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전쟁이야기

독일 점령 네덜란드 지역 대규모 ‘식량 폭격’

구름위 2017. 1. 13. 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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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점령 네덜란드 지역 대규모 ‘식량 폭격’

영국 ‘만나 대작전’




기사사진과 설명
기아에 허덕이는 네덜란드 국민을 위해 식료품을 투하하고 있는 연합군 수송기와 환호하고 있는 시민. 필자제공

기아에 허덕이는 네덜란드 국민을 위해 식료품을 투하하고 있는 연합군 수송기와 환호하고 있는 시민. 필자제공


 

연합군, 독일 항복 전날까지 빵 등 식료품 1만 톤 투하

아사 직전 네덜란드 국민 450만 명 구한 기적의 작전

 

   “하늘에서 빵이 떨어진다!”

 굶주린 사람들이 거리로 뛰쳐나왔다. 일주일에 겨우 라면 한 개 정도 분량의 음식 만을 먹으며 버티고 연명했던 사람들이다. 굶어 죽기 일보 직전, 하늘에서 떨어진 음식은 성경의 만나처럼 기적에 다름 아니었다.

 1945년 4월 29일부터 5월 7일까지 네덜란드에서 일어났던 일이다. 5월 8일 나치 독일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기 전날까지 연합군 공군은 당시 독일이 점령하고 있던 네덜란드 지역에 대규모 폭격기 편대를 동원해 폭탄 대신 빵을 비롯한 갖가지 식료품을 투하했다.

 영국 공군이 펼쳤던 작전명은 만나(Manna) 대작전, 미국 공군이 추진했던 작전은 먹보(Chowhound) 대작전이었다. 만나는 성경 출애굽기에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황야에서 헤매다 먹을 것이 떨어져 굶어 죽기 직전, 하느님이 하늘에서 내려 준 음식이다. 굶주림으로 죽어가던 네덜란드 국민에게 하늘에서 떨어진 빵과 식료품이야말로 바로 만나 그 자체였다.

 영국 공군은 약 여드레 동안 폭탄 대신 식료품을 잔뜩 실은 폭격기 편대를 출격시켜 모두 6680톤의 음식을 투하했고, 미국 공군은 일주일에 걸쳐 약 4000톤의 식량을 떨어트렸다. 약 1만1000톤의 식품 투하 작전으로 네덜란드 국민을 굶주림에서 구해냈던 것인데 도대체 당시 네덜란드에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5년, 유럽의 서부전선 중 나치 독일의 점령지에 살던 약 450만 명의 네덜란드 국민이 굶어 죽기 직전까지 가는 상황이 벌어졌다. 나중에 집계했을 때 실제로 이때 굶주림에 쓰려져 죽은 사람만 2만2000명으로 집계됐고 영양실조로 아사 직전에 놓였던 사람이 3만여 명에 이르렀다.

 아무리 전쟁 중이라지만 수백만 명이 굶어 죽는 대참사가 일어날 뻔했던 배경은 1944년 9월 17일 시작된 마켓가든(Market Garden) 작전에서 비롯됐다. 영국의 몽고메리 원수가 공수부대를 동원해 독일이 점령 중인 네덜란드 후방으로 침투해 라인 강을 건너는 다리를 점령, 연합군의 진격 교두보를 확보한다는 작전이다. 흘러간 영화 ‘멀고 먼 다리’ 그리고 ‘라이언 일병 구하기’ 등의 영화로 널리 알려진 작전이다. 이때 연합군을 지원하기 위해 네덜란드 망명 정부가 나치 점령지의 철도 노동자에게 독일군의 물자수송을 지연시키기 위한 파업을 지시했다. 파업지시가 떨어지자 철도 노동자 90%가 하루아침에 지하로 잠적했다. 게릴라들은 후방에서 네덜란드의 철도망을 파괴해 버렸다. 하지만, 마켓가든 작전은 철저하게 실패로 끝났다.

 이어 독일군의 보복이 시작됐다. 네덜란드 주둔 독일군 사령관은 1944년 10월부터 네덜란드로 들어가는 모든 식료품 공급을 차단해 버렸다. 농촌지역에서 네덜란드 대도시로 공급되는 음식과 연료를 비롯한 물자가 끊어지면서 대도시 주민 450만 명이 굶주림과 추위에 떨어야 했다. 문제가 심각해지자 독일군 사령관은 6주일 만에 공급중단 조치를 철회했지만 무너진 운송 시스템과 잠적한 철도 노동자들이 돌아오지 않으면서 대기근이 시작됐다.

 전쟁 중에는 기본적으로 배급제도가 시행된다. 그런데 물자 공급이 끊기면서 식량 비축량은 급속도로 줄었고 수도인 암스테르담에서는 성인 한 명에게 일주일에 제공되는 열량이 1000kcal로 제한됐다.

   우리가 요즘 먹는 라면 2개꼴이다. 그나마 1945년 2월에는 580kcal로 줄었으니 라면 한 개로 일주일을 버텨야 하는 형편이 됐다. 기록을 보면 치즈는 2주일에 100g이 제공됐고, 빵은 1944년 10월에는 일주일에 1000g에서 이듬해 4월에는 400g으로 줄었다.

 아사 직전의 대도시 시민은 개와 고양이 같은 애완동물은 진작에 잡아먹었고 이후에는 값나가는 물건을 들고 하루 수십㎞를 걸어 시골 농장을 찾아가 음식과 교환했다. 그리고 얻어 온 음식이 주로 튤립 뿌리와 무였다. 이때를 역사가들은 굶주림의 겨울(Hunger Winter)이라고 하는데 유럽 동부 전선의 스탈린그라드에 이은 대기근으로 평가한다.

 전쟁 막바지에 450만 명의 무고한 시민을 굶어 죽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연합군은 항공기를 이용한 대규모 식량투하 작전을 수립했다. 문제는 독일군의 반격이었다. 비록 패망 직전이었지만 네덜란드 주둔 독일군의 전력은 여전히 만만치 않았다. 휴전협상을 벌였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영국 공군은 할 수 없이 4월 29일 시험 삼아 두 대의 폭격기를 띄워 식료품을 투하했다. 독일군의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낙하산 없이 100m 정도로 낮게 날아가 식품을 떨어트렸다. 순수 식료품임을 확인한 독일군도 이후 대공포를 쏘지 않았다.

 식료품 투하로 네덜란드 국민은 아사를 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작전 시작 9일 후, 독일의 무조건 항복으로 전쟁은 끝났다. 휴전이 성립되지 않은 상황에서 격추당할 위험을 무릅쓰고 시작한 만나 대작전이다. 억압받는 사람을 구원하려는 의지, 도덕성의 차이가 연합군과 나치 독일의 차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