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후 포로로 잡혀간 피로인(被擄人) 쇄환 문제가 중요하게 대두했다. 선조 36년(1603년) 일본을 장악한 도쿠가와 막부(德川幕府)는 조선과의 관계개선에 적극적이었으므로 포로 쇄환에 부정적이지 않았다. 선조 40년(1607) 여우길(呂祐吉)과 경섬(慶暹) 등을 일본에 회답사(回答使)로 파견하다가 중도에 명칭을 '회답 겸 쇄환사(刷還使)'로 바꾼 이유도 포로 쇄환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의지가 표명된 것이었다.
선조 38년(1605) 승려 유정(惟正:사명대사)이 3000여 명을 쇄환해 온 것은 큰 성과였지만 전체 피로인의 20분의 1도 안 되는 부족한 숫자였다. 여우길과 경섬은 막부의 협조를 얻어 쇄환에 적극 나섰으나 응한 조선인은 1418명뿐이었다. 그나마 이때는 실적이 좋은 편이었다. 광해군 9년(1617) 일본에 간 이경직(李景稷)은 『부상록(扶桑錄)』에서 "왜경(倭京:교토)에 도착한 이후에 와서 뵙는 자는 연달아 있었지만 돌아가기를 원하는 자는 매우 적었다… 되풀이해서 간곡하게 타일러도 의혹(疑惑)이 풀리는 자는 또한 적었다(8월 22일)"고 적고 있다. 충청도 출신의 김계용(金繼鎔)은 "제가 거주하는 지방에도 조선 사람은 많으나 본국 사정을 몰라 모두 돌아가기를 즐겨하지 않습니다(9월 6일)"라고 말했다. 12~13세 때 끌려왔던 창원(昌原) 출신의 김개금(金開金)은 '부모를 만나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타이름을 받고도 '20여 년이나 은혜를 받은 사람을 저버릴 수 없다'면서 귀국을 거부해 옆에 있던 왜인이 혀를 끌끌 찼다고 전한다. 이들의 귀국 거부 이유는 조선은 도공(陶工) 같은 기술자들을 천시한 데 비해 일본에서는 우대했기 때문이다. 또한 임란 와중에 천인(賤人)들도 신분상승이 가능한 면천법(免賤法) 제정 등 각종 개혁정책을 주도하던 정승 류성룡(柳成龍)을 종전과 동시에 실각시키고 다시 양반 사대부의 천국으로 돌아간 것도 영향을 끼쳤다.
'의혹(疑惑)이 풀리는 자는 또한 적었다'는 말처럼 조선에 대한 불신이 팽배했다. 막상 귀국한 기술자들은 내팽개쳐졌다. 인조 3년(1625) 3월 회답사 정립(鄭 < 5CA6 > ) 등은 갖은 고생 끝에 146명을 데려왔으나 "양식이 떨어져 원통함을 호소하고 있다"고 호소할 정도로 배신당했다. 현재 고교 졸업생의 80%나 대학에 진학하는 이상 현상이나 강경으로만 치닫는 노동운동의 배경에는 우리 사회의 뿌리 깊은 기술자 천시 역사가 그 배경이 아닌가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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