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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 치즈에 첨가물 넣어 대량생산 인류, 새로운 입맛 다시다

구름위 2017. 1. 14. 2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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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 치즈에 첨가물 넣어 대량생산 인류, 새로운 입맛 다시다

슬라이스 치즈


英·美, 2차 대전 때 치즈 생산 제한령  

장기 보관 가능하게 가공 군수용 활용

 


 

 약방에 감초는 빠져도 되지만 햄버거 먹을 때, 군대리아 만들 때 치즈가 빠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햄버거에 들어가는 치즈는 대부분 슬라이스(slice) 치즈다. 덩어리가 아니고 얇게 자른 것이다. 치즈만 따로 구매할 경우에도 제품 포장지를 보면 보통 슬라이스 치즈, 혹은 체더(cheddar) 슬라이스라고 적혀 있다.

 체더는 원산지를 표시하는 말이니 그렇다고 치고, 한눈에 봐도 얇게 자른 치즈라는 것을 알 수 있음에도 ‘슬라이스’라고 표기했으니 무척이나 친절하다 싶지만 이렇게 적는 데는 사정이 있다.

 슬라이스 치즈는 가공 치즈이기 때문에 법적으로 치즈라고만 쓰면 안 되는 것이다. 자연 치즈는 원유에 유산균이나 우유 단백질 응고 효소, 유기산을 첨가해 만든다. 반면 슬라이스 치즈 같은 가공 치즈는 유장(乳漿)과 유화제, 소금, 방부제, 색소 등 다양한 첨가제를 넣어 제조한다. 그래서 겉 포장지에 치즈라고 표시할 수 없어서 슬라이스 치즈, 혹은 체더 슬라이스라고 표기한 것이다. 뒷면 성분 표시를 자세히 보면 자연산이 아닌 가공 치즈라는 사실을 명기해 놓았다.

 군대리아 제조에 필수품인 이런 슬라이스 치즈는 실은 전쟁의 결과물이다. 물론 전쟁 때문에 처음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가공 치즈는 1911년 최초로 개발됐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가공 치즈인 슬라이스 치즈가 널리 보급됐다. 이유는 자연 치즈를 못 만들게 했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은 치즈 수난 시대였다. 전쟁 여파로 영국이 먼저 치즈 생산에 제동을 걸었다. 영국에도 지역별로 다양한 치즈가 있었지만, 전쟁 시작과 함께 전시경제체제로 전환되면서 배급 제도가 실시되고 치즈 생산 금지령이 내려졌다. 체더 치즈 한 종류만 생산이 허용됐다.

 체더 치즈는 자연 치즈다. 영국 남부 서머싯(somerset)의 체더 마을에서 생산하는 전통 치즈로 12세기 때부터 만들었다고 하니 유서가 깊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에서 생산한 것은 정통 체더 치즈가 아니었다. 원유에 갖가지 첨가물을 혼합해 만든 가공 치즈였다.

 이렇게 자연 치즈가 아닌 가공 치즈를 만든 이유는 치즈나 버터를 만들고 남는 부산물인 유장을 이용할 수 있어 자연치즈보다 생산량이 많고, 방부제·색소 등 갖가지 첨가물이 들어가 장기 보관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가공 치즈는 장거리 운송을 해도 상하지 않는다. 전시 군수물자로서는 자연 치즈보다 월등하게 효용성이 높다.

 영국 정부는 이렇게 만든 치즈를 건빵인 비스킷을 비롯한 건조식품과 함께 상자에 넣어 아프리카 전선으로, 유럽 전선으로 보냈다. 그리고 민간인에게도 일주일에 어른 한 사람당 50g씩을 배급했다. 코끼리 비스킷 수준의 분량이다. 사람들은 이 치즈를 정부가 배급하는 치즈라는 뜻에서 관제 치즈 혹은 관제 체더(government cheddar)라고 불렀다.

 미국도 마찬가지였다. 일본의 진주만 공습 이후 제2차 세계대전에 본격적으로 뛰어들면서 미국 역시 1942년 5월 4일을 기점으로 ‘아메리칸 치즈’ 이외에는 어떤 종류의 치즈도 생산하거나 소비하지 말라는 치즈 생산 및 소비 금지 조치를 실시했다.

 아메리칸 치즈 역시 자연 치즈가 아닌, 공장에서 만드는 가공 치즈로 영국의 체더 치즈에 뿌리를 두고 있다. 19세기까지만 해도 미국에 온 영국 이민자들이 치즈를 만들었던 만큼 미국 치즈 역시 영국 치즈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이 치즈에 각종 첨가제를 추가해 공장에서 대량 생산한 것이 아메리칸 치즈다.

 미국이 치즈 생산을 아메리칸 치즈로 제한한 것 역시 전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가공 치즈는 생산 비용이 낮고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어서 전쟁 물자로 적합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동안 유럽에서 수입하던 치즈의 공급이 중단된 것을 계기로 국산 치즈를 먹도록 함으로써 시민들의 애국심을 고취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때와 그 이후 햄버거의 유행을 계기로 슬라이스 치즈가 주류를 이루게 됐다. 현재 시중에서 판매되는 슬라이스 치즈 중 상당수가 체더 슬라이스라고 표기하는 것은 영국의 관제 치즈나 미국의 아메리칸 치즈가 모두 체더 치즈를 바탕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은 치즈를 먹는 사람들의 입맛과 치즈 산업 판도를 바꿔 놓았다. 자연산 치즈 대신 값싼 가공 치즈가 유행하면서, 그리고 햄버거와 같은 미국 대중문화가 세계적으로 퍼지면서 슬라이스 치즈가 유행했다.

 영국은 한때 치즈 생산 농가가 몰락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1954년까지 배급 제도를 지속했기에 다양한 치즈 생산의 맥이 끊겼다. 전쟁 전에는 3500개의 치즈 생산 업소가 여러 종류의 치즈를 만들었지만, 종전 후에는 단 100개만 되살아났다. 반면 미국은 가공 치즈의 새로운 시대를 열면서 세계 슬라이스 치즈 시장을 주도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