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징옥의 난(1453년)
이징옥(?∼1453)의 본관은 양산으로, 중추원지사 전생의 아들이다. 어렸을 때 호랑이를 산 채로 잡았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용감하였다. 세종 초에는 김종서를 따라 북변에 종군하여 1424년에는 경원진 첨절제사가 되어 여진족의 침입을 격퇴하였다. 1436년 회령부판사로서 여진족의 추장을 살해하였으며, 이 해 경흥도호부판사에 올랐다.
1449년 중추원지사로 승진하였으며, 1450년 세종 때 북방 6진 개척에 크게 공헌했다 하여 김종서의 후임으로 함길도 도절제사가 되었다. 그런데 1453년 정권을 획득한 세조가 이징옥이 김종서계의 인물임을 꺼려서 이징옥을 파직하고 그 후임에 박호문을 임명, 함길도에 보냈다. 이징옥은 박호문에게 자리를 인계하고 호위병력 약간을 거느리고 서울로 가는 길에 계유정난에 관한 소식을 듣고는 되돌아가, 후임자 박호문을 죽이고 군사를 일으켜 스스로를 '대금황제'라고 불렀다.
한편 여진의 후원을 약속받고 두만강 건너편의 오국성에 도읍을 정하기로 결정, 두만강을 건너려고 종성에 머물 때 종성판관 정종, 호군 이행검 등의 습격을 받고 아들 3명과 함께 살해되었다.
계유정난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이징옥의 난은 조선 조정에 대한 최초의 반란이었다. 이 사건 이후에 함경도 지역에 대한 차별대우가 더욱 심화되었으며 이러한 상황은 이시애의 반란(1467년, 세조 13년)이 일어나는 하나의 주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시애의 난(1467년)
1467년(세조 13년) 함경도의 호족 이시애가 일으킨 반란을 가리킨다. 세조는 즉위하면서 중앙집권의 강화를 위해 북도 출신 수령의 임명을 제한하고 경관으로 대체하였으며 수령들에게 지방유지들의 자치기구인 유향소의 감독을 강화하게 하여 출신인 수령들과 유향소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회령부사를 지내다가 상을 당하여 관직을 사퇴한 이시애는 유향소의 불만·불평과 백성의 지역감정에 편승해서 아우 시합, 매부 이명효와 반역을 음모하고 1467년(세조 13년) 5월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함길도의 절도사가 진장들과 함께 반역을 음모하고 있다.'고 선동하여 절도사 강효문, 길주목사 설징신 등을 죽였으며, '방금 남도의 군대가 바다와 육지로 쳐올라와서 함길도 군민을 다 죽이려 한다.'고 선동하자 흥분한 함길도의 군인과 민간인들이 유향소를 중심으로 일어나 타도 출신 수령들을 살해하는 등 함길도는 대혼란에 휩싸이게 되었다.
또한 그는 중앙에서도 '병마절도사 강효문 등이 서울의 한명회·신숙주 등과 결탁하여 함길도 군대를 이끌고 서울로 올라가서 모반하려 하여 민심이 흉흉하니 함길도 사람을 고을의 수령으로 삼기 바란다.'는 등의 모략전술을 폈다. 세조는 이에 속아 신숙주 등을 투옥하였다가 곧 구성군 준을 병마도총사로 삼아 토벌군을 출동시켰다.
이시애는 여진족까지 끌어들여 대항하였으나 허종·강순·어유소·남이 등이 이끄는 3만 군대는 홍원·북청을 돌파하고 이원의 만령에서 반란군 주력부대를 분쇄하였다. 이시애는 길주를 거쳐 경성으로 퇴각하여 여진으로 도망치려 하였다. 이 당시 사옹별좌의 벼슬에 있던 이시애의 처조카 허유례는 자기 부친이 억지로 이시애의 일파에게 끌려갔다는 소식을 듣고 이시애의 부하인 이주·황생 등을 설득하여 이들과 함께 이시애 형제를 묶어 토벌군에게 인계하였다.
