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전쟁이야기

부상병은 녹두죽·병사는 말고기 먹이며 항전

구름위 2017. 1. 13. 2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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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상병은 녹두죽·병사는 말고기 먹이며 항전

남한산성과 녹두죽


병자호란 때 청군, 6일 만에 한양 점령

남한산성서 45일 버틴 원동력은 ‘사기’

 

 

기사사진과 설명
녹두 빈대떡

녹두 빈대떡

 


 

   1636년 12월 9일, 청나라 군대가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조선으로 쳐들어왔다. 병자호란이다. 불과 6일 만인 14일 한양의 외곽, 지금의 서울 은평구 녹번동 근처까지 밀고 내려왔다. 인조는 황급히 피란을 떠나 14일 저녁, 부랴부랴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다음날인 15일, 남한산성은 청군에 완전히 포위됐다.

 당시 조선으로 쳐들어온 청나라 군사는 14만 명, 반면 성안에서 농성에 들어간 조선군 숫자는 약 1만4000명이었다. 청군이 모두 남한산성에 집결해 성을 포위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대략 10분의 1에 불과한 전력이다.

 조선군은 남한산성에서 청나라 군대와 어떻게 싸웠을까? 불과 일주일도 되지 않은 짧은 시간 동안에 도성인 한양까지 내준 조선군이다. 얼핏 보면 이런 오합지졸의 군대가 따로 없지만, 남한산성에 들어가서는 1636년 12월 15일부터 이듬해 1월 30일까지 무려 45일을 버텼다.

 결국, 인조가 항복을 했지만 장기간 포위된 상태에서 싸울 전의를 상실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강화도가 함락되고 구원병 역시 도착할 기미가 없는 상황에서 더 이상 버텨야 할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양은 쉽게 내 준 조선군이 남한산성에서는 장기간 버틸 수 있었던 배경이 무엇일까?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에서 그 이유를 엿볼 수 있다.

 남한산성으로 들어간 조선군은 청나라 군대와 대규모 공성전을 벌였던 적이 없다. 그저 간헐적인 소규모 전투만 있었을 뿐이다. 그것도 청군 20명의 목을 베고 돌아오다 아군은 3명이 피해를 봤다는 기록처럼 평지에서와는 달리 조선군이 일방적으로 밀린 것도 아니다. 남한산성이 그만큼 험난한 요새였기 때문에 청나라 군대가 총공격을 펴지는 못했을 것이다.

 남한산성에는 식량도 충분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남한산성이 포위됐을 때 성내에 쌀과 콩이 1만8000석, 겉곡식이 5800석, 된장이 200여 동이가 있는데 군병의 숫자는 1만4000명이니 50일 치의 식량은 된다는 기록이 보인다. 물론 피란 온 민간인 숫자까지 합치면 넉넉한 양은 아니었겠지만 굶주림에 시달릴 정도는 아니었다.

 이렇게 난공불락의 요새에다 식량까지 있었으니 남한산성이 쉽게 함락될 가능성은 크지 않았다. 하지만, 압록강에서 한양까지를 불과 6일 만에 돌파한 청나라 군대에 맞서 남한산성에서 45일을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또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있다. 조선군의 전투 의지다.

 싸움에 나선 병사를 먼저 돌보고 먹이며 사기를 돋우었기 때문에 청군과 장기간 맞설 수 있었다. 산성의 병사들이 가장 고통을 겪었던 것은 한겨울 산꼭대기의 혹독한 추위였다. 솜옷도 입지 못한 상태로 성벽에서 보초를 서면 며칠 만에 동상에 걸려 손발을 잘라내야 할 정도가 됐다. 간헐적인 전투로 말미암은 부상병과 동상 환자가 속출하면서 이들은 고통을 호소했다.

 1636년 12월 25일, 승정원일기에 고통에 시달리는 부상병을 어떻게 치료했는 지 기록이 실려 있다. 부상병들이 괴로움을 잊기 위해 술을 요구하자 의관이 술은 안 된다며 부상병을 따뜻한 민가로 데려갔다. 그리고 당시 의료책임자였고 훗날 병조참판을 지낸 허계(許啓)가 인조에게 부상병에게 녹두죽을 끓여 먹일 것이니 윤허해 달라고 요청한다. 참고로 허계는 항복을 반대하고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하다 청나라에 잡혀 간 다섯 충신(五忠臣) 중 한 명이다.

 그런데 부상병에게 왜 하필 녹두죽을 끓여 먹일 궁리를 했을까? 또 그까짓 녹두죽을 끓이는 데 왜 임금에게까지 허락을 받아야 했을까?

 옛날에는 녹두가 지금처럼 흔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임금도 아플 때는 녹두죽을 먹었다. 실제 영조가 승하했을 때 정조가 며칠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슬퍼하자 어의들이 건강을 해치지 않으려면 녹두죽을 먹어야 한다고 간청했다.

왜 하필 녹두죽을 먹어야 한다고 했는 지는 어의가 정조에게 권했던 말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슬픔이 극에 달해 타는 듯한 마음을 가누지 못할 때에는 녹두죽을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허계가 부상병들에게 녹두죽을 먹이겠다고 한 이유도 외상이나 동상 등으로 인해 열이 날 때에 해열제로 녹두의 효능이 탁월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양식이 부족한 와중에서도 부상병에게 최고의 치료음식을 제공했던 것이다.

 부상병 치료뿐만이 아니었다. 남한산성은 산속에 자리 잡고 있기에 평야와 달리 군마의 필요성이 그다지 크지 않은 곳이다. 때문에 일정 숫자의 말을 잡아 그 고기를 우선적으로 병사들에게 먹여 사기를 높였다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보인다.

  병자호란의 원인과 승패에 대해서는 다양한 분석이 가능하지만 일단 당시 국제정세를 잘못 읽은 오판과 전략 부재 탓에 패한 전쟁이라는 인식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45일을 버틴 남한산성 농성은 패한 전투는 아니었다. 그리고 장기간 포위를 버틸 수 있었던 배경은 그나마 성안에서 최고의 치료제로 부상병을 돌보고 병사들을 아꼈던 단합의 힘이 아니었을까 싶다. 승정원일기에 보이는 녹두죽 한 그릇에 담긴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