로써 초급학교의 기초교육조차 받지 못한 상태였고, 수병이 된 이후에도 그들에 대한 체계적인 교육 및 훈련은 등한시되어 숙련병이 그다지 많지 않은 실정이었죠. 따라서 전시가 아니고서는 일반 수병이 승진할 기회는 사실상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또한 현역 수병의 결혼은 금지되었고, 봉급도 낮은데다 급식도 불충분한 상태여서 러시아 해군의 수병들에게는 만성적인 불만이 잠재해있었습니다.

수병들의 주요 공급원이 러시아 사회체제 내에서 가장 비참한 상태에 있는 농노들이었던 반면, 그들을 지휘하는 사관들은 거의 전부가 귀족출신이었기 때문에 러시아 해군에는 사실상 러시아 사회의 모순이 그대로 축소된 형태로 나타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많은 함들이나 육상시설에는 혁명조직이 생겨났고, 종종 혁명조직에 의해 선동된 반란이나 태업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5) 종합
이상의 네 국가들을 비교해 볼 때, 그들 국가들의 사회구조와 발전 정도에 따라 해군이라는 조직과 구성원들의 환경에도 차이가 드러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공화제의 전통이 긴 미국의 경우 일찍부터 제도를 개선하려는 노력이 행해졌고, 영국의 경우는 혁명은 겪지 않았지만 점진적인 자유주의 개혁과 사회에서의 여러 운동 등을 반영하여 서서히 처우개선이 이뤄져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반면, 유럽에서 가장 후진적인 상태에 머물러 있었던 러시아의 경우는 귀족-농노라는 봉건적 사회구조와 그 잔재가 해군에서도 그대로 나타나는 양상을 보여줍니다. 즉 군대라는 조직 역시 사회구조의 반영인 것이고, 오스트리아 해군의 경우도 이와 마찬가지로 오스트리아의 사회구조와 그 상태가 반영되어 있었던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3. 19-20세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사회구조와 제문제

그렇다면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사회구조와 거기에 담겨있는 모순 및 문제점은 어떠했던가?

1866년 오스트리아 제국은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하고 대부분의 영향력을 잃은 상태였습니다. 이에 당시의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제프는 제국의 동부에 새로이 관심을 쏟아 이질적인 요소로 이루어진 자신의 제국을 강화하려고 애쓰게 되었죠. 프로이센과의 전쟁 전에도 독립의지가 강한 헝가리인들과 타협해야 할 필요성은 깨닫고 있었고, 그 결과는 1867년 2월 8일에 맺어진 협정이었습니다. 그 주요 내용은,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를 통합하여 1명의 공통된 국왕을 두고 국방과 외교와 경제의 문제를 공유하되, 의회만은 각각 오스트리아 의회, 헝가리 의회라는 이중체제를 두는 것이었죠.


[(좌)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제프 / (우)다양한 민족과 지역으로 구성된 제국 영토]

어쨌거나 헝가리는 이 협정에 따라 책임 있는 내각 구성권과 완전한 내정 자치를 얻었고, 그 대신 전쟁과 외교를 위해 오스트리아 제국을 여전히 하나의 거대한 국가로 유지해야 한다는데 동의했습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은 황제와 그의 신하인 외무장관, 육군장관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황제 자신을 제외하면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공동 총리는 없었으며 공동 내각도 없었죠.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공동 문제는 양국 의회에 대표자로 이루어진 대표단에서 검토하도록 되어 있었고 관세동맹과 이익금 분배 규정은 10년마다 1번씩 개정하기로 했습니다.

1) 권위주의적 사회

[제국의 수도 : 19세기말 20세기 초의 비엔나]


[빵을 사기 위해 줄을 선 시민들 (1915)]

협정은 헝가리 의회가 이것을 헌법으로 승인한 1867년 3월부터 효력을 발휘하기 시작했습니다. 오스트리아 의회는 대타협을 수정할 수 없었으며 그대로 비준하는 것만 허용되었죠. 이에 대한 보상으로 의회 다수파인 독일계 자유주의자들은 황제에게서 상당한 양보를 받아냈습니다. 개인의 권리가 확보되었고, 완전히 중립적인 사법부가 창설되었으며, 신앙과 교육의 자유도 보장되었죠. 그러나 장관들은 여전히 오스트리아 의회가 아닌 황제 개인에게 책임을 지고 있었습니다. 오스트리아의 사회는 전반적으로 볼 때 의회주의적이라거나 중소 부르주아 중심의 사회라기 보다는 황제 1인과 소수 지주계층이 주도해나가는 권위주의적 체제였습니다.

