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어떤사회 였을까(1)??

13.끊임없이 이어진 역모와 반역

구름위 2023. 4. 10.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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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반정(1623년)

1623년(인조 1년) 서인 일파가 광해군 및 대북파를 몰아내고 능양군 종(후의 인조)을 왕으로 옹립한 사건이다. 선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당론의 폐해를 통감하고 이를 초월하여 좋은 정치를 해보려고 애썼으나, 자신이 대북파의 도움을 받아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당론을 초월할 수 없었다. 처음에는 이원익·이항복·이덕형 등 명망 높은 인사를 조정의 요직에 앉혀 어진 정치를 행하려 하였으나, 이이첨·정인홍 등 대북파의 무고로 친형 임해군과 이모제 영창대군을 죽였으며, 또 계모인 인목대비를 유폐하는 패륜을 자행하였다.

이와 같이 광해군의 실정이 계속되어 기강이 문란해지자 서인 이귀 · 김자점 · 김류 · 이괄 등은 반정을 모의, 1623년 3월 21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모든 계획을 추진하였다.

도중에 이이반의 누설로 탄로될 위기에 놓였으나 예정대로 거사를 단행하였다. 이서는 장단에서, 이중로는 이천에서 군사를 일으켜 홍제원에서 김류의 군대와 합류하였다. 이 군대를 능양군이 친히 거느리고 이괄을 대장으로 하여 12일 밤에 창의문으로 진군하여 훈련대장 이흥립의 내응으로 반정군은 무난히 궁궐을 점령하였다. 이어 왕대비(인목대비)의 윤허를 얻어 능양군(인조)이 왕위에 올랐다.

광해군은 의관 안국신의 집에 피신하였다가 잡혀 서인이 되었으며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대북파 이이첨 · 정인홍 · 이위경 등 수십 명은 참수되었으며, 추종자 200여 명은 유배되었다. 반정에 공을 세운 이귀·김류 등 33명은 3등으로 나누어 '정사공신' 호를 받고 권좌의 요직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이 논공행상이 공평하지 못하다 해서 1년 후에 이괄의 난이 일어났다. 반정 후 남인의 이원익이 영의정에 영입됨으로써 남인도 제2의 당세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괄의 난(1624년)

1624년(인조 2) 평안병사 이괄이 인조반정의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일으킨 반란. 그러나 실제는 파당 싸움에 이괄이 궁지로 몰리자 일으킨 난이다.

이괄은 인조반정에 공이 많았는데도 논공행상에는 반정계획에 늦게 참가하였다 하여 2등공신이 되고 한성부윤에 임명되었다. 그러던 중 후금의 관서 지방 침입에 대비하면서 이괄을 부원수 겸 평안병사에 임명하여 도원수 장만 휘하에 소속시켰다. 그러던 중 조정에서 파당 싸움이 벌어지면서 반대파가 무장으로 능력이 출중한 이괄을 제거하기 위해 점점 조여오자 이를 참지 못한 이괄은 반란을 일으켜 개천을 점령하고 평양을 우회하여 한양으로 진격하였다.

조정에서는 이때 영의정 이원익을 도체찰사로 삼아 반란군을 토벌하게 하였으나 이괄의 부대는 중앙에서 보낸 군대를 격파하고 한성까지 점령하였다. 이에 인조는 공주까지 피난을 떠나야 했고 이괄은 선조의 열번째 아들 흥안군을 왕으로 추대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정부군의 패잔병을 수습한 장만은 그날 밤 바로 한성 근교의 안령에서 이괄의 부대를 크게 파하였다. 이에 패잔병을 이끌고 광화문을 빠져나온 이괄은 경기도 이천으로 달아났으나 자신의 부하 기익헌·이수백 등에 의해 죽음을 당하였다. 그리고 기익헌·이수백이 관군에 투항하면서 반란은 평정되었다.



 

심기원의 옥(1644년)

1644년(인조 22) 남한산성 수어사로 있던 심기원이 회은군 덕인을 왕으로 추대하려다가 복주된 사건. 심기원은 유생의 신분으로 인조반정에 참여하여 1등공신에 녹훈되었고 청원부원군에 봉해진 인물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을 지내기도 하였다.

그런데 그가 1644년(인조 22) 좌의정으로 남한산성 수어사를 겸하였을 때 회은군을 추대하여 반란을 꾸몄다는 고발을 받아 여러 공모자가 죽임을 당한 것이다. 그 모의의 사실 여부는 확실하지 않지만, 그 사건의 전모는 심기원이 자신의 심복 장사들을 호위대에 두고 이일원·권억 등과 함께 회은군을 추대하기 위해 모반을 꾀한 것으로 밝혀져 있다.

이 사건은 심기원의 부하였던 황헌·이원로 등이 훈련대장 구인후에게 밀고함으로써 드러났는데, 그 결과 심기원 일당과 회은군은 죽임을 당하였다. 이때 중국에 잡혀가 있던 임경업도 이 모반에 연루되었다고 해서 소환되어 고문을 받다가 죽었다. 그리고 병자호란 뒤에는 심기원·최명길이 협력하여 김자점 중심의 세력과 대립하고 있는데, 이 사건을 계기로 인조대의 정국은 김자점에 의해 권력이 독점되었다.



 

 

김자점의 역모사건(1651년)


1651년(효종 2) 김자점의 반역행위로 야기된 옥사. 봉림대군은 효종 임금에 즉위하여 병자호란으로 당한 국치를 설욕하고자 김상헌 등의 신하들과 협의하여 청나라를 정벌할 계획을 세웠다. 본래 친청파였던 김자점은 영의정에서 파직된 뒤 기회를 노리고 있던 차 그 소식을 듣고 청나라 관계 요인에게 밀고하는 한편, 송시열이 지은 장릉의 지문을 청나라에 보냈다. 이 지문에서는 청나라의 연호를 쓰지 않고 명나라 연호를 썼으므로, 청나라는 대군을 국경에 배치하고 그 진부를 힐문하였다. 조정에서는 영의정 이경석의 노력에 힘입어 이를 수습하여야 하였다.

