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에 선발된 후비(后妃)들은 대부분 적막한 고초를 겪어야 했을 뿐아니라, 더욱 잔혹한 현실 즉 순장에 직면해야 했다. 황제가 붕어하면, 황궁안은 통곡소리로 가득하다. 그녀들은 죽은 황제를 애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이미 죽은 황제를 위하여 순장될까봐 두려워서 우는 것이다. 황제가 죽으면, 환관들은 자녀를 낳지 못한 후비들을 하나의 작은 편전(偏殿)에 모은다. 땅바닥에는 작은 스툴(?子)을 일렬로 놓고, 그 위의 서까래에는 한가닥 한가닥의 하얀비단(白綾)이 걸려 있다. 이것은 후비들이 목을 매기 위한 준비이다.
<<명조소사>> 권의 기록에 따르면, 주원장이 죽은 후 "시침한 궁인은 모조리 순장했다'고 적고 있다. 그를 시침한 40여명의 비빈은 모조리 효릉에 순장되었다. 그후, 명성조(영락제)의 장릉에도 비빈 30여명이 순장되었고, 명인종의 헌릉에도 7명의 비빈이 순장되었다. 명선종의 경릉에는 10명의 궁인이 순장되었다. 비빈들이 순장될 때, 그 모습은 아주 참혹하다. 명성조가 죽은 후, 궁인중 순장된 자가 30여명인데, 모조리 목을 매어 자살하도록 강제된다. 명선종을 위하여 순장된 10여명의 궁녀들 중에는 곽애(郭愛)라는 궁녀가 있었는데, 입궁한지 1달도 채 되지 않았고, 황제의 얼굴도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죽은 황제를 위하여 순장된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슬픔에 젖어 절명시를 하나 남겼다: "수단유수혜(修短有數兮). 부족교야(不足較也). 생이여몽혜(生而如夢兮). 사칙각야(死則覺也). 선오친이귀혜(先吾親而歸兮). 참여지실효야(?予之失孝也), 심처처이불능기혜(心悽悽而不能己兮), 시칙가도야(是則可悼也). 취피박작료순장인(就被迫作了殉葬人)"
후비들의 순장방식은 주로 자액(自縊, 목을 매서 자살함), 절식(絶食)이다. 이에 관하여 중국정사의 기록은 별로 없다. 그러나, 조선의 <<조선왕조실록>>에는 명성조의 비빈들이 집단순장당한데 대한 과정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명나라 영락제22년 십월 무오일, 삼십여명의 선발된 순장궁녀비빈이 전각밖에서 식사를 하고, 전각내로 끌려들어왔다. 이때, 궁녀들의 곡성이 전각을 진동했다. 전각내에는 삽심여개의 '소목상(小木床)'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순장당할 비빈들은 목상 위로 올라가도록 명령받는다. 그녀들의 머리 위에는 이미 자결을 위하여 준비된 밧줄이 놓여 있었다. '머리를 그 안에 넣고, 소목상을 치우니, 모두 목이 졸려서 죽었다."
이 삼십여명중에는 두 명의 조선여인이 있었다. 한 명은 궁녀 한씨(韓氏)이고, 다른 한명은 최씨(崔氏)로 봉호는 미인(美人)이었다. 죽기 직전에, 한씨는 돌연 땅바닥에 꿇어앉아, 그녀를 죽음으로 내몬 명인종에게 애절하게 호소했다. 명인종에게 그녀를 풀어주어 고향으로 돌아가서 노모를 모실 수 있게 해달라고. 그러나 명인종은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 결국 이 두 명의 조선여인은 이국타향에서 불귀의 객이 되어버린 것이다. 한씨는 죽기 전에 그녀의 유모와 이별했다. 한씨는 머리를 돌려 유모를 향해 소리쳤다: "어머니, 저 갑니다. 어머니, 저 갑니다(娘, 吾去)"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리 아래의 소목상이 치워졌다. 순식간에 삼십여명의 여인은 목졸려 죽어갔다.
