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륜스캔들 고려 무신정권을 무너뜨리다.
지난 수천 년간 역사를 기록한 주체는 주로 남성 지식인이었다. 그들이 역사 기록을 독점하다 보니 부작용이 일어났다. 하나는 남성이 역사 기록을 독점함으로써 여성의 정치적 역할을 축소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지식인이 역사 기록을 독점함으로써 정치에서 성(性)이 갖는 위상을 낮게 평가했다. 심지어 그들은 성을 스캔들의 영역으로 치부하였다.
1170년 쿠데타로 시작된 무신정권은 1270년 마지막 지도자 임유무의 피살과 함께 종식되었다. 이 100년간 무신정권은 이의방·정중부·경대승·이의민·최충헌·최우·최항·최의·김준·임연·임유무라는 11명의 지도자를 배출했다. 무신정권이 붕괴한 최대 요인은 고려왕-몽골 연합군과의 전쟁에서 패배했다는 점에 있다. 하지만, 이 점만으로는 무신정권이 몰락한 원인을 완전히 규명할 수 없다.
왜냐하면, 본래 무신정권은 고려왕과 몽골을 동시에 상대할 만한 역량을 보유했기 때문이다. 무신정권이 고려왕을 허수아비로 만든 상태에서 몽골과 장기전을 치렀다는 사실이 그 점을 증명한다. 따라서 무신정권 붕괴의 원인을 좀 더 명확히 설명하려면, 이 정권의 역량이 연합군의 역량보다 약해진 계기가 무엇인지 밝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 계기를 규명하려면, 무신정권이 튼튼했던 시기에서 허약한 시기로 전환되는 과도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탐색해야 한다.
제1대 이의방으로부터 제6대 최우 때까지, 무신정권은 비교적 튼튼했다. 1170년부터 1249년까지의 79년간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런데 제7대 최항 때부터 무신정권은 현저히 약해졌다. 무신정권을 부정하고 왕실을 지지하는 세력이 최항의 집권을 무산시킬 뻔 했을 뿐만 아니라, 최항 집권 이후로는 왕정복고가 시대적 과제가 되었다는 점에서 그 점을 알 수 있다.
대부분의 경우, 외국과의 전쟁을 지휘하는 지도부는 국내의 전폭적 지지를 받기 마련이다. 그런데 최항 때부터는 무신정권이 몽골과의 전쟁을 수행하는 중에도 왕정복고를 요청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이것은 최항 때부터 무신정권이 신뢰를 상실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같은 변화는 무신정권 지도자의 권력보유 기간에서도 나타난다. 최우 때까지, 무신정권 지도자들은 평균 13.2년간 권력을 보유했다. 반면, 최항 때부터는 그 기간이 평균 4.2년으로 줄어들었다.
<고려사> '최항 열전'에 따르면, 최우에게는 적자가 없었다. 개차반 같은 두 서자만 있었을 뿐이다. 기생첩의 몸에서 태어난 최항은 조폭들과 어울려 고리대업을 하면서 서민들을 괴롭혔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부하들이 유부녀를 강간하고 관청 공용물을 함부로 사용하는 행위까지 묵인했다. 도저히 지도자가 될 수 없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최우는 처음에는 서자들을 후계구도에서 배제했다. <고려사> '김약선 열전'에서는 처음에는 최우가 김약선에게 병권을 넘겨줄 생각을 갖고 있었다고 했다. 사위인 김약선을 후계자로 점찍었던 것이다. 최우가 두 서자인 최만종과 최항을 지방으로 내쫓은 것은 사위의 대권가도를 다지기 위한 것이었다.
김약선의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인 <고려사> '김태서 열전'에 따르면, 이 집안은 신라 왕실의 피를 물려받은 명문가 출신이었다. 또 '김약선 열전'에 따르면, 김약선은 관료 사회에서 정상적인 승진 절차를 거쳐 권력 핵심에 오른 인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누가 보더라도 최항보다는 김약선이 무신정권을 안정적으로 끌고 갈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뜻밖의 사건이 후계구도를 물거품으로 만들어놓았다. 김약선 부부의 불화가 돌발 변수가 된 것이다.
김약선이 명문가라는 사실에서 느낄 수 있듯이, 최씨와 김약선의 혼인은 정략결혼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인지 이 부부의 관계는 냉랭했다. '김약선 열전'에 따르면, 김약선은 최우 집안의 시녀들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고, 부인 역시 남자 노비와 그런 관계를 맺었다. 김약선의 불륜은 크게 문제되지 않았다. 최우는 시녀들을 비롯한 관련자들만 처벌했을 뿐, 사위인 김약선은 묵과했다. 후계구도를 지키기 위해서였던 듯하다. 부인인 최씨 여인도 한탄만 했을 뿐, 남편에게 타격을 주지는 못했다.
그러나 최씨 여인의 불륜은 그렇지 않았다. 이것은 후계구도에 영향을 주었다. 자신의 불륜 사실이 남편의 귀에 들어가자, 최씨는 상당한 두려움을 품었다. 최씨가 생각해낸 방안은, 남편의 범죄사실을 조작해서 아버지에게 고발하는 것이었다. '김약선 열전'에서는 최씨가 구체적으로 어떤 사건을 조작했는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그저 '다른 사건'이라고만 말하고 있다. 김약선 중심의 후계구도에 치명타를 가할 만하면서도, 뭔가 입에 담기 민망한 사건이었던 모양이다. 김약선이 최우의 시녀를 건드린 사건과는 질적으로 다른 차원의 사건이었던 듯하다.
최우는 딸의 고발을 믿고 사위를 죽였다. 이것은 단순히 사위를 죽인 게 아니라 무신정권의 후계자를 죽인 사건이었다. 적자가 없어서 사위를 후계자로 삼으려 했던 최우는 결국 서자 최항이라도 불러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최우는 나중에야 사건의 진상을 파악했다. 자기 딸이 거짓으로 남편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이를 계기로 최우는 딸과 의절하는 한편, 딸과 간통한 노비도 죽여 버렸다. 뒤늦게 김약선의 명예를 회복시켰지만, 이미 너무 늦은 뒤였다. 이제는 미우나 고우나 서자 최항을 미는 수밖에 없었다.
명문가 출신에다가 정통 관료파인 김약선이 후계자가 됐다면, 무신정권은 상대적으로 안정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자격이 현저히 떨어지는 최항이 후계자가 되면서 무신정권에 대한 신뢰는 추락하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고려왕에 대한 신뢰가 높아지게 되었다. 이것은 고려왕과 몽골의 연대를 초래했고 뒤이어 무신정권의 몰락을 가져왔다.
불륜을 숨기고자 아버지의 후계자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최씨 여인의 행위는 옛날 역사가들의 눈에는 단순한 스캔들이나 해프닝 정도로 비칠 수도 있다. 하지만, 정치 영역에서 여성과 성이 갖는 역할을 긍정할 경우, 이 사건이 무신정권의 약화를 초래한 핵심 요인 중 하나였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렇듯, 최씨 여인과 김약선의 관계에서 알 수 있듯이, 무신정권의 약화를 초래한 결정적 행위 중 하나는 여성의 손에 의해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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