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전쟁이야기

일본, 300년동안 복어 안 먹은 이유는?

구름위 2017. 1. 12. 2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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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300년동안 복어 안 먹은 이유는?

(복어


1592년 조선 침략 위해 시모노세키 항구에 병력 집결

출병 전에 복어 먹고 죽는 병사들 속출해 금식령 내려

 

 

기사사진과 설명
일본 최초의 복어요리점 춘범루, 이곳에서 청일전쟁의 결과로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됐다. 필자제공

일본 최초의 복어요리점 춘범루, 이곳에서 청일전쟁의 결과로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됐다. 필자제공



 

 


 “그렇게 빨리 죽고 싶으면 조선에 건너가서 싸우다 죽어라.”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 전쟁을 일으킨 전범인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노발대발하며 불같이 화를 냈다. 조선을 공격하러 떠나기도 전에 죽는 사무라이와 병사들이 속출했기 때문이다. 이유는 한낱 생선에 지나지 않는 복어 때문이었다.

 임진왜란이 시작된 해인 159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을 침략하기 위해 전국에서 끌어모은 16만 명의 병력을 시모노세키 항구에 집결시켰다.

일본열도 구석구석에서 사무라이들이 병사를 이끌고 이 항구도시로 몰려왔는데 그중에는 바닷가에서 멀리 떨어진 산골출신들도 많았기 때문에 복어에 치명적인 독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이들은 시모노세키에서 맛있는 생선, 복어를 처음으로 먹어봤다. 시모노세키는 지금도 일본에서 복어가 가장 많이 잡히는 지역으로 유명하지만, 임진왜란이 일어날 무렵에도 복어가 많기로 유명했다. 병사들은 값싸고 맛있는 복어를 먹으면서 독이 있는 내장까지도 멋모르고 끓여 먹었다.

 히데요시가 화를 낸 이유 역시 이렇게 함부로 복어를 먹다가 죽는 병사들이 한두 명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전투를 앞두고 병력 손실을 걱정해야 할 정도로 많은 장병이 죽었으니 자칫 조선 출병에 차질이 빚어질 정도였다.

 보고를 받은 히데요시는 마침내 복어 금식령을 내린다. 글자를 모르는 병사를 위해 복어 그림을 그려 넣고 복어를 먹으면 벌한다는 지시사항을 적은 말뚝을 곳곳에 세웠다.

그 덕분에 복어를 잘못 먹고 죽는 사무라이들은 없어졌지만 그로 인해 일본사람들은 무려 300년 동안이나 복어를 제대로 먹을 수 없게 됐다.

 복어 금식령은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도 지속됐다. 전쟁이 잦은 일본에서 자칫 복어를 먹다 사무라이들이 사망하면 전력에 차질이 생길 것을 우려한 영주들이 계속 복어를 먹지 못하게 막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맛있는 음식을 먹으려는 인간의 원초적 욕망을 끝없이 억누르기란 쉽지 않았다. 위로는 영주인 다이묘에서부터 아래로는 하급 무사인 사무라이까지 몰래 복어를 먹다 죽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주슈(長州)라는 곳의 영주가 복어를 먹다가 죽었다. 이 사실을 안 막부에서는 솔선수범을 보여야 할 영주가 복어 금식령을 어겼다는 이유로 하사했던 토지를 모두 몰수했고 녹봉을 다시 거둬들인 것은 물론 자식들을 상류층의 신분을 빼앗아 서민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렇다 보니 사무라이들은 복어 먹는 것을 수치로까지 여겼다. 명분은 자신의 목숨은 주군을 위해 바친 것인데 전쟁터가 아니라 복어를 잘못 먹다가 중독이 돼서 죽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는 것이다.

복어 한번 먹은 벌치고는 가혹하지만, 사무라이들은 복어를 먹으면 안 된다는 자기 합리화의 명분을 만들었다.

 이후에도 일본에서는 끊임없이 복어를 먹지 말라고 다그쳤다. 일본 사람들이 메이지 유신의 정신적 지주라고 말하는 요시다 쇼인(吉田松蔭) 같은 사람은 근대에 이르러서도 복어 식용을 비판하는 글을 썼다.

1882년 일본 정부는 심지어 “복어를 먹으면 구류 또는 벌금형에 처한다”는 법령까지 만들었다. 뒤집어 말하자면 어떤 이유가 됐건 상부에서 아무리 복어를 먹지 말라고 말리고 처벌을 해도 일반인들은 복어를 먹었다는 이야기다.

처음에는 병력 손실을 이유로, 전쟁이 끝난 후에는 국민의 안전을 이유로 복어를 못 먹게 했지만, 맹목적인 금지가 원천적 욕구를 이기지 못했던 것이다.

 임진왜란의 전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내렸던 복어 금식령이 풀린 것은 꼭 300년 후인 1892년으로 안중근 의사의 총에 맞아 죽은 경술국치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에 의해서였다. 일본의 복어 금식과 해금이 모두 우리나라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일본의 초대 총리가 된 이토 히로부미가 시모노세키를 방문했을 때, 춘범루(春帆樓)라는 여관에 머물렀는데 마침 바다에 거센 폭풍우가 불었다.

배들이 며칠 동안 출항을 하지 못해 싱싱한 생선이 떨어졌다. 하는 수 없이 여관 주인이 금지된 생선인 복어를 요리해 총리에게 대접했고, 복어를 맛보고 감탄한 이토 히로부미가 현의 지사에게 요청해 춘범루에서는 특별히 복어를 요리해 팔 수 있도록 조치를 했다고 한다. 일본에서 춘범루를 공식 복어요릿집 1호로 꼽는 이유다.

 참고로 일본 최초의 복어 요리전문점 춘범루가 또 우리나라와 관련이 있다.

조선의 지배권을 놓고 중국과 일본이 싸운 청일 전쟁의 결과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한다.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와 청나라의 리홍장(李鴻章)이 조약을 체결된 장소가 바로 춘범루였다.

청나라는 이 조약에서 조선이 완전한 자주 독립국임을 확인하고, 랴오둥 반도와 타이완, 펑후 섬 등을 일본에 양도했다. 일본이 한반도를 자신의 세력권에 넣을 수 있는 근거를 만든 것이다.

복어 한 마리에 얽힌 우리의 역사이고 동양의 근대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