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전쟁이야기

식량은 적에게 빼앗아 먹으면 된다’ 믿다 큰 코

구름위 2017. 1. 14. 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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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량은 적에게 빼앗아 먹으면 된다’ 믿다 큰 코

임팔전투와 ‘처칠 보급품’


일본군 태평양전쟁 초기 승리에 도취

‘식량은 전리품인 처칠 보급품으로’ 착각

일주일 분량만 휴대했다 전투 4개월 지속 

병력 80% 정글서 굶어 죽어 패전 자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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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팔전투에서 일본군의 공격에 맞서 영국군이 포격을 하는 모습. 사진=필자 제공

임팔전투에서 일본군의 공격에 맞서 영국군이 포격을 하는 모습. 사진=필자 제공



 

 

 ‘쌀이냐? 탄약이냐?’

 작전 소요 기간은 최소 한 달 이상이다. 식량과 탄약을 포함해 병사 개개인이 휴대할 수 있는 보급품의 양은 제한적이다. 식량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탄약을 선택할 것인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인도와 미얀마 접경지역에서 벌어진 임팔전투에서 일본군은 탄약을 선택했다. 최대한의 탄약 확보를 위해 최소한의 식량만 휴대했다. 달랑 일주일 분량이었다. 하지만 임팔전투는 실제로는 4개월간 지속됐다. 그리고 일본군 병사 6만5000명 이상이 사망했다. 이 중 5만 명 이상이 전사가 아니라 굶어 죽거나 기타 질병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산된다.

 임팔전투는 1944년 3월 8일 시작해 7월 3일 종결됐다. 일본군이 영국군이 장악하고 있던 인도와 미얀마 접경지역의 임팔과 코히마 지역을 공격해 벌어진 전투다. 두 지역을 점령하면 연합군의 중국 지원 루트를 차단하고 인도를 공격, 영국을 몰아내면서 미국과 유리한 조건으로 종전 협상을 벌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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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팔전투의 일본군 지휘관 무다구치 렌야 중장. 사진=필자 제공

임팔전투의 일본군 지휘관 무다구치 렌야 중장. 사진=필자 제공



 


 일본군 지휘관은 제15군 사령관 무다구치 렌야(牟田口廉也) 중장이었다. 임팔과 코히마 점령을 위해서는 한증막 같은 열기 속에 숲이 우거지고 길은 진흙탕인 정글을 통과해야 했다. 보급품은 개인이 각자 휴대하거나 가축 등에 실어 운반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병참과 보급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작전 계획이었기에 산하 부대장들이 작전에 반대했지만 무다구치 렌야는 식량이 부족하면 적에게 빼앗으면 된다면서 작전을 밀어붙였다.

 보급 계획은 3단계로 수립됐다. 우선 소 1만5000마리를 징발했다. 탄약과 야포를 운반하다 식량이 떨어지면 소를 잡아 고기를 먹는다는 계획이었다. 참고로 소는 등짐을 운반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동물이다. 밀림에 진입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절반이 계곡에 떨어지거나 물에 휩쓸려 사라졌다. 탄약과 식량 절반이 사라진 셈이다.

 둘째 일본인은 채식 위주의 식사를 하기 때문에 식량이 떨어지면 정글에서 나물을 채취해 먹으면 된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모자라는 식량은 적의 보급품을 탈취해 먹으라고 했다.

 어떻게 이렇게 터무니없는 작전계획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일까? 흔히 참모의 반대를 무시하고 우격다짐으로 작전을 밀어붙인 무다구치 렌야를 비난한다. 하지만 지휘관이 무지막지한 작전계획을 세우고 사령부에서도 이런 만화 같은 작전을 승인하게 된 데는 배경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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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팔전투에 참가한 일본군 대부분은 굶주림에 시달리다 사망했다. 사진=필자 제공

임팔전투에 참가한 일본군 대부분은 굶주림에 시달리다 사망했다. 사진=필자 제공



 

 


 직접적인 원인은 ‘처칠의 보급품’이었다. 퇴각하는 영국군에게서 빼앗은 전리품이다.

 태평양전쟁 초기인 1941년부터 1942년까지 일본 육군은 동남아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뒀다. 이 과정에서 영국군의 보급품을 활용했다. 예컨대 싱가포르를 점령할 때 영국군이 돌파할 수 없다고 여겼던 고무나무숲 정글을 일본군은 경전차와 자전거 부대로 뚫고 나가 기습공격에 성공했다, 점령한 영국군 진지에는 전투식량을 비롯한 식료품과 탄약, 연료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당시 일본군은 며칠 분의 건빵과 쌀을 휴대한 채 전투에 참여했지만 실제로는 쌀 한 주머니, 기름 한 깡통 가져올 필요가 없었을 정도였다.

 1942년 3월, 일본군이 미얀마 수도 양곤을 점령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주둔하고 있던 영국군의 보급품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소고기 통조림과 치즈, 버터, 커피와 차, 담배, 위스키가 가득했다. 일본군은 최소한의 보급품만 휴대하고 전투를 시작했지만, 적으로부터 식량을 빼앗아 재보급을 할 수 있었다. 오히려 전투 승리에다 전리품까지 얻었기에 사기가 충천했다. 적군에게서 빼앗은 보급품을 영국 총리 처칠이 보내 준 선물이라며 처칠의 보급품(Churchill Ration)이라고 불렀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일본군은 식량의 상당 부분을 현지에서 조달했다. 동남아 전선뿐만 아니라 중국에서도 한 지역을 점령하면 식량부터 확보했기에 현지인들은 일본군을 ‘메뚜기 군대’라고 불렀을 정도다. 메뚜기 떼가 농작물을 쓸어가는 것처럼 식료품을 쓸어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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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팔전투에 참가한 일본군의 반합. 사진=필자 제공

임팔전투에 참가한 일본군의 반합. 사진=필자 제공



 


 태평양전쟁 초기 작은 승리에 도취한 일본군은 몇 가지 착각에 빠졌다. 그들은 말레이 반도와 미얀마 전선에서 승승장구했기 때문에 스스로를 정글 전투의 귀재라고 생각했다,

 또한 영국군을 비롯한 연합군은 일본군만 보면 모든 것을 팽개친 채 도망가기에 바쁘니 전리품으로 얻은 ‘처칠의 보급품’으로 식량을 해결하면 된다고 착각했다.

 그러다 결정적 타격을 입은 것이 임팔전투였다. 영국군은 퇴각하지도 않았고 부득이 철수할 때는 식료품과 탄약을 철저하게 파괴하고 떠났다. 적진을 점령해도 빵 한 조각, 총탄 한 개 얻을 수 없었던 일본군은 결국 80%의 병력이 정글 속에서 굶주리다 죽었다.

 처칠의 보급품, 적에게서 얻는 전리품에 보급을 의존하려던 일본군의 임팔전투 패배는 무다구치 렌야 개인의 무능함도 원인이지만 작은 승리에 도취한 일본군의 자만이 가장 큰 요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