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전쟁이야기

“강한 군대는 역시 잘 먹어야 잘 싸운다”

구름위 2017. 1. 13. 2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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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한 군대는 역시 잘 먹어야 잘 싸운다”

 충무공과 청어


李 충무공, 부족한 군량 농사로 자급자족
소금 생산·청어 잡아 상당량 곡식 사들여

 

기사사진과 설명
한산대첩도(전쟁기념관 소장).

한산대첩도(전쟁기념관 소장).


기사사진과 설명
청어과메기.

청어과메기.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0년 전인 1583년, 국방을 책임진 병조판서 이율곡이 선조에게 외적의 침입에 대비해 국력을 키울 것을 주장했다.

 “나라가 오랫동안 태평하다 보니 무사안일주의가 퍼졌고 군대와 식량이 모두 부족해 하찮은 오랑캐가 국경을 침범해도 나라가 놀라 술렁이니 혹시 큰 적이 침범해 오면 어떤 지혜로도 극복할 수 없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율곡은 이렇게 말하며 10만 군사를 키우자고 주장했는데, 단순히 군인 숫자만 늘리자는 것이 아니었다. 군사력을 키우려면 먼저 경제가 뒷받침 되어 조달할 자원이 넉넉해야 하고, 군대가 강해지려면 먼저 든든하게 먹어야 한다고 강조했다(養兵養民, 足兵足食). 군수지원 체계까지 시스템을 갖추자는 것이니 정리하자면 기본을 갖추고 원칙에 충실해 만반의 준비를 다하자는 것이었다. 조정은 율곡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결국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난 개전 초기에 조선군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런 준비 없이 당한 침략이었기에 군량 마저 부족했다. 뿐만 아니라 무려 7년을 끈 전쟁이었으니 농사도 제대로 짓지 못해 임진왜란 기간 백성과 병사 모두 먹을 것이 없어 어려움을 겪었다.

 문제는 전쟁터인 조선 땅에서 나오는 제한된 농산물로 백성들은 물론 조선군과 명나라 군대, 심지어 적군인 왜적까지도 군량미를 조달했으니 상황이 더욱 심각했다. 지원군인 명나라는 중국에서 군량을 가져온 것이 아니라 조선 조정에서 양식을 조달했다. 때문에 명나라 군사를 먹이려고 정작 조선군은 보급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적군인 왜적 역시 전쟁 초기를 제외하고는 현지에서 식량을 조달했다. 다시 말해 조선 땅에서 약탈한 농산물로 배를 채웠던 것이다.

 그렇다면 조선군, 특히 임진왜란 승리의 주역이었던 이순신 장군의 조선 수군은 무엇을 먹으며 싸웠을까? 내륙인 육지에서 싸웠던 군대는 그나마 군량미를 지급 받았지만 수군은 직접적인 지원을 받지 못했다. 이유는 제해권을 장악했으니 조선 수군이 장악한 지역에서는 농사지을 여유가 있었고, 또 전반적인 군량도 부족했으니 우선순위에서 밀린 것인데 어쨌든 식량을 직접 조달해야 했기에 난중일기에는 충무공이 병사들과 백성이 먹을 양식을 조달하기 위해 고심하는 장면이 곳곳에 보인다.

 이순신 장군은 직접 농사를 지어 양식을 조달했다. 조선은 군대가 먹을 식량은 직접 농사를 지어 조달하는 둔전제(屯田制)였다. 이에 따라 이순신 장군은 충분한 양식 확보를 위해 왜적이 침범하지 못한 호남평야와 섬을 개간해 농사를 지었다. 덕분에 피란민을 결집하고 군량도 확보하며 곡창지대를 적에게 내주지 않는 1석3조의 효과를 거두기도 했다.

그래도 모자란 양식은 소금을 생산해 팔아서 곡식을 조달했다. 일부 연구에 의하면 당시 조선 수군이 하루에 먹는 곡식은 쌀 100가마가 넘었기 때문에 전시에 둔전에서 지은 농사만으로는 다 조달할 수 없었다. 때문에 난중일기에는 소금을 생산하기 위해 가마솥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여러 차례 보이는데 소금을 만들어 자체적으로도 쓰고 일부는 팔아서 곡식을 확보했다. 지금과 달리 조선 중기에는 소금 값이 엄청나게 비쌌기 때문에 이렇게 마련한 소금으로 상당량의 곡식을 사들일 수 있었다.

 조선 수군은 이율곡이 주장했던 것처럼 든든하게 먹으며 전투에 나설 수 있었다. 승리할 수 있었던 또 다른 요인 중 하나가 바로 청어였다. 전투가 없을 때는 어부처럼 청어를 잡아 먹고 말려서 보관했다가 지금의 과메기처럼 먹기도 했다.

 예전 조선시대에는 청어가 무척이나 흔한 생선이었다. 얼마나 많이 잡혔는지 전기가 없던 시절에는 청어 기름으로 등잔불을 밝힐 정도였다. 청어는 맛도 좋고 많이 잡혀 한자로 비유어(肥儒魚)라고 불렀다. 선비를 살찌우는 생선이라는 뜻으로 흔하고 값이 싸서 돈 없는 가난뱅이 선비들도 쉽게 사서 영양을 보충할 수 있었기 때문에 지어진 이름이다. ‘물 반, 고기 반’이라는 말이 있는데 약 100년 전만 해도 해도 부산항 내해에는 배가 다니기 불편할 정도로 청어가 많았다는 말이 전해진다.

 하지만 임진왜란 때는 청어도 전쟁을 알았는지 예전에 비해 어획량이 크게 줄었다고 한다. 조선 수군은 전쟁 중에 청어를 잡아 군량으로 삼고 또 청어를 팔아 곡식을 마련하기도 했는데 난중일기를 보면 아무리 어획량이 줄었다고 해도 그 양이 만만치 않았다. 1592년 11월 21일자 일기에는 청어 1만3240두름을 곡식과 바꾸려고 가져갔다고 했고, 같은 해 12월 4일자 일기에는 청어 7000두름을 곡식 사러가는 배에 실었다고 나온다. 한 두름은 청어 20마리를 새끼줄로 엮은 것이니 이틀에 걸쳐 가져 간 청어가 각각 26만4800마리와 14만 마리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율곡 이이가 10만 양병설을 주장할 때 강조했던 것은 군대와 함께 군량과 군마, 장비를 미리 제대로 갖추자는 것이다. 강한 군대는 잘 먹어야 한다(足兵足食)는 기본, 그 원칙을 이순신 장군은 군량 확보에서도 실천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