8월 이시애 등이 토벌군의 진지 앞에서 목이 잘림으로써 3개월에 걸쳐 함경도를 휩쓴 이시애의 난은 평정되었다. 이 난으로 길주는 길성현으로 강등되고 함길도는 남·북 2도로 분리되었으며 유향소도 폐지되었다. 구성군 준과 조석문·어유소·허종·허유례 등 41명은 조선의 제6차 공신인 '정충적개공신'으로 녹훈되었다.
남이의 옥(남이의 역모사건, 1468)
1468년(예종 즉위년) 남이 등이 역모를 꾀하였다 하여 처형한 사건이다. 의산위 휘와 태종의 넷째 딸 정선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남이는 일찍부터 무반의 기질을 나타내어 1457년(세조 3년) 17세로 무과에 급제한 뒤 세조의 신임을 받아 여러 무반직을 역임하였다. 1467년 이시애의 반란을 토벌한 공으로 적개공신의 칭호를 받고 의산군에 봉해졌으며 건주위의 오랑캐를 토벌한 공로로 공조판서를 거쳐, 27세로 병조판서에 임용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예종이 즉위한 뒤 한명회, 신숙주 등은 노골적으로 남이를 견제하기 시작하였는데 강희맹, 한계희 등 훈구대신들의 입을 통해 남이가 병조판서를 수행할 능력이 없다고 비판하자 예종은 그를 병조판서에서 해임하고 겸사복장으로 임명하였다. 이때 남이가 궁궐에서 숙직하던 중 혜성이 나타나자 "혜성이 나타난 것은 묵은 것을 제거하고 새 것을 펼칠 징조이다."라고 말하였는데 병조참지 유자광이 이 말을 듣고 곧바로 남이가 반역을 꾀하였다고 모함하였다.
이 때 남이를 비롯하여 강순·변영수·조경치·문효량 등 약 30명의 관련 인물들이 국문을 받고 처형됐고 그 가족들은 노비로 전락하였다. 이 옥사는 그 진위 여부와는 별개로, 순탄하지 못한 과정을 거쳐 즉위한 세조가 왕권강화를 도모하다가 죽고 어린 왕이 새로 즉위하는 등 유동적인 정국 상황에서 발생한 사건이었다.
한편으로는 한명회, 신숙주 등의 원상세력이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고 등장한 신세력들을 제거하기 위하여 일으킨 사건으로 보기도 한다.
남이에 대한 당대의 평가는 매우 부정적일 수밖에 없었으나, 그 뒤 사림이 세력을 잡고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를 평가하는 과정에서 유자광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면서, 상대적으로 남이의 옥사 역시 유자광이 조작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래서 일부 야사에서는 남이를 젊은 나이에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죽은 영웅적 인물로 묘사하기도 하였다. 그 대표적인 것이 『연려실기술』의 기록이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남이는 순조 때 그의 후손 남공철의 상소에 의해 신원되었으며 방계인 남용익·남유용·남공철 등이 빛을 볼 수 있었다.
중종반정(1506년)
1506년(연산군 12년) 성희안·박원종 등이 연산군을 폐하고 진성대군을 왕으로 추대한 사건이다. 이조참판을 지낸 성희안과 중추부지사 박원종은 재위 12년간 화옥과 황욕 등 폭정으로 국가의 기틀을 흔들어 놓은 연산군을 폐하기로 밀약하고 당시에 인망이 높던 이조판서 유순정, 연산군의 총애를 받고 있던 군자부정 신윤무 등의 호응을 얻어 왕이 장단 석벽에 유람하는 날을 기하여 거사하기로 계획을 꾸몄다.
1506년 9월 1일, 박원종·성희안·신윤무를 비롯해서 전 수원부사 장정, 군기시첨정 박영문, 사복시첨정 홍경주 등이 무사를 규합하여 훈련원에 모았다. 그들은 먼저 권신 임사홍·신수근과 그 아우 신수영 및 임사영 등 연산군의 측근을 죽인 다음 궁궐을 에워싸고 옥에 갇혀 있던 자들을 풀어 종군하게 하였다. 이튿날인 9월 2일 박원종 등은 군사를 몰아 텅 빈 경복궁에 들어가서 대비의 윤허를 받아 연산군을 폐하고, 진성대군을 맞아 왕으로 옹립하니 그가 조선왕조 제11대 왕인 중종이다.
