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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남북전쟁 터지며 北군 주요 식량으로...애물단지서 愛물단지로

구름위 2017. 1. 14.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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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남북전쟁 터지며 北군 주요 식량으로...애물단지서 愛물단지로

바닷가재


붉은색 제복에 멸시·경멸의 뜻담겨

영국군 병사를 바닷가재 병정조롱

병사의 통조림최고급 요리로 변신

 

 

 


 

 

기사사진과 설명
미국 독립전쟁 때인 1775년 벙커힐 전투에서 진격하는 영국군 그림(퍼시 모란 작). 붉은 제복을 입고 있어 바닷가재 병정이라는 놀림을 받았다.

미국 독립전쟁 때인 1775년 벙커힐 전투에서 진격하는 영국군 그림(퍼시 모란 작). 붉은 제복을 입고 있어 바닷가재 병정이라는 놀림을 받았다.



 

 

기사사진과 설명
제1차 세계대전 초기 독일군은 지금의 방탄조끼와 비슷한 방탄 갑옷을 입었다. 독일군에게서 노획한 방탄복을 입고 있는 영국군 병사들.   필자 제공

제1차 세계대전 초기 독일군은 지금의 방탄조끼와 비슷한 방탄 갑옷을 입었다. 독일군에게서 노획한 방탄복을 입고 있는 영국군 병사들. 필자 제공



 

 

 

   미국 독립전쟁 당시 조지 워싱턴 장군이 이끄는 독립군 병사들은 영국군을 ‘바닷가재 병정’이라고 불렀다. 영국 병사들이 보병·포병·기병을 막론하고 모두 붉은색 제복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닷가재는 값이 비싼 데다 맛도 좋은 최고급 해산물이다. 껍질은 붉고 단단하며 화려하기 그지없다. 그렇다면 주로 식민지의 농민과 노동자들로 구성된 독립군 병사들이 상대적으로 초라한 자신들의 모습에 비해 멋진 제복을 갖춰 입고 중무장한 영국군 병사들이 부러워 최고급 갑각류인 바닷가재에 빗댄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전혀 아니다. 바닷가재 병정이라는 별명에는 오히려 멸시와 경멸의 뜻이 담겨 있다.

 먼저 액면 그대로 영국군의 붉은 제복이 잘 삶아놓은 바닷가재 껍질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속된 말로 “네까짓 것들은 우리들의 밥”이라는 의미가 있다. 하지만 진짜 멸시의 이유는 따로 있었다. 옛날 미국에서 바닷가재는 웬만한 사람들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별 볼 일 없는 식품이었기 때문이다. 또 하나 당시 영국 병사들은 잘못했을 경우 체벌을 받았다. 채찍으로 등을 맞았기에 바닷가재 껍질처럼 흉터가 생겼다. 매 맞는 군인이라고 경멸했던 것이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영국 병사를 바닷가재 병정이라고 불렀던 것인데 이 별명 하나로도 당시 독립군 병사들의 사기를 짐작할 수 있다.

 제1차 세계대전 초기 독일군은 지금의 방탄조끼와 비슷한 방탄 갑옷을 입었다. 깡통의 재료가 되는 주석과 고무로 만들었는데 연합군 병사들은 이 방탄 갑옷도 바닷가재 껍질이라고 놀렸다. 가끔 빼앗아 입기는 했지만 20세기에 웬 갑옷이냐는 비웃음도 없지 않았다.

 지금이야 바닷가재가 최고급 요리지만 예전에는 달랐다. 전혀 환영받지 못했다. 오죽했으면 별명이 바다의 바퀴벌레였을까.

 바닷가재를 얼마나 혐오스럽게 여겼는지는 바닷가재의 영어이름, 랍스터(Lobster)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 단어의 어원은 고대 영어인 로페(Loppe)에 뿌리를 두고 있는데 바로 거미라는 뜻이다. 바다 밑에 사는, 거미를 닮은 갑각류라는 의미에서 생긴 이름이니 요즘 바닷가재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흔한 것은 특별할 수 없고, 아무나 먹는 식품은 아무리 맛있어도 별미가 될 수 없다. 바닷가재가 천덕꾸러기 취급을 당했던 이유는 너무나 흔했기 때문이다. 북미 대륙 개척 초기인 17세기만 해도 발길에 차이는 것이 바닷가재였다. 그 때문에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바닷가재를 비료로 사용했고 유럽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이주민들은 농장에서 식사로 일주일 내내 바닷가재를 먹어야 했다. 노동계약서에 일주일에 세 차례 이상 바닷가재를 음식으로 제공하지 않는다는 조항이 있었을 정도다. 기록에 의하면 19세기 초, 미국 보스턴에서 완두콩이 1파운드에 53센트였던 반면 같은 무게의 바닷가재는 11센트였다. 콩보다도 더 헐값에 팔렸으니 얼마나 하찮은 해산물 취급을 받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뒤집어 보면 바닷가재가 값싸고 풍부했던 만큼 식료품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전쟁 중에는 병사들에게 제공할 수 있는 최고의 단백질 공급원이었다. 1861년 시작된 미국 남북전쟁 당시 바닷가재는 북군 병사들이 야전에서 먹는 주요 전투식량이었다. 물론 지금처럼 요리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은 바닷가재 통조림 형태로 제공됐다.

 1862년 8월 29일 워싱턴 DC 부근에서 벌어진 제2차 황소의 질주(Bull Run) 전투에서 남군이 북군을 물리치고 승리했다. 이때 남군의 한 부대가 북군 병참기지를 빼앗았는데 창고에는 사탕·케이크·과일과 바닷가재 통조림이 산처럼 수북이 쌓여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통조림은 나폴레옹이 전쟁 중 장기간 보관할 수 있고 휴대가 편리한 식품 보존 방법을 찾기 위해 현상금을 걸자 1804년 프랑스의 아페르가 최초로 고안했다. 이 통조림은 사실상 밀봉한 병조림에 가까웠고 깡통 통조림은 1810년 영국의 듀란드가 만들었다.

미국에서 통조림이 야전에서 군용식량으로 제공된 것은 남북전쟁 무렵이다. 이때 처음 통조림으로 만들었던 식품이 바로 바닷가재와 연어다. 북군 병참기지에 바닷가재 통조림이 잔뜩 쌓여 있었던 이유다.

 바닷가재 통조림은 제2차 세계대전 때까지도 병사에게 지급됐다. 하지만 바닷가재가 최고급 해산물로 주목받게 된 배경에는 제2차 세계대전도 한몫을 했다.

육류를 비롯해 갖가지 생선까지 해산물 대부분이 배급 품목으로 지정돼 수급에 제한을 받았지만 바닷가재는 제외됐다. 그 때문에 자유롭게 바닷가재를 먹으며 맛을 재평가하게 됐고 이 무렵 할리우드 스타들도 배급품이 아닌 바닷가재로 파티를 열면서 고급 요리로 이미지가 바뀌기 시작했다. 바닷가재가 참호에서 먹던 통조림에서 고급 요리로 변신하게 된 과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