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임없이 이어진 역모와 반역
조선의 대표적인 반역, 반정을 살펴보면 대략 아래와 같다.
1차 왕자의 난(1392년)
태조 재임 시절 1차 왕자의 난은 1392년 8월 왕위계승권을 둘러싼 왕자들 간의 싸움으로 '방석의 난', '정도전의 난', '무인정사의 난'으로도 불린다. 이 난은 당시 권력을 쥐고 있던 정도전 일파를 방원 일파가 타도하고 권력을 차지한 사건이지만 이복 형제간의 왕위 쟁탈전을 위한 골육상쟁 사건으로 볼 수 있다. 이를 시발점으로 조선은 오백년 내내 끊임없이 반정과 반역이 일어났고 주도자들에 대해서는 무자비한 형벌로 3족을 멸하는 등 대명률을 따른 형벌로 좁은 나라에서 잔혹하기 그지없는 형벌로 다스렸다. 그것은 어쩌면 이성계 자신이 쿠테타로 고려 왕실을 무너뜨리고 조선을 세운 점에서 도덕성을 상실한 쿠테타였으며 칼로 일어선 자는 칼로 망한다는 진실을 증명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태조와 강비 그리고 정도전의 방원에 대한 지나친 경계와 냉대는 결국 혈육간의 살육전을 야기하였던 것이다. 방원은 방의, 방간 등 형제들과 함께 정도전 일파를 살해하기로 결심. 정도전 일파의 밀모설을 만든다. 즉 정도전, 남은, 심효생 등이 밀모하여 태조의 병세가 위독하다고 속이고 왕자들을 궁중으로 불러들인 후 일거에 한씨 소생의 왕자들을 살육하려 한다는 것이다.
2차 왕자의 난(1400년)
역시 왕위계승권을 둘러싸고 일어난 왕자 사이의 싸움으로, '박포의 난' 또는 '방간의 난'이라고도 한다. 1차 왕자의 난이 이복형제 간의 싸움인데 반해 2차 왕자의 난은 동복형제 간의 싸움이었으며 방원에 대한 방간의 시기심이 불러일으킨 사건이었다. 이 일로 방원은 세제(왕위계승자로 결정된 왕의 동생)의 자리를 확보하게 된다.
'제1차 왕자의 난'을 거치면서 조선의 세력 구조는 방원 일파에게 유리하게 변하여 이들이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런데 방원의 동복형제들은 여전히 사병을 거느리고 있어 이들은 방원에게 만만치 않은 위협 요소가 되고 있었다. 특히 태조의 넷째 아들인 방간은 노골적으로 왕위 계승에 대한 야심과 호기를 드러내곤 하였으나 인격·공훈·위세가 방원에 미치지는 못하였다. 이에 방원은 정도전이 추진했던 병권집중운동을 이어받아 왕자들의 사병을 혁파할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고 있었다.
방원이 정략적으로 왕자들의 사병을 혁파할 조짐을 보이고 또한 왕위 계승에 대한 조정의 중론이 방원쪽으로 흐르자 방간은 점차 시기심과 불만이 쌓여 갔다. 그런 와중에 박포가 방원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고 밀고하자, 방간은 그 진위를 가려보지 않은 채 사병을 동원하여 난을 일으킨 것이다.
지중추 박포는 '제1차 왕자의 난' 때, 정도전 등이 방원을 제거하려 한다고 밀고하는 등 방원을 도와 난을 성공적으로 수습한 공이 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공행상 과정에서 일등공신이 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죽주(지금의 영동)에 귀양보내지기까지 하였다. 그러던 중 방간이 방원에게 불만을 품고 있음을 알고, 방간에게 방원이 장차 방간을 죽이려 한다고 거짓 밀고하였다. 방간이 이를 믿고 군대를 동원하자 방원도 군대를 동원하여 개경에서 싸움이 붙었는데, 형세가 불리하였던 방간은 방원에게 패배하여 유배되고 박포는 사형에 처해졌다.
방간의 난이 수습된 후 조정의 대신들은 수차례에 걸쳐 방간을 죽여야 한다고 간언했으나 방원은 왕위에 오른 뒤에도 끝까지 그를 죽이지 않고 유배시키는 데 그쳤다. 방원은 오히려 방간이 병이 나면 의원을 보내 그를 치료하게끔 도와주기도 하였다. 또한 방원이 상왕으로 있던 세종의 치세 때에도 방간에 대한 치죄가 논의되었지만 방원과 세종은 이를 거부하였다. 방간은 방원의 배려에 따라 천명을 누리다가 1421년 홍주에서 죽었다.
계유정난 (1453년)
1453년(단종 1년) 수양대군이 왕위를 빼앗기 위하여 일으킨 사건이다. 세종의 뒤를 이은 병약한 문종은 자신의 단명을 예견하고 영의정 황보인, 좌의정 남지, 우의정 김종서 등에게 자기가 죽은 뒤 어린 왕세자가 등극하였을 때 그를 잘 보필할 것을 부탁하였다. 세 사람 중 남지는 병으로 좌의정을 사직하였으므로 그의 후임인 정분이 대신 당부를 받았다.
그러나 수양대군은 1453년 문종의 유탁을 받은 세 정승 가운데 지혜와 용기를 겸비한 김종서의 집을 불시에 습격하여 그와 그의 아들을 죽였다. 이 사변 직후 수양대군은 '김종서가 모반하였으므로 죽였는데, 사변이 너무 급하게 일어나 아뢸 틈이 없었다.'고 사후에 상주하였고 곧 이어 단종의 명이라고 속여 중신들을 소집한 뒤, 사전에 준비한 생살계획에 따라 황보인, 이조판서 조극관, 찬성 이양 등을 궐문에서 죽였으며 좌의정 정분과 조극관의 동생인 조수량 등을 귀양보냈다가 죽였다. 또 수양대군은 자신의 친동생인 안평대군이 '황보인·김종서 등과 한 패가 되어 왕위를 빼앗으려 하였다.'고 거짓 상주하여 강화도로 귀양보냈다가 후에 사사하였다.
수양대군은 10월 10일의 정변으로 반대파를 숙청한 후 정권을 장악하였는데 그는 영의정과 이조·병조 판서, 내외병마도통사 등을 겸직하였고 정인지를 좌의정, 한확을 우의정으로 삼았으며 집현전으로 하여금 수양대군을 찬양하는 교서를 짓게 하는 등 그의 집권태세를 굳혀갔다.
이 정변이 계유년에 일어났으므로 이를 '계유정난'이라 하는데 이 사건에 공이 있다 하여 수양대군 자신과 정인지·한확·이사철·박종우·이계전·박중손·김효성·권람·홍달손·최항·한명회 등 37명을 정난공신에 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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