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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어, 값비싼 보양식? 런던서는 빈민층 음식?

구름위 2017. 1. 14.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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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어, 값비싼 보양식? 런던서는 빈민층 음식?

장어 파이


오염된 템스 강에 서식

2차대전 음식 부족하자

값싸고 영양이 풍부한

장어로 단백질 보충해

 

기사사진과 설명
런던의 토속음식 장어 파이.

런던의 토속음식 장어 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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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주민들은 2차 대전 당시 서민음식이었던 장어로 부족한 단백질을 보충했다. 2차 대전 당시 런던 시내의 장어 파이·푸딩 가판대. 필자 제공

런던 주민들은 2차 대전 당시 서민음식이었던 장어로 부족한 단백질을 보충했다. 2차 대전 당시 런던 시내의 장어 파이·푸딩 가판대. 필자 제공


 

 

 

   대도시를 걷다 보면 한 집 건너 하나꼴로 커피 전문점이 들어서 있다. 한국인들이 그만큼 커피를 많이 마신다는 소리다. 그런데 우리나라 커피 전문점처럼 건물마다 하나씩 장어요리 전문 음식점이 있었던 도시가 있다. 사람들이 장어를 이처럼 엄청나게 먹어댔던 도시는 과연 어디일까?

 

 

   보양식으로 장어구이·장어탕을 즐겨 먹는 우리지만 특정한 장어 골목을 제외하면 장어요리 전문점이 그렇게 많지는 않다. 사실 장어가 그 정도로 저렴한 생선도 아니다. 일본도 우리나라 못지않게 장어를 좋아한다. 우리가 복날 보양식으로 삼계탕을 먹는 것처럼 일본인들은 장어구이와 장어덮밥을 먹는다. 복날 장어를 먹어야 여름에 더위를 타지 않는다는 속설이 있을 정도로 장어를 좋아한다. 하지만 도쿄 역시 한 집 건너 하나씩 장어 전문점이 보일 정도는 아니다.

 정답은 영국의 수도인 런던이다. 런던에 가봤는데 장어 파는 집은 구경도 못했다는 반박이 있을 수 있다. 물론이다. 지금은 일부러 물어서 찾아가지 않는 한 런던에서 장어 요리 전문점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곳곳에 장어 파는 집 천지’라는 것은 지금이 아니라 1945년 이전 풍경이다. 다시 말해 제2차 세계대전 때의 모습이고 런던 전체가 아니라 이스트 런던, 그러니까 런던 동쪽 거리 모습이다.

 한국인이나 일본인, 심지어 동양 사람도 아닌 런던 주민들이 장어를 즐겨 먹었다는 사실이 일단 의외다. 하지만 논두렁에서 잡은 미꾸라지로 끓인 추어탕이 예부터 유명한 서울의 전통 음식인 것처럼 장어는 런던 토박이들이 즐겨 먹는 생선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런던 시내에 왜 그렇게 장어요리 전문점이 많이 생겼던 것일까? 전쟁 와중에도 몸보신은 해야겠다는 사람이 늘어났기 때문은 아니다. 런던 시민이 장어를 많이 먹게 된 데는 이유가 있다.

 우리한테 장어는 보양식이다. 그렇다고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은 서민들이 마음껏 먹을 수 있을 만큼 값싼 보양식은 아니다. 장어가 흔했던 예전에도 저렴한 물고기는 아니었다. 지금은 전북 고창 장어가 유명하지만, 옛날에는 임진강 장어를 최고로 여겼다. 임진강 하류 역시 썰물과 밀물의 차이가 큰 풍천 지역이어서 힘센 장어가 많이 잡혔다. 1931년의 신문 기사를 보면 임진강 장어는 풍미와 진미를 갖춰 일류 요릿집으로 팔려나갈 정도로 이름값이 높았다고 한다. 고려 시대에는 힘 좋은 여름 장어는 송도의 왕궁으로 보냈다고 하니 고려 왕실에서도 보양식으로 장어구이나 장어탕을 먹었던 모양이다. 우리에게 장어는 이렇게 전통적으로 중산층 이상에서 먹는 여름 보양식이었다.

 하지만 런던의 경우는 다르다. 장어가 런던 토박이들이 즐겨 먹는 음식이 된 역사는 뿌리가 깊다. 런던 주민들은 옛날부터 장어를 많이 먹었다. 런던 시내를 흐르는 템스 강이 장어들의 서식지였기 때문이다. 장어 요리가 발달하기 좋은 조건이었지만 런던 토박이 서민의 명물 요리로 자리 잡게 된 것은 18세기 무렵이다.

 당시 런던은 산업혁명의 여파로 환경오염이 극심했고 템스 강 역시 오염물질을 마구 버려 죽은 강이 됐다. 강에 살던 물고기들이 대부분 사라졌지만, 생명력이 강한 장어는 오염된 강물에서도 살았다. 런던 중산층은 오염된 강에서 잡히는 장어를 먹지 않았지만, 당시 공장 노동자들이 몰려 살던 이스트 런던은 상황이 달랐다. 이곳 주민들은 값싸고 영양이 풍부한 장어로 단백질을 보충했다. 이때 발달한 음식이 런던 토박이 서민음식인 장어 파이다. 사과로 만든 애플파이나 소고기를 넣은 미트 파이처럼 파이에 장어를 넣어 먹었고, 여름에는 장어를 끓였다가 식힌 장어 푸딩을 만들었다. 여기에 으깬 감자를 곁들인 것이 런던 서민의 대표 음식인 파이 앤드 매시(pie and mash)다.

 런던의 서민음식, 노동자의 음식이었던 장어 파이가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런던 시내에 빠른 속도로 보급됐다. 서민은 물론이고 중산층도 장어 파이를 찾았기 때문이다. 전쟁이 발발하자 영국은 전시 배급 제도를 실시했다. 성인 기준으로 2주일에 1인당 계란 한 개, 일주일에 고기 550g을 배급했으니 런던 주민들은 식료품을 충분히 구할 수 없었다. 그래서 평소 빈민들이 먹는 음식이었던 장어 파이에 눈길을 돌렸고 장어 파이 전문점이 번창했던 것이다.

 런던의 토속 서민음식 장어 파이는 여러 면에서 시사적이다. 우선 제2차 세계대전의 한복판에서 런던 주민들이 어떻게 전쟁의 고난을 극복했는지를 보여준다. 또 우리에게는 보양식인 장어가 다른 나라에서는 서민음식이라는 사실도 흥미롭다.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민물장어와 달리 우리는 잘 먹지 않는 칠성장어가 영국에서는 여왕에게 바치는 요리였다. 결국 보양식도 관점에 따라 달라진다. 보양식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배고플 때 맛있게 먹으면 모든 음식이 보양식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