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전쟁이야기

소화에 도움 되고 부족한 기운 보충

구름위 2017. 1. 12. 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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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화에 도움 되고 부족한 기운 보충

전쟁과 무


기사사진과 설명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패망 직전의 독일은 순무를 먹으며 싸웠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1916~17년의 혹독한 시기를 ‘순무의 겨울(Turnip Winter)’이라고 한다. 필자제공


너무나 흔해서 그렇지 김치, 깍두기의 재료가 되는 무는 건강에도 아주 이로운 식품이다. 그래서 흙에서 나오는 인삼(土人蔘)이라고도 했다. 옛날 중국에서는 무를 수확하는 계절이 되면 의원이 문 닫는다는 말까지 있었을 정도다. 동의보감에도 무는 몸에 이로운 채소로 소화에 도움이 되고 부족한 기운을 보충하는 데 좋다고 나온다.

 한국인의 식단에서 빠져서는 안 되는 채소가 바로 무인데 무는 별명이 많은 채소다. 무의 별명 중 하나가 수절채로 전쟁에 패배하기 직전, 여인들이 의리를 지키려고 무를 먹으며 버텼기에 생긴 애절한 이름이니 우리 행주치마와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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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대전 당시, 패망 직전의 독일은 순무를 먹으며 싸웠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1916~17년의 혹독한 시기를 ‘순무의 겨울(Turnip Winter)’이라고 한다. 
필자제공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패망 직전의 독일은 순무를 먹으며 싸웠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1916~17년의 혹독한 시기를 ‘순무의 겨울(Turnip Winter)’이라고 한다. 필자제공




 흙에서 나오는 인삼이라고도 불려

 

중국 역사를 보면 후한의 시조 광무제가 역적 왕망을 물리치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지만 여전히 반란군이 날뛰고 있었다. 급기야 광무제가 주력부대를 이끌고 토벌을 나간 사이 반란군이 당시 후한의 수도였던 장안(지금의 시안)으로 쳐들어와 궁궐을 포위했다. 그러자 궁궐에 갇혀 있던 궁녀 수천 명이 수비병과 함께 정원에 심어놓은 무뿌리를 캐어 먹고 또 연못에 풀어놓은 잉어와 붕어를 잡아 연명하며 버텼다.

반란군은 결국 돌아온 광무제에게 패해 항복했는데 궁녀들이 반란군의 포위에 굴하지 않고 무를 먹으며 꿋꿋하게 버텼다고 해서 이후 사람들은 무를 수절채(守節蔡)라고 불렀다. 후한서 유분자(劉盆子)전에 나오는 이야기다.

 무를 또 제갈채(諸葛菜)라고도 부른다.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삼국지에 나오는 제갈공명과 관련 있다. 촉한의 유비가 삼고초려해 천하의 인재, 제갈공명을 자신의 군사로 초빙했다. 유비를 도와서 천하를 통일하기로 한 제갈공명이지만 군사라는 직책을 맡으면서 골치를 앓기 시작한다. 군대를 양성하려면 무엇보다 군량을 조달하는 것이 필수 과제인데 마땅한 해결책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제갈공명이 형주성 바깥으로 민심을 살피러 나갔다가 한 농부가 밭에서 푸른 채소를 거두는 것을 봤다.

 “노인장, 지금 어떤 채소를 거두고 있습니까?”

 “무를 수확하고 있습니다.”

 제갈공명이 자세히 보니 무가 바로 보물이나 다름없었다. 뿌리도 먹을 수 있고, 잎사귀도 먹을 수 있으며 또 절여 놓으면 사계절 내내 식용이 가능했다.

 성 안으로 돌아온 제갈공명은 군대에 무를 심도록 명령했다. 황무지를 개간해 무 씨앗을 뿌렸는데 그해 가을 대풍이 들었다. 부대가 다 먹고도 남을 만큼을 수확했기에 백성들에게도 나눠 줬다. 이후 제갈공명은 군사를 일으킬 때마다 새로운 주둔지에 무를 심어 군량에 보태도록 했다. 무는 제갈공명이 군대를 이끌고 움직이는 곳마다 따라가 중국의 남북 여러 지방으로 퍼져 재배하게 됐고 후세 사람들이 무를 퍼트린 제갈공명을 기념하기 위해 ‘제갈채’라고 불렀다고 한다. 민간에서 전해지는 속설로, 중국 전역에 무가 퍼지게 된 배경이다.

 그런데 왜 이런 이야기가 생겼을까? 무가 몸에도 좋고 식량으로도 대체할 수 있는 좋은 채소이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무가 좋기는 좋은가 보다. 전쟁 때 무를 먹으며 싸우고 버틴 것은 굳이 고대 동양의 병사와 시민들뿐만이 아니었다. 서양에서도 양식이 떨어졌을 때는 순무를 먹으며 연명했다.

독일, 1차대전 때 순무 먹으며 연명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독일 민간인들은 사상 유례없는 혹독한 겨울을 보내야 했다. 먹을 것이 없어 밭에서 썩어가는 순무 뿌리를 캐다 먹었다. 그렇기 때문에 유럽에서는 이 시기를 ‘순무의 겨울’(Turnip Winter)라고 부른다. 바로 독일의 패색이 짙어지던 1916년과 1917년 겨울을 일컫는 말이다.

 돌이켜 보면 제1차 세계대전은 독일이 질 수밖에 없었던 전쟁이라고 평가한다. 준비 없이 시작한 전쟁이기 때문이다. 전쟁이 장기간 지속되면서 독일은 식량을 비롯한 각종 군수물자를 조달하는 데 한계에 부딪쳤다. 특히 1916년부터 영국이 바닷가를 철저하게 봉쇄하면서 독일경제는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철강을 비롯해 전쟁에 필요한 원자재는 물론 식료품 수입마저 끊겼다. 그뿐만 아니라 농부와 가축을 징집했으니 전쟁 중에 농사도 제대로 지을 수 없었다.

 독일정부는 전쟁이 일어나자 초기에는 식품 가격을 통제하는 선에서 그쳤지만 나중에는 배급제로 전환했고, 말기에는 아예 배급제도도 유명무실해졌다. 나눠줄 식품이 없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고기 공급의 경우 종전 직전인 1918년 공급량은 전쟁 전에 비해 12%에 불과했고, 생선은 아예 제로 수준이 됐다.

 특히 1916~17년에는 농사를 제대로 짓지 못해 감자 수확량도 크게 줄었고 그나마 가을철 때아닌 비로 농작물 대부분이 밭에서 썩었다. 전쟁터에 나간 병사들에게 지급할 식량도 없었기에 민간인들은 썩은 순무로 연명했다. 이때의 혹독한 겨울을 ‘순무 겨울’이라고 부르는 이유인데 제1차 세계대전 때 굶주림과 영양실조 등에 의한 질병으로 사망한 민간인 수만 74만 명에 이른다. 그러고 보면 역사적으로 전쟁과 무는 불가분의 관계다. 무가 최후의 비상식량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