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어떤사회 였을까(1)??

14.정조 암살미수사건(1777년)

구름위 2023. 4. 10.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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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암살미수사건(1777년)


즉위하기 전에 정순왕후와 숙의 문씨 등의 왕실세력과 홍인한.정후겸 등의 척신 세력으로부터 여러 차례 곤란을 겪었던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이들에 대한 정치적 탄압을 감행하였다. 홍인한과 정후겸을 귀양보내고, 문숙의의 착호를 삭탈하고 사저로 쫓아냈다. 그리고 문숙의의 동생 문성국과 그의 어미를 노비로 만들었다. 대비인 정순왕후를 직접 공격하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동생 김구주 일파를 숙청하였다. 뿐만 아니라 척신들과 결탁하여 부당하게 정치에 끼어든 환관들도 대대적으로 개편하였다.

정조의 이러한 조치는 그와 반대편에 있었던 여러 사람들을 긴장하게 하였다.  사도세자를 죽이는데 가담하고 세손으로 있던 정조를 핍박했던 이들은 특히 그러하였다. 이들로서는 무엇인가 특단의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리고 궁지에 몰린 이들은 결국 정조를 암살하려는 계획까지 모색하였다. 정조 초년에 있었던 모역사건이 그것이다.

그 모역사건은 홍인한과 함께 노론 벽파의 대표격이었던 홍계희 집안에서 도모하였다. 홍계희는 나경언으로 하여금 사도세자의 행적을 영조에게 과장되게 고하도록 하여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아갔던 인물이었다. 따라서 그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정조가 즉위하기 전인 1771년(영조 47)에 이미 죽었지만, 그 가문은 사도세자의 아들인 세손이 즉위한 것을 누구보다도 불안하게 여겼다. 그리하여 홍계희의 손자인 홍상범은 궁중에 암살단을 난입시켜 정조를 살해할 것을 모색하였다.

정조를 암살할 방안을 모색하던 홍상범은 천민 출신의 장사인 전흥문을 포섭하였다. 홍상범은 가난한데다 장가도 못간 전흥문에게 먼저 재물을 주면서 혼인까지 시켜주었다. 이로써 홍상범은 전흥문을 자신의 휘하에 끌어들일 수 있었다. 그리고 홍상범은 다시 궁성을 경호하는 호위군관 강용휘를 포섭함으로써 뜻을 같이하는 20여 명의 무사까지 끌어들일 수 있었다. 그리하여 홍상범은 전흥문과 강용휘에게 각각 칼과 철편을 들고 궁궐에 난입하게 하고 자신은 나머지 20여 명을 거느리고 뒤를 따라 정조를 살해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여기에는 강용휘의 조카인 별감 강계창과 궁중 나인인 월혜가 궁중 길의 안내자로 포섭되어 있기도 하였다.
1777년(정조 즉위) 7월 28일, 홍상범은 마침내 거사일을 정하였다. 정조가 즉위하자마자 홍지해를 귀양보내는 등 자신의 집안에 압박을 가해오는 상황에서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전흥문은 미리 모의한 대로 칼을 들고 강용휘는 철편을 들고 궁궐에 잠입하였다. 홍상범도 20여 명의 행동대원을 이끌고 뒤를 따랐다. 이들은 강계창과 월혜의 길안내로 정조가 머물고 있는 경희궁 존현각까지 별 어려움 없이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강용휘와 전용문은 민첩하게 존현각 지붕위로 올라갔다. 정조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순간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곧바로 정조의 호위무사에 의해 발각되고 말았고 정조에 대한 이들의 암살 기도는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리고 이 사건에 대한 국문이 있었다. 그 결과, 이 사건은 홍상범·홍대섭 등이 주도하였음이 드러났다. 또 홍상범의 노비인 최세복이 유배된 홍술해 등과 긴밀히 연락하면서 이 사건을 꾸민 것이 밝혀졌다. 정조는 평양감사를 지낸 홍상범의 아버지 홍술해·홍지해 형제, 그리고 그 홍상범의 사촌이었던 승지 홍상간 등까지 유배를 보내면서 이 사건을 처리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끝은 아니었다. 궁궐난입 사건에 대한 조사가 벌어지고 있을 때 또다른 사건이 발생하였다 유배당한 홍술해의 처 효임이 영험하다고 소문난 무당 점방을 끌어들여 정조와 홍국영을 저주했던 것이 발각된 것이었다. 효임의 의뢰를 받은 무당 점방은 다섯 군데의 우물물을 담은 다음 홍술해 집의 우물과 홍국영 집의 우물에서 길어온 물을 합쳐 한 그릇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 물을 귀양간 홍술해 집의 우물에 부음으로써 정조를 보호하고 있는 홍국영의 기를 빼앗는다는 것이었다. 또한 붉은 모래로 정조와 홍국영의 형상을 만든 다음, 여기에 화살을 꽂고 땅에 묻었다. 그리고 나서 홍국영의 집에다 저주하는 부적을 만들었다. 그렇지만 미신에 의존했던 이러한 저주사건은 곧바로 발각되었고, 관련자들은 다시 검거되고 말았다.