임꺽정의 난(1559년)
일명 거정. 양주의 백정이었으나 정치의 혼란과 관리의 부패로 민심이 흉흉해지자 1559년(명종 14) 불평분자들을 규합, 황해도와 경기도 일대에서 창고를 털어 곡식을 빈민에게 나누어 주고 관아를 습격, 관원을 살해했다. 한때는 개성에 쳐들어가 포도관 이억근을 살해하기도 했다.
백성들의 호응으로 관군의 토벌을 피했으나 1560년 형 가도치와 참모 서림이 체포되어 그 세력이 위축되다가 1562년 토포사 남치근의 대대적인 토벌로 구월산에서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정여립 모반 사건 (1589년)
정여립(1546∼1589)은 본관은 동래, 자는 인백으로 전주 출생이다. 경사와 제자백가에 통달했으나 성격이 포악하고 잔인하였다.
1570년(선조 3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이이·성혼의 문인이 되었다. 1583년 예조좌랑을 거쳐 이듬해 수찬으로 퇴관하였다. 본래 서인이었으나 집권한 동인에 아부, 죽은 스승 이이를 배반하고 박순·성혼 등을 비판하여 왕이 이를 불쾌히 여기자 다시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고향에서 점차 이름이 알려지자 정권을 넘보기 위하여 진안 죽도에 서실을 지어놓고 대동계를 조직, 신분에 제한없이 불평객들을 모아 무술을 단련시켰다. 1587년 전주부윤 남언경의 요청으로, 침입한 왜구를 격퇴한 뒤 대동계의 조직을 전국에 확대, 황해도 안악의 변숭복, 해주의 지함두, 운봉의 승려 의연 등의 기인모사를 거느리고 정감록의 참설을 이용하는 한편 '망이흥정설'을 퍼뜨려 민심을 선동하였다.
1589년 거사를 모의, 반군을 서울에 투입하고 일거에 병권을 잡을 것을 계획하였다. 이때 안악군수 이축이 이 사실을 고변하여 관련자들이 차례로 잡히자 아들 옥남과 함께 죽도로 도망하였다가 관군에 포위되자 자살하였다. 이 사건으로 동인에 대한 대대적인 박해가 시작, '기축옥사'가 일어났으며 이후 전라도를 반역향이라 하여 호남인들의 등용이 제한되었다.
김직재의 옥(1612년)
1612년 광해군 4년 대북파가 영창대군 지지파인 소북파를 몰아내기 위해 꾸민 첫번째 사건은 1612년 일어난 '김직재의 옥'이었다. 이 사건은 황해도 봉산군수 신율이 병역 회피를 위해 어보와 관인을 위조한 김경립을 체포하면서 시작된다. 신율은 그를 체포한 후 유팽석을 고문하여 김경립이 모반을 획책하기 위해 어보와 관인을 위조했다는 내용의 자백을 받아내고 다시 김경립을 문책하여 거대한 역모 사건 계획을 자백 받기에 이른다.
김경립이 자백한 내용을 요약하면 8도에 각각 대장, 별장 등을 정하여 불시에 한양을 함락시키고 대북 세력 및 광해군을 축출한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김경립의 아우 김익진의 입을 통해 팔도도대장으로 내정된 사람이 김백함이라는 자백이 나오자 사건은 급속도로 확대되었다.
김백함이 팔도도대장으로 내정되었다는 진술을 받아낸 대북파는 김직재와 김백함 부자는 물론 김직재의 사위 황보 신 및 그 일족을 모두 체포하여 모진 고문을 가한다. 이 고문 과정에서 김백함은 아버지 김직재의 실직에 불만을 품고 모의를 했다는 자백을 강요받았으며 고문을 이기지 못해 결국 모든 내용을 시인하게 된다. 또한 김직재는 자신이 역모의 주동자이며 연흥부원군 이호민, 전 감사 윤안성, 전 좌랑 송상인, 전 군수 정호선, 전정언 정호서 등 일군의 소북파 인사들과 모의하여 특정한 날을 잡아 도성을 무너뜨리려고 했다고 허위자백하기 까지에 이른다.
