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전쟁이야기

소련군 병사 “총알보다 배고픔이 더 두렵다”

구름위 2017. 1. 13. 2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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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군 병사 “총알보다 배고픔이 더 두렵다”

소시지


핀란드가 소련군 상대로 첫 승 거둔 톨바야르비 전투  뜨겁게 데워져 먹음직한 소시지, 전투의 승패를 좌우

기사사진과 설명

소시지 구이.


 

기사사진과 설명
1939년 핀란드와 옛 소련의 겨울전쟁. 핀란드군의 첫 승리 전쟁이 소시지 전쟁이었다. 필자제공

1939년 핀란드와 옛 소련의 겨울전쟁. 핀란드군의 첫 승리 전쟁이 소시지 전쟁이었다. 필자제공


전투의 승패가 소시지 때문에 갈렸다. 나아가 전쟁의 결과를 바꾸는 실마리가 됐다.

개그 코너의 소재 같지만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이름 하여 소시지 전쟁(the Sausage War)이다. 북유럽의 작은 나라, 핀란드와 옛 소련 사이의 겨울전쟁 때 벌어졌던 일이다.

 겨울전쟁은 1939년 11월 30일, 옛 소련의 120만 대군이 핀란드를 공격하면서 시작된 전쟁이다. 그리고 이듬해인 1940년 3월 13일 끝났는데 겨울 동안 벌인 전쟁이어서 겨울전쟁이라고 하고, 핀란드의 20만 오합지졸 군대가 구소련의 대군을 물리쳤음에도 제2차 세계대전의 다른 전쟁에 파묻혀 주목을 받지 못했기에 잊힌 전쟁이라고도 불린다.

 전쟁 초기에는 구소련이 일주일 이내에 간단하게 핀란드를 점령할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전쟁은 3개월이나 계속됐고 소련은 최소 12만 명 이상 25만 명으로 추정되는 전사자를 낸 채, 약간의 영토를 양도받고 핀란드와 휴전했다. 소련 측 사상자 수는 정확하지 않은 것은 당국에서 발표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반면 핀란드군 전사자는 2만5000명에 지나지 않았고, 전쟁 결과 소련과의 합병을 면하고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다.

 겨울전쟁에서 핀란드가 승기를 잡은 계기가 1939년 12월 12일의 톨바야르비 전투다. 소수의 핀란드 스키부대가 2개 연대 병력의 소련군을 물리친 전투다. 지형지물에 익숙한 핀란드군이 현지 실정을 무시하고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전쟁을 시작한 소련군에 맞서는 전법을 일깨워준 전투로 유명하다. 오합지졸로 평가받던 핀란드군에게 소련을 상대로 싸워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준 첫 번째 승리였다.

 톨바야르비 전투의 시작이 바로 소시지 전쟁이었다. 핀란드군은 12월 10일, 최초로 소련군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다. 그날 밤, 소련군 일개 대대가 빽빽한 숲을 뚫고 핀란드군에 발각되지 않은 채 전선을 돌파했다. 그리고 후방의 핀란드 보급부대를 발견하고 기습공격을 펼쳤다. 소련군의 공격이 시작되자 핀란드 병사들이 혼비백산해 도망치기 바빴는데 소련군이 갑자기 추격을 멈췄다.

 핀란드 보급부대에 쌓인 엄청난 양의 식량을 본 것이다. 때마침 막사 안에는 대형 솥에 소시지가 뜨겁게 데워져 있었다. 막사에 뛰어든 붉은 군대 병사들이 먹음직한 소시지를 보는 순간, 도망치는 핀란드 병사를 버려둔 채 소시지 앞으로 달려들었다.

 당시 소련군은 핀란드의 혹독한 추위에 시달리는 동시에 보급을 제대로 받지 못해 뜨거운 음식을 먹기는커녕 며칠째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었다. 먹을 것을 본 소련군은 장교와 병사 가릴 것 없이 모두 적군을 쫓을 생각도 하지 않고 소시지를 입에 쑤셔 넣기 바빴다.

 잠깐의 시간 동안, 도망치던 핀란드 병사들은 재정비할 시간을 얻어 바로 역습에 나섰다. 약 100명의 병사가 정신없이 소시지를 먹고 있는 소련군을 공격했다. 얼마나 배가 고팠던지 소련군은 역습을 당하는 순간에도 소시지를 씹고 있었다고 전한다. 며칠을 굶은 소련 병사들은 총알보다 배고픔이 더 두려웠던 것이다.

 겨울전쟁 때 있었던 알려지지 않은 전투다. “병사는 잘 먹어야 잘 싸운다(An Army marches on its stomach)”라는 나폴레옹의 말이 실감 나는 대목이다.

 또 다른 소시지 전쟁도 있다. 소시지가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아니지만, 병사들의 사기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제1차 세계대전 중 독일 병사들이 겪은 일이다.

 독일은 소시지의 나라다. 하지만, 독일병사들은 전쟁 중 좋아하는 음식을 먹을 수가 없었다. 원료인 소 창자가 부족했기 때문으로 당시 독일은 물론 독일이 점령한 오스트리아, 폴란드, 프랑스 북부에서도 아예 소시지를 먹지 못하게 했다.

 엉뚱하지만 이유는 비행선 때문이었다. 비행선의 역사는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4년 전인 1910년부터 시작된다. 독일에서 첫 상업비행을 시작했는데 이런 비행선을 전쟁 무기로 처음 이용한 나라는 이탈리아였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독일이 전쟁 기간에 모두 115대의 비행선을 만들어 폭격기와 정찰기로 전선에 투입했다.

 비행선은 공기보다 가벼운 수소를 채워 하늘을 날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자체 무게가 가벼워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비행선 골조는 당시 갓 개발된 알루미늄 합금을 썼지만, 문제는 수소를 담는 가스주머니였다. 가스통의 무게가 초경량이어야 했기에 금속 통 대신 소 창자를 이용했다. 금을 두드려 얇게 펴서 금박을 만드는 것처럼 소 창자를 두드려 얇게 편 후 여기에 수소 가스를 채워 비행선에 싣고 하늘을 날았던 것이다.

 당시 비행선은 최첨단 무기였지만 제1차 세계대전 동안의 활약상은 미미했다. 반면 비행선의 가스주머니를 만드는 데 들어간 소 창자가 무려 소 25만 마리 분량이었다. 독일이 장악한 지역에서 소 창자가 자취를 감췄고 그 때문에 주민은 물론 병사들의 식탁에서 소시지도 사라졌다. 사소한 것 하나가 승패를 좌우하고 사기를 결정짓는다. 소시지 전쟁사가 보여주는 교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