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옛 우리 이야기

[스크랩] 임진왜란때의 조선인 포로이야기

구름위 2012. 9. 28.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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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 5~10만에 달하는 조선인들이 포로로 일본으로 끌려갔고..죽어갔습니다,,

강홍중의 매양록에는 임진왜란 때 포로가 되었던 조선인 여성 두 명이 1624년 일본을 방문한 조선통신사가 머물고 있던 소우안지(宗安寺,현제 하코네에 소재)에 찾아와서 말했다는 눈물겨운 사연이 들어있습니다...

“저는 양반의 딸입니다. 고향의 소식을 듣고 싶습니다. 오랜 세월 모국어를 사용하지 않아 말이 통하지 않겠습니다만, 부모님의 안부만이라도 듣고 싶습니다.”

“고향에 돌아가고 싶습니까?”

아이들을 가르키면서 “저 아이들 때문에.....”
초겨울 눈 발 속에서 떨리는 여인의 손끝과 흘러내리는 눈물을 그 누가 감당할 수 있었으랴.
또 다른 여인은 8살 때 잡혀 와서 딸을 낳았는데, 그 아이가 14살이 되었다고 한다.
그녀도 이제 어느덧 사십을 바라보는 중년이 되어 버렸다

이외에도 포로로 끌려갔다 탈출한 정희득의 월봉해상록에도 포로로 끌려간 조선인들의 비참한 삶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최덕양이 병으로 죽었는데 왜인들이 칼을 시험한다고 너도나도 칼로 최덕양의 몸을 갈라놓았다...
담양출신 이승상은 왜인들의 외양간과 땔나무 머슴으로 고생을 하고 있다..
하군은 진주의 양반집 자식인데 왜인의 외양간시중과 꼴머슴으로 살고 있다..


후일 조선정부가 열심히 펼친 송환정책에도 불구하고 7000명만이 되돌아 오는데 그쳤습니다..
이제는 그들에 대한 기록이 많이 남아있지 않습니다..
이번에는 시리즈로 역사에 남아있는 그들에 대한 기록을 올리려 합니다.


첫편은 여대남(余大男)입니다..

여대남은 경상도 하동현 서량곡(현재 경남 하동군 양보면 박달리) 출신으로
의령 여씨 20대손 여천갑과 평강 최씨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임진왜란 당시 12살이었습니다.
1593년 7월 13일 쌍계사 보현암에서 글공부를 하던 도중
2차 진주성전투에 참가하고 돌아가는 가토 키요마사의 부하들에 의해 들켜 죽음을 당할 위기에 처합니다..
13살먹은 여대남은 그 와중에도 당당하게

獨山寒山石經斜 (춥고높은 산에 돌길이 비스듬이 있고)
白雲深處有人家 (흰구름있는 곳에 인가가 있네)

라는 구를 써보입니다..

그걸 본 가토는 비범한 아이라 생각하여 자신의 옷을 벗어 입히고 측근에 두었으며
일본으로 데리고 돌아가 가토 가문을 위한 절인 혼묘지(本妙寺,현 구마모토현 소재)의 주지 닛신(日瞋)에게 맡겨 승려로 만듭니다..
여대남은 니찌요(日遙)라는 법명으로 있다 28세에 법화종(일련정종)의 총본산인 혼묘지의 3대 주지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던 중..
대남이 40세돼던 해 대남을 우연히 보게된 쇄환사로 온 동향인에 의해 살아있다는 소식이 고향에 전해지고..
부모님이 보낸 편지를 받게 됩니다..

(요약본입니다)

내 나이 쉰여섯이고 너의 어미가 쉰이 되었단다. 네 나이도 이제 마흔이 되었겠구나.
비록 전쟁을 치뤘지만 살림살이도 나날이 낳아지고 종도 많아서 남들이 부러워하지만
오직하나 자식을 잃어버린 것이 한이 된단다
넌들 돌아오고싶지 않겠느냐만 맘대로 몸을 뺄 수 없는 너의 처지를 아비는 안단다.
다행히 돌아와 내 생전에 너를 보게 된다면야 30년 묵은 한이 하루아침에 풀릴 것만 같다.
너는 이국땅에 있는 몸이니 부디 조심조심 몸조심하고 무사히 돌아오도록 하여라
너만 보고 죽을수만 있다면 한이 없겠구나


-여대남의 아버지의 편지-

아버님의 편지를 열고 읽으려하니 감격의 눈물이 먼저 떨어집니다.

이는 하늘의 돌보심이며 신명의 도움이 아닐런지요
주군(가토와 영주 호소카와)을 찾아가 나이든 양친에게 누가 맛난 음식을 차려주고 아침 저녁으로 돌보겠습니까라고
모든 방법으로 애원했습니다만 주군은 서둘러 가신들에게 저를 견고히 감시할 것을 명령해서 저는 자못 새장속의 새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조만간 하늘이 무심치 않아 소자가 귀국할 수 있다면 부모님께서는 잃었던 아들을 얻고 저로서는 잃었던 어버이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저는 보내주신 편지를 조석으로 모셔 받들겠사오니 두분께서도 이 아들의 편지를 자식 보듯이하며 가지고 놀아주십시오
푸른 하늘 아래 어이 저만 홀로 돌아가지 못하는 것인지요
부디 천수를 누리시어 평화로운 시대에 만날 수 있을 날까지 저를 기다려 주십시오


-여대남의 편지-

이후 고향으로 돌아가고픈 마음에 왜인들이 가지고 싶어하는 매 두마리만 구해주면
어떻게든 뇌물로 써서 빠져나가겠다고 편지를 보내지만..
매는 국가에서 관리하는 품목이라 구할 방법이 없어서 괴로워하는 아버지의 답장이 옵니다..
결국 여대남은 고향에 돌아가지도 부모님을 뵙지도 못한체 79세로 일본에서 숨을 거둡니다..
현재 혼묘지에서는 아직도 대남을 고려일요(高麗日遙), 고려상인(高麗上人)이라 부르며 존경의 뜻을 나타낸다 합니다..
또한 이때 주고 받은 편지를 혼묘지에서는 보물로 보관하고 있습니다..


