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전쟁이야기

뺏고 빼앗기는 고지 쟁탈전 배달 잘해 배 불려야 ‘승전’

구름위 2017. 1. 14. 2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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뺏고 빼앗기는 고지 쟁탈전 배달 잘해 배 불려야 ‘승전’

주먹밥과 다부동 전투


보급체계 무너진 국군·북한군

지게부대, 전투현장까지 날라

낙동강 전선 방어 큰 기여

 

 

기사사진과 설명
6·25전쟁 당시의 주먹밥 모형.출처=전쟁기념관 

6·25전쟁 당시의 주먹밥 모형.출처=전쟁기념관 



 

 

 

   6·25전쟁을 조금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자. 전후 세대에게 6·25 전쟁 때의 음식 하면 생각나는 것이 주먹밥이다. 개떡과 찐 감자, 미숫가루를 비롯한 여러 가지 전쟁 체험 음식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이 보리밥을 뭉쳐 만든 주먹밥이기 때문이다. 전쟁을 겪은 할아버지 세대로부터 주먹밥 먹고 싸웠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은 탓도 있을 것이다.

 왜 하필 주먹밥이었을까? 옛날 전쟁도 아니고 20세기, 그것도 불과 65년 전에 겪은 전쟁이었는데 6·25 하면 주먹밥을 떠올리게 되는 이유가 문득 궁금해진다.

 주먹밥은 휴대용 음식이다. 민간인은 급히 피란 떠날 때나 주먹밥을 먹었지 평소에는 아무리 전쟁 중이라도 밥을 먹었다. 밥을 뭉치면 평소보다 더 많이 먹게 된다. 그러니 주먹밥이 전시에 먹을 것이 부족해서 나온 음식이라는 생각은 편견이다. 사실 겨로 만든 개떡이나 찐 감자에 비하면 비록 꽁보리밥을 뭉쳤어도 주먹밥이 훨씬 좋은 음식이다.

 그럼에도 6·25 전쟁 하면 떠올리는 대표적인 음식으로 주먹밥을 기억하는 이유는 주먹밥이 전쟁의 승패를 가른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6·25 전쟁 초기, 북한군의 공세를 성공적으로 저지해 나라를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구한 싸움이 잘 알려진 다부동 전투다. 당시 전투에 참가한 군인들의 증언과 전사(戰史)를 종합해 보면 전투가 벌어진 초창기에 국군이 주로 먹고 싸운 음식이 주먹밥이었다. 물론 북한군도 마찬가지였다.

 양측이 모두 주먹밥을 먹고 싸웠다. 다만 국군은 식량 사정이 갈수록 좋아졌고, 북한군은 갈수록 악화돼 주먹밥도 제대로 먹을 수 없었다. 다소 비약해서 말하자면 6·25 전쟁 초기 전투에서 주먹밥이 전쟁의 승패를 갈랐다고 할 수도 있다.

 임진왜란 때도 아니고 20세기 전쟁에서 국군이나 북한군은 왜 모두 제대로 된 전투식량이 아닌 주먹밥에 의존해 전투를 벌였을까?

 

기사사진과 설명

주먹밥을 만들고 있는 후방의 부녀자들. 다부동 전투에서 국군 장병은 이들이 만든 주먹밥을 먹으며 싸웠다. 필자제공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가 펴낸 ‘한국전쟁사’ 낙동강 방어전투에 관한 기록에 의하면 다부동 전투가 벌어진 낙동강 방어선이 구축될 무렵 북한군의 병참체계는 이미 무너진 상태였다. 북한은 군수품을 만주에서 평양을 거쳐 서울에 집하한 후 다시 경북 왜관까지 300㎞를 운반해야 했다.

 

   하지만 유엔군이 제공권과 제해권을 장악했기에 보급품을 제대로 운송할 수 없었다. 유엔군은 7월 한 달 동안에만 모두 2500차례의 폭격으로 북한군 보급로를 마비시켰다. 결국 북한군은 민간인을 징발해 1인당 20㎏의 보급품을 메고 하루 20㎞를 운반하게 한 후 대기하고 있던 또 다른 지게 부대에 넘기는 식으로 물자를 옮겨야 했다.

 

   사정이 그랬던 만큼 식량은 현지 조달에 많이 의존했고, 전선이 2개월 정도 고착되는 상황에서 다부동 전투가 시작된 8월에 들어서자 식량은 평소의 3분의 1 수준으로 줄었다.

 

   하루 평균 주먹밥 1개도 먹지 못하고 싸운 것이다. 8월의 무더위와 허기 탓에 체력이 극도로 떨어지면서 북한군의 전투력도 급속히 하락했다.

 이 무렵 국군의 보급체계 역시 제대로 정비되지 못한 상태였다. 6월 25일 북한의 기습공격 이후 계속 후퇴를 거듭했기에 다부동 전투가 시작될 무렵 국군 병사들은 보급품을 제대로 지급받을 수 없었다. 식량 사정도 마찬가지여서 국군도 민간에서 양식을 조달했다.

 민간에서 징발한 쌀과 보리를 비롯한 곡식을 멀리 떨어진 산악지대의 전투 현장까지 운반해 그곳에서 밥을 지어 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체계화된 정상적 군수품이 아닌 민간에서 구한 식량으로 가장 손쉽게 만들 수 있는 음식이 주먹밥이었다.

 다부동 전투에 관한 각종 기록을 종합해 보면 당시 전투현장에서 식사는 대부분 주먹밥으로 해결했다. 후방에 있는 취사장에서 여자들이 김과 밥, 그리고 단무지와 소금으로 주먹밥을 만들면 민간인 지게부대가 전투 현장까지 주먹밥을 날랐다.

 다부동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는 한 참전 용사의 증언에서도 알 수 있다. 밤새 고지쟁탈전을 벌이는데 저녁 때 지급된 주먹밥은 달랑 한 개였다. 하지만 다음날 아침이면 사정이 달라져 주먹밥이 일인당 6~7개씩 돌아왔다. 밤새 보급 사정이 좋아져서가 아니라 야간 전투에서 전우들이 그만큼 전사했기 때문이다.

 고지를 빼앗고 빼앗기는 공방전 속에 전투의 승패를 좌우한 것은 주먹밥이었다는 증언도 있다. 민간인 지게부대가 주먹밥을 충분히 배달하면 전투에서 이겼고 보급이 제때 이뤄지지 못하면 전투에서 패했다는 것이다. 전투가 계속되는 상황에서 며칠 동안 주먹밥 한 개,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한 상태에서는 체력이 소진돼 싸울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전쟁의 승패를 좌우한 전투에서 국군과 북한군 모두가 주먹밥을 먹으며 싸웠다. 지금 시각으로 보면 열악한 전쟁 체험 음식일 뿐이지만 주먹밥은 다부동 전투의 승패를 가름했고 결국 이 전투 승리로 낙동강 전선을 방어하는 데 기여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