그러나 정조에 대한 홍계희 가문의 모반사건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홍계희의 팔촌에 해당하는 진선 홍계능이 홍상범의 사촌인 홍상길과 모의하여 정조를 암살하고 사도세자와 경빈 박씨 사이에 태어난 은전군 찬을 국왕으로 추대하려고 했던 사실이 다시 발각되었던 것이다.


여기에는 홍계능의 아들인 홍신해, 조카인 홍이해, 홍경해의 아들인 홍상격 등과 홍계능의 제자인 전 승지 이택축, 전 참판 민홍섭 등이 가담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혜경궁 홍씨의 친동생이자 정조의 외삼촌인 전 승지 홍낙임까지 연루되어 있었다. 이처럼 계속되는 외척세력의 역모 사건에 정조는 단호하게 대처하였다. 그리하여 은전군을 자진시키고 주동자 23명을 사형시켰다.

이처럼 즉위 초에 있었던 3대 모반사건은 정조의 신변에 대한 심각한 문제를 제기하였다. 전 · 현직 벼슬아치뿐만 아니라 환관과 궁녀, 그리고 임금을 보호해야 할 호위군관까지 여기에 연루되었기 때문이다. 정조는 이에 홍국영으로 하여금 숙위소를 설치하여 자신의 신변을 보호하게 하였다. 이를 계기로 홍국영은 숙위소에서 모든 정사를 결제하면서 정조의 반대세력에 대한 숙청작업을 단행하게 되었다.

 

 

홍경래의 난(1811년)

홍경래의 난이 일어난 평안도지역은 국경과 인접해 있어 조선 초기에는 반란의 위협 때문에 조선 중기부터는 성리학적 기준에 의해‘학문도 예의도 모르는 지역’으로 인식되어 정치적으로 차별대우를 받았고 평안도 출신은 개인의 능력에 관계없이 관직에 진출할 수 없었다. 또한 이 지방은 삼남 지방과는 달리 사족세력의 형성이 미약하여 향촌의 지배질서도 비교적 느슨했기 때문에 신분적 제약도 비교적 약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791년(정조 15)에 신해통공이 실시되면서 상업의 자유화가 어느 정도 인정되었고 청과의 국경지역에 위치한 평안도는 국제 교역과 국내 상업분야에서 성장을 거듭하여 18세기에는 전국에서 상업이 가장 번성한 지역으로 부상하였다. 또한 금은 등의 수요증가로 평안도 지역에 광산이 개발되고 1801년(순조 1)에는 6만여 명의 공노비가 해방되어 이들이 일감을 찾아 평안도 지역으로 몰려들었다. 이러한 특성과 시대적 상황 때문에 평안도 지역은 궁극적으로는 반봉건 근대화를 지향한 선진지역으로 발전하였고, 강한 반정부적 성향을 보이고 있었다. 홍경래의 난은 바로 이런 상황 속에서 일어난 것이었다..

난의 주동자 홍경래는 평안도 용강군 화장골에서 평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중화에 사는 외삼촌에게서 글을 배운 후 스스로 공부하여 평안도 지방에서 실시한 향시에 합격하였으나 건국 초기부터 이어져 온 서북인 등용 배제 정책 때문에 과거에 합격해도 관직을 받을 수 없었다. 여기에 당시 세도정치로 인한 가혹한 세금징수 때문에 평안도 지역은 민심이 흉흉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이미 말한 이유로 신흥 부자들이 속속 나타났고, 정부의 평안도 지역 차별에 반발한 홍경래는 평안도와 황해도의 신흥 부자들을 포섭하여 당을 만들고 가산 다복동에 거점을 마련하여 수년 간 무기를 만드는 등 봉기 10년 전부터 치밀하게 준비하고 있었다.


홍경래는 당초 1812년(순조 12)에 거사할 계획이었으나 정보가 새나가 거사를 앞당겨 1811년 12월에 봉기하여 관서 일대를 무난히 점령했다. 이때 봉기하면서 이들은 정부에 전면전을 선포하였다.

홍경래군의 지휘부는 평서대원수 홍경래, 부원수 김사용, 부모주 김창시, 선봉장 이제초·홍총각 후군장 윤후겸, 군수총관 이희저로 구성되어 있었다. 홍경래는 풍수장이로 부호의 집에 출입하던 우군칙을 가산 청룡사에서 만나 시국을 논의하다가 서로 공감하고 봉기하기로 약속하였다. 또한 홍경래는 시국에 불만이 있는 자들과 부의 축적을 통해 새로운 지배층으로 성장한 부류 및 황해도·평안도 일대의 상인들에게 접근하였으며, 벼슬길이 막힌 현실에 불만을 품고 있던 양반 지식층에게도 접근하여 진사 김창시 등을 포섭하였다. 그리고 거부 이희저를 회유하고 홍총각과 이재석등을 뽑아 선봉장으로 삼았으며, 지략과 무용을 겸한 김사용과 함께 가산 다복동을 중심으로 봉기준비를 했다.