1597년 7월 16일.

... 저녁에 영암 송진면에 사는 사삿집 종 세남이 서생포로부터 맨몸으로 왔기에 그 까닭을 물어보았더니 이렇게 말하였다.

 

"7월 5일에 우후가 타는 배의 격군이 되어 칠천량에 도착해서 자고, 6일에 옥포로 들어갔습니다. 7일 새벽에는 말곶을 거쳐 다대포에 도착하니 왜선 8척이 정박하고 있었습니다. 여러 배들이 곧바로 돌진하였더니 왜적들은 모조리 육지로 올라가고 빈 배만 남겨두었습니다. 우리 수군들은 그것을 끌어내다 불태우고 그 길로 부산 절영도 바깥 바다로 향해 갔습니다. 그때 마침 대마도로부터 건너오는 적선 1천여 척과 마주쳐서 서로 맞붙어 싸우려고 했으나 왜선들은 흩어져서 회피하므로 결국 잡아 섬멸시킬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탄 배와 다른 배 6척은 배를 제어하지 못하여 표류하다가 서생포 앞바다에까지 이르렀습니다. 그곳에서 육지로 올라가다가 적들에 의해 거의 다 살육을 당하고, 저만 혼자서 수풀 속으로 들어가 기어서 겨우 목숨을 살려 여기까지 왔습니다."

 

듣고 보니 참으로 놀랄 일이었다. 우리나라에서 믿는 것은 오직 수군뿐인데, 수군이 이러하다면 다시 더 무엇을 바랄 것인가. 생각할수록 분하여 가슴이 온통 찢어질 것만 같았다. 또 선장 이엽이 왜적에게 붙들려 갔다고 하니 더욱 통분하였다. 
       
                                                                                                  -<난중일기>중에서-


이번 회의 주인공은 여기나온 이엽(李曄)장군입니다..

이 분의 기록은 난중일기뿐아니라 서애 유성룡의 단구록(丹舊錄)과

역시 일본에 잡혀갔다 탈출한 강항의 간양록(看羊錄)에 등장합니다.
이엽장군은 연안이씨 이억복(李億福)의 장자이며 용인 하동촌 출신입니다.
일찌기 무과에 급제하여 금성현령으로 지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좌병사 소속 우후(참모장)로 참전합니다.
이후 칠천량해전에 참가하셨다가 전함이 좌초되어 가토 키요마사가 이끄는 왜군에 생포되어 일본으로 압송되었습니다.
토요토미는 이엽장군의 재능과 용모에 반해 여러 여러번 초대하여 장난을 치기도 하였으며
당시 재무장관격이던 나쓰가 마사이에의 집에 의탁시켜 비단옷을 입히고 호의호식하게 하라하며 총애했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이엽장군은 탈출해 조선으로 돌아갈 생각만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토요토미에게 받은 비단을 팔아 돈을 모으고 같이 탈출할 포로들을 모집힙니다..
배를 사는데 성공한 이엽장군은 포로들과 함께 탈출하나 
현재의 히로시마현 후쿠야마시 도모노우라 에서 토요토미가 보낸 추격대에게 따라잡히자
자신의 칼로 가슴을 찔러 칼이 등뒤까지 꿰뚫린채 바다에 투신합니다..
그리고 다른 포로들 역시 자살하거나 붙잡힙니다.
이엽장군의 시체는 쿄토로 보내져 사지를 우차에 매어 찣어죽이는 형을 한후 거리에 내걸렸으며 
당시 일본의 조선인 포로들은 이 일을 듣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전해집니다

다음은 이엽장군이 탈출하며 지으신 시입니다..


 

봄은 동쪽에서 이르는데 한역시 많고
바람은 서쪽으로 돌아가는데 나의 생각역시 바쁘구나
아버님은 밤지팡이(나를) 잃고 달밝기만 기다리시고
아내는 정신을 잃고 밤새 울고있을 것만 같구나
전해내려오는 옜집에 꽃이 떨어지는데
대대로 내려온 선영에는 잡초가 무성하겠구나
삼한의 당당한 후예로써
어찌하여 이역에서 짐승들과 섞이랴

간양록의 저자 강항 역시 쿄토에 와서 그 이야기를 듣고 참다운 대장부라 부르며 눈물흘렸으며
이 시를 들은 강항은 무력한 서생인 자신을 부끄러워하며 답시를 씁니다..

장군의 기개는 하늘같이 장대한데
어느 누가 입을 놀려 가는 길을 바쁘게하는가
절의있는 자는 동해바다에 즐겁게 잠길것이고
맑은 절개는 수양산에 뻗었어라
장대끝에 달린 머리 가을비가 씻어주고
해골묻힌 흙위에야 거친풀 날까보냐
만권의 책읽은 서생은 면목이 없고
이태동안 궁한 신세로 양치고 있으니



이후 조선에 이 사건이 알려진후 ‘국조인물지(國朝人物志)’와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에 등재해 장군을 기렸습니다


출처 : 요트고래사냥
글쓴이 : 베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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