이들 순장된 비빈들의 사후에, 다음번 황제는 보통 그녀들 및 그녀들의 친척에게 대우를 잘해준다. 보통은 시호를 추존하고, 그녀들의 행적을 표창하는 것이다. <<명사. 후비전>>의 기록에 따르면, "태조가 붕어하고, 궁녀들중 따라죽은 자가 많았다. 건문, 영락때, 계속하여 잘 대우해주었다. 예를 들어, 장봉, 이형, 조복, 장벽, 왕빈의 여러 집안은 모두 금의위천백호를 세습하였는데, 사람들은 이들을 '태조조천녀호(太祖朝天女戶)'라고 불렀다. 성조, 인종, 선종등도 모두 그러했다."
명나라의 황제중에서 명영종 주기진(朱祁鎭)은 별다른 업적이 없는 사람이고, 오히려 일생동안 다른 사람에게 휘둘려 살았다. 그는 9살에 등극하여, 38살에 사망한다. 그는 '토목지변(土木之變)을 겪으면서 포로로 잡혀갔다가 다시 어렵게 귀국하여 황제위에 다시 오른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임종시에 유조를 남겨서, "사람을 순장하는 것은 내가 차마 하지 못하겠다. 이 일은 나부터 그만두는 것이 좋겠다. 이후에도 다시는 순장을 하지 말라" 이렇게 하여 참혹한 순장제도는 명나라에서 자취를 감추게 된다.
그 원인을 따져보면, 한편으로는 명영종이 어려서 등극하여, 그의 부친인 명선종의 궁녀들이 순장되는 것을 보고는 어린 마음에 깊은 상처와 공포스러운 기억을 남겼을 수 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주헌왕(周憲王) 주유돈(朱有燉)과 관련이 있다. 주헌왕 주유돈은 명태조의 다섯째 아들인 주숙(朱?)의 아들로, 정통4년에 죽었다. 죽을 때 자식이 없었다. 그가 죽기 전에, 상소를 올려 사후에 검약하며, 백성들을 동원하지 말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명영종은 특별히 명을 내려, "비, 부인이하가 따라죽을 필요가 없다. 나이가 어리고 부모가 있는 자는 모두 돌려보내라"고 하게 된다. 그런데, 이 황제의 명령이 도착하기 전에, 왕비 공씨와 시씨등 6명의 부인은 모두 같은 날에 죽어버렸다. 명영종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할 수 없이 그녀들을 '정렬' '정순'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표창하는 수밖에는.
가장 중요한 원이는, 명영종은 자신이 사랑하는 부인을 보호하기 위하여, 최대한도로 자기 사후에 처가 순장될 가능성을 배제시켰다는 것이다. 그의 처인 전황후(錢皇后)는 명영종과 고생을 함께하며 오랫동안 같이 살아왔다. 환난을 겪은 명영종이 이를 잊을 수는 없다. 그러했지만, 황후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복잡한 궁중내의 권력투쟁과정에서 황후는 아주 불리한 위치에 놓인 것이다. 당시 주귀비(周貴妃)의 아들이 황태자가 되었다. 주귀비는 황제가 전황후를 총애하는 것을 아주 질투했다. 명영종이 아직 죽기도 전에 환관이 황후를 폐위하자고 건의했다. 비록 그가 거절하여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그는 그 배후에 어떤 음모가 있는지를 눈치챘다. 명영종이 죽을 때, 더 이상 전황후를 보호하기 힘들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황후를 순장하도록 할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구두로 유명을 내려 황후와 비빈의 명분을 확정하고, 비빈을 순장하지 말며, 무릇 네가지 일은 각신들이 처리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하여 명영종은 전황후의 명분을 제대로 정해주었다. 대신들은 명영종이 후궁을 순장하지 말도록 유조를 내렸다는 소식을 듣고는 감동하여 눈물을 흘렸다. 명영종이 죽은 후, 주귀비는 과연 전황후에 대하여 공격을 감행한다. 다행히 일부 대신들이 유조와 정리에 근거하여 싸워주는 바람에 주귀비의 의도는 성공하지 못한다. 전황후 이외에, 명영종과 고난을 함께했던 비빈들도 물론 명영종이 고려하였을 것이다.
명영종의 후임황제인 명헌종도 임종전에 다시 한번 순장하지 말 것을 강조했다. 양대의 황제들이 확실히 집행하는 바람에 명나라초기부터 내려온 순장제도는 드디어 사라지게 된다.
사람을 따라서 뭍는 순장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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