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기질·비타민 풍부…“정원에 시금치를 심자”
- 시금치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승리의 정원’ 가꾸기 캠페인 시금치는 중요한 군수물자…부상자도 살리는 채소
제2차 세계대전 초기에 방영된 ‘영국에 시금치를 보내자’는 내용의 뽀빠이 만화영화. 필자제공 |
제2차 세계대전 초기에 방영된 ‘영국에 시금치를 보내자’는 내용의 뽀빠이 만화영화. 필자제공 |
“영국에 시금치를 보내자.”
제2차 세계대전 초기, 미국이 일선 장병과 후방 국민들에게 방영했던 뽀빠이 만화영화의 제목이다.
‘뽀빠이’는 시금치 통조림만 먹으면 천하무적의 장사로 변신하는 캐릭터. 대서양에서 무차별적으로 덤벼드는 나치의 잠수함, U보트를 모조리 물리치고
영국 런던의 수상관저가 있는 다우닝 가로 시금치 통조림을 배달한다는 내용이다.
미국은 왜 하필 영국에 시금치를 보내자는 내용의
홍보영화를 만들었을까? 첫째는 물론 전시 홍보다. 당시 ‘미키마우스’나 지금의 ‘뽀로로’보다 더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뽀빠이를 등장시켜 독일군을
우스꽝스럽게 만들려는 목적이 있었다. 재미도 있으면서 적군을 멍청하게 만들어 병사들의 사기를 높이려는 의도다. 둘째는 영국에 대한 전쟁지원을
강조, 미국의 참전 당위성을 간접적으로 설명하면서 동시에 시금치 먹기를 장려하려는 의도였다. 시금치가 중요한 군수물자였기 때문인데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연합국에 제한 없이 보급됐던 식품이 햄 통조림 스팸과 시금치 통조림이었다.
전쟁 중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은
국민을 대상으로 ‘승리의 정원(Victory Garden)’ 가꾸기 캠페인을 벌였다. 승리의 정원이란 집 정원에 화초나 관상용 나무를 심는 대신
채소를 재배하거나 과일나무와 같은 유실수를 심자는 운동이다.
고기는 물론 신선한 채소를 비롯한 대부분의 식품은 전쟁물자로 일선에
보내야 했기 때문에 후방에서는 채소를 재배해 식량을 자급자족하자는 것이다. 전쟁에 동참한다는 자부심과 애국심으로 사기를 높이고 또 후방에 남은
국민들의 식탁도 풍성해지기 때문이다. 이때 재배를 적극적으로 장려했던 채소 중 하나가 시금치였다. 이렇게 적극적으로 시금치 재배를 장려하고
시금치 먹기를 권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미국 캘리포니아 주의 시금치 생산량은 전쟁 전에 비해 34%나 증가했다.
그런데 수많은 채소 중에서 왜 이렇게까지 시금치 재배와 식용을 강조했던 것일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시금치는 채소 중에서도
무기질·비타민이 풍부하기 때문인데 20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시금치에 대해 지금 생각하는 것보다 더한 환상을 품고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때에도 병사들에게 시금치가 지급됐다. 특히 프랑스에서는 부상당해 출혈이 심한 병사에게는 시금치 즙을
첨가한 포도주를 제공했다. 시금치에 혈액을 구성하는 철분을 비롯한 무기질과 비타민이 넘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뽀빠이가 왜 하필 시금치 통조림을 먹으면 힘이 솟는지도 궁금해진다. 흔히 시금치 통조림 광고용 만화를 통해 뽀빠이가 유명해졌을 것이라고
짐작하지만 상업적 목적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뽀빠이는 1929년에 처음 등장했는데 이때는 시금치가 아닌 담배를 피우며 힘을
냈다. 그것도 파이프 담배가 아닌 시가가 힘의 원천이었는데 이유가 재미있다. 뽀빠이 원작자의 이름이 시가(Segar)로 자신의 이름과 발음이
비슷한 시가(Cigar)를 피우며 힘을 썼던 것이다. 그러다 아이들 사이에서 뽀빠이의 인기가 높아지고 시금치를 먹으면 천하장사가 되는 것으로
바뀌었다.
뽀빠이는 왜 시금치 통조림을 먹어야 힘이 솟는 것일까? 원작자가 왜 시금치를 선택했는지는 알려진 이유가 없다. 물론
뽀빠이는 만화에서 “시금치는 비타민A의 보고이기 때문에 시금치를 먹으면 튼튼해지고 건강해진다”고 말한다. 하지만 비타민이 풍부한 채소가
시금치뿐만이 아닌데 굳이 시금치를 먹는 이유는 예전 사람들이 시금치에 대해 갖고 있던 인식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먼저 20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시금치에는 철분이 엄청나게 많다고 믿었다. 1870년 에밀 폰 볼프라는 독일의 과학자가 시금치의 성분을 측정하면서 소수점 계산을
잘못 표기해 철분 함량을 10배나 높게 발표했기 때문이다. 이 논문의 오류는 1937년에야 밝혀졌기 때문에 당시 사람들은 시금치에 철분을 비롯한
무기질이 무척 풍부하다고 믿었다. 제1차 세계대전 때 프랑스 육군에서 피를 많이 흘린 부상병에게 시금치 즙을 섞은 포도주를 먹였던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시금치는 사실 동양에서도 아픈 병도 낫게 만드는 채소라고 믿었다. 조선시대 허균의 형 허봉이 쓴 해동야언이라는 책에
“청주에 사는 경징이라는 사람이 부친이 위독한 병에 걸려 돌아가실 지경에 이르렀는데 한겨울에 얼음을 깨 잉어를 잡아 올리고, 눈밭을 헤쳐
시금치를 캐다 드렸더니 아버님의 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정확하게 병이 나은 것이 잉어 때문인지 시금치의 힘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시금치가 몸에 좋다고 믿었던 것은 틀림없다.
예전 중국에서도 시금치는 신선이 되려는 사람이 먹는 채소로
파사채(波斯菜)라고 했는데 페르시아 채소라는 뜻이다. 그만큼 귀했으니 시금치에 대한 환상을 품었을 것이다.
뽀빠이가 시금치
통조림을 먹은 이유,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병사에게 시금치를 많이 먹으라고 장려한 이유는 시금치는 몸에 좋은 채소라는
동서양을 관통하는 믿음에 뿌리를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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