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간호사들인 의녀
간호사에게 행정 사무를 맡기는 병원들도 있지만, 오늘날의 간호사는 기본적으로 의사의 진료를 돕는 역할을 수행한다. 하지만, 의녀는 그렇지 않았다. 간호사 업무를 수행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들이 그것만 담당한 것은 아니었다. 창덕궁에 성정각이란 전각이 있다. 성정각 맞은편에 작은 건물이 있다. 조화어약(調和御藥, 임금의 약을 조절) 및 보호성궁(保護聖躬, 임금의 옥체를 보호)이란 현판이 걸린 건물이다. 한때 내의원 부속 건물로 사용된 곳이다.
임금에게 드릴 약을 조절하고 그 옥체를 보호하는 역할은 내의원 의사의 몫이었다. 내의원 의사를 보조하는 것은 의녀의 몫이었다. 하지만, 의녀는 단순히 약을 조절하고 옥체를 보호하는 임무만 맡지는 않았다. 의기(醫妓)라고도 불린 데서 알 수 있듯이, 의녀는 기생 역할도 수행했다. '의기'에서 기생을 의미하는 '기'자가 뒤에 붙은 것은 이들이 본질적으로 관기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의술을 담당하는 관기라는 의미에서 그렇게 불렀던 것이다. 의기의 업무 가운데서 기생 역할이 꽤 큰 비중을 차지했음을 반영하는 대목이다.
관기는 여자 공노비(관노비)의 보직 중 하나였다. 의녀 역시 관청에 얽매인 공노비였기 때문에, 상황에 따라 기생 업무를 담당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의녀는 기생 외에 또 다른 역할도 수행했다. 그것은 궁궐 경찰 역할이었다. 이들은 사법기관이 궁궐 여성들을 잡아들일 때 체포조의 임무를 수행했다. 환자 치료와 기생 업무에 더해 경찰 사무까지 담당했으니, 의녀는 상당히 다양한 얼굴을 갖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대궐에서 여성을 체포할 수 있는 사람들은 크게 세 부류였다. 감찰궁녀 외에도 금부나장과 의녀가 그런 일을 담당했다. 금부나장은 고급 사법기관인 의금부의 하급 관리였다.
이들 중에서 의녀가 체포를 담당한 사례 중 하나를 <계축일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계축일기>는 광해군의 정적이자 계모이며 선조 임금의 젊은 부인인 인목대비의 입장에서 당시의 궁궐 상황을 기록한 책이다. 광해군 집권 초반에 인목대비의 측근들이 구속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대비의 사주를 받은 궁녀들이 이미 죽은 의인왕후(선조의 첫째 부인)를 저주한 적이 있다는 혐의가 제기됐기 때문이다. 혐의가 제기되자, 금부나장들이 인목대비의 전각에 들이닥쳤다. 체포대상 중에는 거물급인 김상궁이 있었다. 김상궁은 임진왜란 때 선조를 극진히 보좌한 공로로 승은상궁(후궁 대우)에 오른 고위 인사였다. 인목대비가 궁녀 중에서도 위대한 분이라고 극찬한 인물이다. 김 상궁은 금부나장들에 의해 끌려가면서 이렇게 탄식했다.
"의녀를 시켜서 잡아내는 것도 아니고 금부나장의 손으로 잡아내게 하니, 이 치욕이 내 몸에 맞기나 하는 것인가" '의녀를 시켜서 잡아내는 것도 아니라는 김상궁의 탄식에서, 금부나장보다는 의녀가 궁녀를 체포하는 것이 훨씬 더 일반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의녀들은 가슴에 침 주머니를 차고 다니면서 궁궐 사람들을 치료하기만 한 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체포조로 돌변해서 궁녀들을 잡으러 다니기도 했던 것이다. 의녀들은 체포 과정에서 공포 분위기도 연출했다. <계축일기>에 따르면, 이들은 인목대비 시녀들의 머리채를 휘어잡기도 했다. 궁녀들은 이들을 의녀대라 불렀으며, 의녀대의 출현을 호랑이 떼의 출현만큼이나 무서워했다. <계축일기>의 분위기를 볼 때, 감찰궁녀가 체포할 때보다 의녀들이 체포할 때 궁녀들의 공포심이 훨씬 더 컸던 모양이다. 가슴에 침 주머니를 찬 의녀들이 우르르 달려든다면, 웬만한 궁녀들로서는 두려움을 감추기 힘들었을 것이다.
궁궐에서 의녀들을 체포활동에 동원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첫째, 감찰궁녀는 전각마다 한 둘밖에 없는 데 비해, 의녀들은 내의원이라는 단일 조직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통일적인 체포활동을 수행하기 편했을 것이다. 둘째, 의녀와 궁녀 사이에는 동질감이 약했기 때문에, 궁녀들의 반감을 초래할 체포활동에는 궁녀보다는 의녀를 활용하는 게 더 나았을 것이다. <계축일기>의 김상궁처럼 궁녀들의 존경을 받는 인물을 체포할 때는 감찰궁녀보다는 의녀나 금부나장이 훨씬 더 나았을 것이다.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의 화성행궁에는 궁녀와 의녀의 밀랍인형을 한데 모아놓은 공간이 있다. 이 장면을 보면 의녀와 궁녀가 한 식구처럼 보이지만, 이들은 소속이 달랐던지라 동료의식이 약했다. 그렇기 때문에 의녀들은 별다른 심리적 부담 없이 궁녀들을 체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처럼 의녀들은 궁녀들이 몸이 아플 때는 물론이고 죄를 지었을 때도 궁녀들을 방문했다. 때로는 팔을 비틀어 사람을 체포하고 때로는 바닥에 눕히고 침을 놓아주었으니, 궁궐 여성들의 눈에는 의녀들이 무섭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을 것이다. 궁궐 여성들은 의녀들을 볼 때마다 '병 주고 약 준다'는 속담을 떠올렸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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