이 사건은 소북파의 거두이자 선조의 유명을 받든 일곱 신하 중 하나였던 박동량의
반대 상소에도 불구하고 옥사로 이어졌고 그들 역모 세력이 추대하려던 왕이 선조의 아들 순화군의 양자인 진릉군 이태경이라고 함에 따라 그도 처형되었으며, 그들과 관련이 있는 대부분의 인사는 모두 숙청되었다.
이 옥사로 김직재, 김백함 부자가 처형당하 고 김제, 유열 등 1백여 명의 소북파 인사들이 대거 숙청당했다.
칠서의 옥(1613년)
1613년 광해군 5년 문경새재에서 상인을 죽이고 수백 냥을 약탈한 강도 사건이 발생했다.이 때 그 범인 일당은 영의정을 지낸 박순의 서자 박응서, 심전의 서자 심우영, 목사를 지낸 서익의 서자 서양갑, 평난공신 박충갑의 서자 박치의, 박유량의 서자 박치인, 북병사를 지낸 이제신의 서자 이경준, 서얼 허홍인 등 권력가들의 서자 일곱 명이었다. 이들은 허균, 이사호, 김장생의 이복동생 김경손 등과 사귀면서 스스로를 '죽림칠현' 또는 '강변칠우'라고 칭하는 무리였다.
이들은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자 서얼의 차별을 없애달라는 상소를 한 바 있는데 이것이 거부당하자 불만을 품고 1613년 초부터 경기도 여주 남한강변에서 사당을 조직한다. 이들은 윤리가 필요 없는 집이라는 뜻의 '무륜당'을 짓고 그곳을 근거지로 소금장수, 나무꾼 등으로 행세하며 전국에 출몰하여 화적질을 일삼다가 새재에서 상인들을 죽이고 돈을 약탈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이 때 피살된 상인의 노비가 이들의 뒤를 미행하여 근거지를 알아내고 포도청에 고발함으로써 이들은 일망 타진되었다.
하지만 이 '칠서의 옥'은 단순한 강도 사건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이첨 등 대북파의 중심 세력들은 이 사건을 계기로 영창대군을 몰아낼 계획을 세우게 된다. 이이첨과 그의 심복 김개, 김창우 등은 포도대장 한희길, 정항 등과 모의하여 이들 서얼 출신 화적들이 자금을 모아 영창대군을 추대하려 했다는 자백을 얻어낸다. 이러한 자백은 칠서 중에 하나인 박응서가 광해군에게 비밀 상소를 올리는 형태로 이루어진다.
박응서는 이 상소문에서 자신들을 1608년에 명나라 사신을 저격한 바 있으며 이를 통해 사회 혼란을 야기시키고 한편으로는 군자금을 비축하고 무사를 모아 사직을 도모하려 하였고, 성사된 뒤에는 영창대군을 옹립하고 인목대비로 하여금 수렴청정을 이루려 하였다고 했다. 이 상소문의 파장은 대단했다. 박응서의 상소 이후 대북 세력은 서양갑을 국문한 끝에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이 자신들의 우두머리이며 인목대비 또한 영창대군이 장성하면 살아남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모의에 가담하기로 했다는 자백을 얻어내게 된다.
이 사건으로 종성판관 정협을 비롯하여 선조로부터 인목대비와 영창대군의 안위를 부탁받은 신흠, 박동량 등의 일곱 대신 및 이정구, 김상용, 황신 등의 서인 세력 수십 명을 하옥시켰다. 또한 이 사건의 취조 과정에서 김제남과 인목대비가 광해군을 양자로 삼았던 의인왕후의 능에 무당을 보내어 저주했던 일이 발각되기도 했다. 그래서 김제남은 사사되고 그의 세 아들도 화를 당하였으며 영창대군은 강화도에 위리 안치되었다가 이듬해 강화부사 강항에게 살해되었다. 이 사건으로 영의정 이덕형, 좌의정 이항복을 비롯한 서인, 남인 세력이 완전히 제거되고 대북파가 정권을 독점하게 되었다. 계축년에 일어난 이 사건이라 하여 '계축옥사'로 지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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