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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변신’ 도토리, 조선시대 전쟁 대비 비축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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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변신’ 도토리, 조선시대 전쟁 대비 비축물자

<125> 도토리와 도토리묵
2015. 08. 17   15:27 입력


수확철에는 국가 중요 공사도 연기

마을마다 납부 의무 할당량도 있어

관청에서 참나무 수 기록하며 관리

피난 땐 양식으로, 흉년엔 구황식품

묵·전·떡 등 다양한 음식으로 변신

 

 

기사사진과 설명
도토리묵

도토리묵



 

 

 

 도토리는 생각보다 훌륭한 요리 재료다. 도토리로는 다양한 음식을 만들 수 있다. 도토리묵이나 묵밥은 기본이고 도토리 가루에 밀이나 메밀 가루를 섞어 도토리 전이나 도토리 밀쌈을 만들 수 있으며, 도토리 칼국수와 수제비도 특별한 맛이 있다. 도토리와 콩을 섞어 만든 메주로 도토리 된장을 만들기도 했다. 조선 시대에는 평안북도 강계의 도토리 된장이 맛있다고 소문났다.

 그뿐만 아니라 전쟁이 나거나 흉년이 들면 도토리 가루를 곡식과 섞어 도토리 밥을 지어 부족한 양식을 보충했고, 도토리 떡을 만들어 피난길 양식으로 삼기도 했다.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이야기 같지만 불과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강원도 산간지방에서는 도토리가 훌륭한 대용 식량이었다. 한국전쟁 때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도토리 덕분에 굶주림을 모면했다.

 

기사사진과 설명
도토리는 조선시대의 주요 군수물자였기에 당시에는 참나무 개체 수까지 관리했다.

도토리는 조선시대의 주요 군수물자였기에 당시에는 참나무 개체 수까지 관리했다.



 


 도토리는 우리에게 이렇게 중요한 식량이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강원도 산골짜기 마을에서는 겨울에 도토리 수십 가마만 저장해 놓아도 부잣집 소리를 들었을 정도라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도토리는 전쟁에 대비한 중요 비축물자였다. 조선의 백성들은 가을에 추수를 마치면 산으로 가서 도토리를 줍는 것이 빼놓을 수 없는 행사였다. 마을마다 의무적인 할당량이 있었다. 이렇게 주운 도토리는 관청에 일정량을 납품했다.

 ‘성종실록’을 보면 이 도토리를 각 고을의 군자창에 쌓아 두었다는 기록이 있다. 군자창은 조선 초기에 설치된 군자감(軍資監)에 속한 창고로 부대에서 자급자족용으로 재배한 곡식과 군수용으로 거둬들인 군량미를 이곳에 비축해 놓았다. 군자창에 쌓아둔 곡식은 전시에 대비한 비축물자였지만, 흉년이 들었을 때는 백성에게 곡물을 빌려주고 가을에 갚도록 하기도 했다.

 도토리는 전시 대비 비축물자였던 만큼 조선 초기에는 관리도 철저했다. 떨어진 도토리를 주워 모아 비축하는 것은 물론 산에서 자연적으로 자라는 참나무의 숫자까지도 기록해 놓았다. 비상 상황에서는 도토리가 그만큼 중요한 식량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도토리 수확 철이 되면 중요 공사까지도 연기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태종 11년인 서기 1411년, 한양에서 대규모 공사가 예정돼 있었다. 한양을 관통하는 개천을 정비하는 것이었으니 청계천 정비 공사로 추정된다. 원래 공사 개시 일정이 10월로 잡혀 있었으나 태종이 이 무렵은 백성들이 도토리를 주워야 할 때이니 공사를 이듬해 2월로 연기하라고 지시했다. 백성들의 비축물자 마련에 지장을 줄 수 있으니 공사를 늦추라는 것이었다.

 유비무환의 자세로 도토리를 열심히 모으다 보니 웃지 못할 일이 생기기도 했다. 국가적으로 너무 열심히 도토리를 모으다 보니 관청에 내야 할 도토리를 미처 구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면 백성들이 쌀을 팔아서 그 돈으로 도토리를 구입해 관청에 냈으니 주객이 전도된 셈이었다. 또 전란도 없고 흉년도 들지 않아 몇 년째 모아놓은 도토리가 썩기 시작하는데 어찌해야 할지를 묻는 지방 관아의 장계도 보인다. 경직된 관료주의가 낳은 폐단이었다. ‘중종실록’에 실려 있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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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토리묵 말랭이.

도토리묵 말랭이.



 


 전란이 일어나거나 흉년이 들면 임금도 도토리를 먹었다. 숙종은 흉년이 들자 백성들이 굶주리는데 왕만 배불리 먹을 수 없다며 반찬의 가짓수를 줄이고 도토리를 가져오게 하여 맛보면서 백성과 고통을 나누었다. 임금도 민초들과 고난을 함께한다는 정치적 상징물로 도토리가 활용된 것인데 때로는 쇼맨십도 지도자가 갖춰야 할 중요한 덕목이 된다.

 따지고 보면 우리나라에 도토리 요리가 다양하게 발달한 이유는 도토리가 비상 상황에 대비한 중요한 양식이면서 동시에 별미의 재료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도토리는 그냥 두면 다람쥐 먹이고, 옛날처럼 도토리 가루로 떡이나 수제비를 만들어 먹으면 굶주림을 면하기 위한 구황식품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도토리를 물리적·화학적으로 변화시켜 묵으로 만들면 훌륭한 요리가 된다. ‘동의보감’에도 도토리는 위와 장을 튼튼하게 만들고 몸에 살이 오르게 한다고 했으니 건강에도 좋은 별식이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규경은 “도토리 껍질을 벗긴 후 갈아서 체로 거르고, 그 가루를 푼 물을 끓여서 굳힌 다음 가늘게 썰어서 초장에 찍어 먹으면 산중의 진솔한 반찬이 되고 국수나 율무와 함께 섞어 먹으면 맛이 묘하다”고 했으니 지금의 도토리묵과 도토리묵밥이다.

 도토리는 이처럼 전란과 흉년을 이겨내는 구황식품이자 유비무환의 전시 비축물자, 맛있는 반찬과 별미로 다양하게 활용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