이런 상황은 비슷한 상황에 처해있던 독일제국에서도 잘 드러나죠. 독일제국은 국민 중 남자만 참여하는 보통선거에 의한 제국의회(하원)를 갖고있었으나 이는 예산심의권을 가지고 있는데 불과했습니다. 프로이센왕이 독일황제로 즉위하고 또 대개의 경우 프로이센의 수상이 제국의 재상을 겸하였으며, 따라서 정부는 황제의 임명으로 조각되었고 의회에 책임을 지지 않았지요. 제국 구성국 중 프로이센은 면적과 인구에서 전 독일의 3/5을 차지하였기 때문에 사실상 독일제국은 황제가 뜻대로 지배하였습니다. 또 독일제국에서는 재상의 권한이 컸기 때문에 비스마르크와 같은 유력한 인물이 재상인 때에는 사실상 그의 독재가 되었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통일의 의지가 상실되었죠. 이처럼 독일제국은 의회주의적인 것도 자유주의적인 것도 아닌 융커, 즉 대지주귀족이 군부와 관료의 중심세력을 독점하였기 때문에 근대적 개혁이 크게 저해되었습니다.


[당시의 풍자화 : (좌)사회주의 세력을 억누르는 비스마르크 / (우)허울뿐인 제국의회]

또한 각종 사회화 장치의 영향 또한 독일사회를 反자유주의적으로 만드는데 일조했습니다. 1차적 사회화 도구인 가족의 경우, 독일의 가족제는 전통적으로 가장의 권위적 규범을 강조하였고 가족 구성원이 법적으로 가장에게 예속됨으로써 초기 사회화 단계에서 사회 구성원들을 권위주의 체제에 적응시키는 효과를 가져왔습니다. 교육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여서, 초등교육은 독일 사회에 있어서 사회민주주의와 자유주의의 영향력을 배제하기 위한 기제로써 작용하였고 사회구성원에 있어서 근면, 복종심과 충성심 등 권위주의적 가치를 심어주는 역할을 하였죠. 대학이나 군대의 장교층 역시 하층계급에 대항한 지배엘리트 충원의 성격이 강하였고, 대학생과 장교들은 대부분 지주계층이나 상층 부르주아를 중심으로 선발되었습니다.

물론 독일제국 성립 후의 공업적 발전은 눈부신 바가 있어 20세기에 들어서자 오히려 영국을 능가하는 생산력을 가지게 되었지만, 사회의 내부는 잠재적으로 불안요소를 지니고 있었고 (융커계층과 부르주아 vs 프롤레타리아의 갈등) 결국 1차대전의 패배와 함께 제국이 몰락하는 원인이 됩니다. 이러한 권위주의적 사회구조와 거기서 파생되는 문제들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경우도 독일과 크게 다르지 않았고, 어떤 면에서는 민족문제와 맞물려 오히려 더 심각하기도 했습니다.

2) 다민족국가의 문제

[사라예보 사건(1914.6.28) : 황태자 부부를 암살한 세르비아인 민족주의자들의 체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다른 열강들과는 달리 해외 영토는 없었지만, 주로 변방 영토에 몰려있는 많은 소수민족들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매우 다른 민족들이 종종 대립되는 견해를 내놓으면서 조정 불가능한 목표를 추구하여 상황을 어렵게 만들고 있었죠.

1867년의 대타협으로 형성된 국가들 중 중심인 오스트리아 왕국은 독자적인 명칭과 왕, 그리고 독자적인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국의 나머지 지역은 뚜렷한 정의조차 없는 우연한 덩어리에 불과했지요. 이런 혼란의 원인은, 잡다한 조각으로 이루어진 오스트리아 제국이 공통된 의식이나 목적을 가진 국가가 아니라 합스부르크 왕가가 소유한 영토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19세기 이래 열병처럼 번진 민족주의의 영향을 받아, 제국내의 소수민족들은 명목상의 제국보다는 스스로의 국가를 세우고싶어했습니다. 특히 슬라브계의 크로아티아인과 슬로베니아인들은 "범 슬라브주의"의 영향을 받아 특히 과격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고, 때마침 인접국인 세르비아는 인종적·문화적으로 자신들과 비슷하다고 추정되는 모든 사람들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는 쪽으로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1908년 이후 오스트리아가 갑자기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슬라브인이 다수를 차지하는 지역입니다)를 병합하자 세르비아인들은 합스부르크 제국에 강력히 대항하기 시작했습니다. 대항방식은 오스트리아 내에서 슬라브인들의 불만을 유도하는 선동의 형태를 취했으며, 세르비아인들은 슬라브인들이 오스트리아로부터 떨어져 나와 그 영토를 세르비아와 통합할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 결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소수민족의 독립운동과 주변국과의 소요로 인해 단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습니다. 발칸지역은 유럽의 화약고가 되어버렸고, 오스트리아 당국은 이러한 소수민족들의 움직임을 강력히 탄압하고 억압함으로써 제국의 안정을 유지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강경책은 오히려 더 강한 반발을 낳을 뿐이었고, 결국 1914년 여름에는 사라예보 사건이 일어남으로써 오스트리아-헝가리 내부의 민족문제는 극한으로 치닫게 되었습니다.