홍경래와 만나서 봉기를 약속한 우군칙은 평안도 태천 출신으로 홍경래의 모사역할을 한 사람이다. 그는 풍수에 밝아 가산 동북면에 살면서 묘터를 봐주고 점을 치는 것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홍경래와 만난 후 풍수와 점복을 이용하여 가산의 거부인 이희저를 끌어들여 군비의 조달을 맞게 했고, 인삼밀매 금지법에 불만을 품은 개성·의주 등지의 거상과 부호들을 회유하여 세력을 확대했다. 또한 당시에 광산 채굴이 성행하여 부랑자들이 광산으로 몰리는 것을 이용하여 운산 촛대봉에 광산을 열고 임금 노동자들을 모아 병사로 훈련시켰다.

김사용은 평안도 태천 출신으로 우군칙의 제자였는데, 부원수에 임명되어 북진군을 인솔하여 남쪽으로 진군하여 홍총각이 이끄는 남진군과 합세하였다. 그후 요충지인 안주를 공격하기 위해 박천 송립리에서 관군과 싸우다가 유탄을 맞고 사망하였다. 김창시는 평안도 곽산 출신으로 진사에 급제한 지식인이었다. 때문에 그는 자신들이 봉기한 이유와 목적을 담은 격문을 작성하였고, 운산 촛대봉의 금광과 연락을 담당하였다.

이희저는 가산의 역노로 무과에도 급제한 경력이 있었다. 그는 대청무역으로 부를 축적한 평안도 내의 부호였는데, 대정강변 다복동 골짜기에 거점을 마련하고 각지의 거부들과 연계를 맺고, 한편으로는 운산 촛대봉 아래에 광산을 경영하여 노동자들에게 임금을 주고 고용하여 낮에는 광산일에 종사시키고 밤에는 군사훈련을 시켰다. 홍총각은 본래 어염등을 팔던 소상인으로 본명은 홍봉의였는데 나이가 들도록 장가를 가지 못하여 홍총각으로 불리웠다. 그는 곽산 출신으로 체구가 우람하고 키가 5척이 넘어 홍경래가 이끄는 남진군의 선봉장으로 활동하였다.

홍경래 군은 이러한 지휘부의 통솔 하에 남진군과 북진군으로 나뉘어 군사를 일으킨지 10여일 만에 곽산 등 7개 지역을 석권하였는데, 이는 각 고을의 내응세력의 도움으로 가능했다. 당시 관군은 제대로 대응치 못하고 계속 후퇴하였는데 이는 박천 송림 전투까지 계속되었다.

홍경래는 가산을 함락하고 청천강에 얼음이 어는 시기를 이용하여 서울로 진격코자 했는데 마침 큰비가 내려 얼음이 녹는 바람에 배를 준비하지 못한 홍경래군은 전략을 바꾸어 1812년 1월에 정주성을 함락시키고 점거했다. 이들이 정주성을 거점으로 군사를 출정시켜 공격을 계속하자 안동 김씨의 한 사람인 선천부사 김익순이 자진 항복했다. 홍경래군은 이어서 박천의 송림에 군사를 주둔시켰으나 함종부사 윤욱렬과 곽산군수 이우식 등의 공격에 버티지 못하고 정주성으로 퇴각하였다. 

 

홍경래군은 숫적으로 우위인 관군을 맞아 4개월간 공방전을 벌였으나 조정에서 양서순무사 이요원과 순무중군 박기풍을 보내자 사기가 줄기 시작했고 이 틈을 탄 김익순이 김창시의 목을 베어 성에서 도망쳐 나왔다. 그러나 박기풍이 여러 번 정주성을 공략했음에도 소득을 올리지 못하자 박기풍이 파직되고 병사 유효원이 파견되었다. 유효원이 4월에 화약으로 성벽을 폭파시키고 정주성을 공격하자 성을 지키던 봉기군은 놀라 사방으로 달아났고 홍경래는 관군과 싸우다가 유탄에 맞고 죽었다. 이에 그의 목을 베어 상자에 담아 서울로 보내고 우군칙 등도 사로잡아 서울로 압송하여 홍경래의 반란은 평정되었다.

비록 봉기군은 평정되었으나 당시 정부는 순조가 중풍을 앓고 있어서 국정을 운영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하여 순조의 장인 김조순과 훈련대장 박종경에게 정사를 논의케 하였는데 안동 김씨의 사주와 후원을 받은 조득영이 박종경이 군권과 경제권을 쥐고 왕권을 흔든다고 상소를 올렸다. 이에 박종경이 병부를 반납하고 서울을 떠났고 순조가 불러도 오지 않아 양주목사로 좌천되었다. 박종경의 실세로 인해 반남 박씨 세력이 정계에서 물러나고 김조순을 중심으로 하는 안동 김씨가 확실히 정권을 잡게 되었다.

홍경래의 난은 정부에 의해 진압되었지만 농민층의 분해과정에서 생긴 향촌 부호, 경영형 부농, 서민 지주, 사상인, 몰락 양반 및 지식인 등이 임금노동자와 빈농을 규합하여 일으킨 반봉건 농민항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