그런데 1651년(효종 2) 12월에 진사 신호 등이 상소하여 김자점의 역모를 고하였다. 이에 효종은 인정문에서 김자점의 아들 익 등을 심문하였고, 익은 공모한 무장들을 모두 실토하였다. 이 과정에서 인조의 후궁이자 효명옹주의 어머니인 조귀인이 자신의 며느리인 숭선군의 아내 신씨를 저주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리하여 효종은 조귀인을 사사하는 한편, 김자점 및 그의 손자이며 조귀인의 사위인 김세룡을 국문하여 이들을 처형하였다. 이로써 김자점의 일파는 완전히 숙청되었다.


 

 

 

이인좌의 난(1728년)

1728년(영조 4) 3월 이인좌를 비롯한 소론과 남인이 영조의 집권에 반발하여 일으킨 반란으로서 무신년에 일어났다고 하여 '무신란'이라고도 한다. 소론은 경종 연간에 왕위 계승을 둘러싼 노론과의 대립에서 일단 승리하였으나, 노론이 지지한 영조가 즉위하자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이에 박필현 등 소론의 과격파들은 영조가 숙종의 아들이 아니며 숙빈 최씨가 사통하여 낳은 아들이라 하였고 또 경종의 갑작스런 죽음에 관계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영조와 노론을 제거하고 밀풍군 탄을 왕으로 추대하고자 하였다. 여기에는 남인들도 일부 가담하였다.

이들의 거병에는 유민의 증가, 도적의 치성, 기층 민중의 저항적 분위기가 중요한 바탕이 되었다. 그리하여 반군은 지방의 사족과 토호가 지도하고 중간계층이 호응하며, 일반 군사는 점령지의 관군을 동원하거나 임금을 주어 동원하는 형태로 구성되었다. 이인좌는 1728년(영조 4) 3월 15일 청주성을 함락하고 경종의 원수를 갚는다는 점을 널리 선전하면서 서울로 북상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24일에 안성과 죽산에서 관군에게 격파되었고, 청주성에 남은 세력도 상당성에서 박민웅, 김중만 등의 창의군에 의해 무너졌다.

한편 영남에서는 정희량이 거병하여 안음·거창·합천·함양을 점령하였으나 경상도관찰사가 지휘하는 관군에게 토벌 당했다. 그리고 호남에서도 거병 전에 박필현 등의 가담자들이 체포되어 처형당하였다. 난의 진압에는 병조판서 오명항 등 소론 인물들이 적극 참여하였으나, 이후 노론의 권력장악이 가속화하였고 소론은 재기불능의 상태가 되었다. 이 사건 이후 정부에서는 영.호남 지방세력을 억누르는 정책을 강화하였고 토착세력에 대한 수령들의 권한이 커져갔다.



 

 

나주괘서사건(1755년)

1755년(영조 31) 1월 22일, 나주목의 객사인 망화루 기둥에 괘서가 나붙었다.“간신이 조정에 가득하여 백성이 도탄에 빠졌있다. 백성이 곤궁한데 가렴주구는 더욱 심하다. 이를 구제하기 위해 군사를 움직이려 하니, 백성은 놀라 동요하지 말라.” 이 괘서의 내용은 곧바로 전라감사 조운규에게로 보고되었다. 그리고 조운규는 2월 4일 이를 조정에 보고하면서, 그 주동자를 나주에 유배되어 있던 전 지평 윤지라고 하였다.

윤지는 숙종 때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임인무옥을 일으킨 김일경의 옥사에 연좌되어 1724년(영조 즉위년)에 나주로 귀양갔다. 그리고 그는 유배지인 나주에서 그의 아들 윤광철을 통해 필묵계를 조직하였다. 이 필묵계는 표면적으로는 상부상조를 위한 모임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일종의 비밀결사였다. 윤지는 계를 통해 동조자를 규합하여 거사를 계획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나주목사 이하징 등과 모의하여 동지규합에 나섰다. 그리고 마침내 나주객사에 괘서를 붙였던 것이다.

이 사건을 접한 조정에서는 사태를 심각하게 생각하였다. 괘서의 내용이 정국을 비판한 것이기도 했지만, 윤지가 김일경의 당인으로 지목되어 유배된 소론이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윤지가 소유한 문서 중에 소론 인사들과 주고받은 수상쩍은 서찰들이 다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조정에서는 보고를 받은지 7일만에 윤지를 체포하여 서울로 압송하였다. 그리고 영조가 직접 심문하였다. 영조는 이 사건을 계기로 이종성.박문수 등 몇 사람을 제외하고, 박사집 · 박찬신 등 소론 준론의 명문 가문과 유수원 · 신치운 등 우수한 학자들을 대거 처형하였다. 이로써 준론·완론 할 것없이 소론의 명문가들이 대부분 몰락하고 말았다. 영조가 이 사건을 이용하여 또다시 정계개편을 단행한 것이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영조는 3월 5일 태묘에 고유제를 지내고 친히 명정전에서 소론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히는 교서를 반포하였다. 즉, 경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이후에 발생한 일련의 사건들이 모두 소론에 근원하고 있으며, 자신이 이들을 엄히 다스리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로써 영조는 즉위 이후 계속된 노론과 소론의 충역시비를 정리하였고, 노론은 완전히 정권을 독점하는 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영조는 『천의소감』을 편찬하여 자신의 세제책봉과 즉위에 대한 정당성을 천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