5. 결론

오스트리아 사회가 지닌 권위주의적 성격과 각종 소수민족과 다인종국가의 문제는 결국 그 사회로 하여금 反자유주의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사회정책을 취하게 하였습니다. 라데츠키의 조사보고서에 나타난 오스트리아 해군의 실상은, 결국 귀족층인 장교가 하층계급 출신인 수병들을 억압하고 차별하는 구조이며 이는 당시 사회의 축소판이기도 합니다.(계급문제) 또한 다민족국가이자 소수민족의 독립열망이 활발했던 당시로서는, 해군에 있어서도 강력한 권위와 통제기제를 통해 다양한 인종으로 구성됐던 수병들을 통제할 필요성이 있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민족문제)



위의 표는 1897∼1913년간의 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의 민족 비율입니다. 제국 내에서는 소수민족으로 취급받는 크로아티아인(슬라브계)이지만, 지리적 위치상(제국내의 대부분의 해안선이 크로아티아 지역에 있습니다) 해군 내에서는 상당한 비율을 차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해군에 있어서 제국내의 다수민족&지배층인 오스트리아계가 소수민족이자 피지배민족인 슬라브계에 비해 숫적으로 열세한 것을 의미하고, 따라서 적은 숫자의 지배층이 다수의 피지배층을 통제하기 위한 방편으로 강력한 처벌과 비인권적 대우가 가중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한편, 이 문제는 단지 20세기 초의 한 동유럽 국가에서 일어났던 먼 문제만은 아닙니다. 이 글의 핵심은 군대의 여러 문제들이 사회구조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밝히는데 있고, 라데츠키의 사례는 단순히 지나간 과거의 일이 아니라 지금 우리 사회와 우리나라 군대의 경우는 어떠한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기회를 제공해주는 것이죠. 밀리터리가 단지 개별적인 사실탐구에만 그치지 않고 이런 식으로 사회 내지는 일반적 문제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다면, 이는 단순히 "취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제 하나의 "공적인 영역"으로도 인정받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참고문헌 / 자료 출처]
- 조지 이거스, 임상우·김기봉 譯, 『20세기 사학사』, 1998, 푸른역사
- 한스 울리히 벨러, 이대헌 譯, 『독일 제 2제국』, 1996, 도서출판 신서원
- 정해본, 『독일 근대 사회경제사』, 1990, 지식산업사
- 이정희, 『동유럽사』, 2001, 대한교과서 주식회사
- 하세가와 케이타로 編, 이성렬·강우석 譯, 『태평양 전쟁과 일본군 : 상권』, 1997, 정보여행
- 도베 료이치, 이현수·권태환 譯, 『근대 일본의 군대』, 육군사관학교 화랑대연구소
- 아오키 에이치, 최재수 譯,『시파워의 세계사 : 제 2권』, 2000, 한국해사문제연구소
- 마커스 레디커, 박연 譯, 『악마와 검푸른 바다 사이에서 : 영-미의 해양세계, 1700-1750』, 2001, 까치
- World War I (http://www.worldwar1.com/)
- Austrian History (http://www.countryreports.org/history//austhist.htm)
- History of Austria (http://www.geocities.com/Athens/Rhodes/6711/austria.html)

'전쟁..... > 해군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해군과 미신/금기  (0) 2012.12.22
수병의 눈으로 본 전쟁  (0) 2012.12.22
2차대전 시기 잠수함에서의 생활  (0) 2012.12.22
함내 PX 이야기  (0) 2012.12.22
해상의 생활문화 : 적도제  (0) 2012.1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