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무기 이야기

다연장로켓 MLRS

구름위 2017. 1. 8. 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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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연장로켓 MLRS



1991년 걸프전쟁 당시 다국적군에 항복한 이라크 병사들은 포로 심문 과정에서 다음의 두 가지가 가장 무섭고 두려웠다고 진술했다.   첫 번째는 재래식 폭탄을 사용한 미 공군 B-52 폭격기의 융단폭격이었고, 두 번째는 이라크 병사들이 ‘강철의 비’(Steel Rain)라 이름 붙인 다연장로켓 MLRS(사진)의 집중 포격이었다.

광범위한 지역을 일순간에 초토화하는 이들 재래식 공격법은 그 어떤 첨단 무기보다 확실하게 이라크 병사들의 전의를 꺾었다.     다연장로켓 발사 시스템의 약자인 MLRS(Multiple Launch Rocket System)는 12발의 로켓을 단발, 혹은 연발로 발사할 수 있는 포병 무기체계다.

70년대 후반 구소련 지상군의 대규모 파상공세에 맞서 강력한 화력을 투사,     광범위한 지역을 동시에 타격하고 격멸한다는 개념에 의해 개발된 무기체계다.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 광범위하게 사용된 다연장로켓은 가격이 저렴하고 별다른 교육 없이도 병사들이 운용할 수 있으며     화포에 비해 짧은 시간에 광범위한 지역을 제압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반면 정밀한 공격이 불가능하고 복잡한 로켓의 재장전 과정에 오랜 시간이 소요되며 발사 과정에서 발생하는 대규모 화염과 후폭풍으로 적의 관측에 쉽게 노출된다는 문제가 항상 대두돼 왔다.

여기에 동서냉전의 시작과 함께 지상군의 급격한 기갑·자주화로 다연장로켓에 대한 방호 능력이 강화된 반면 다연장로켓 자체의 개량은 더디게 진행됐고     근본적인 문제들은 해결되지 않았다.
결국 정밀 공격이 가능한 지대지 미사일 등장과 함께 대포병 무기 등장은 비유도 다연장로켓의 생존을 위협하며 그 가치를 반감시켰다.       그러나 미소의 전략·전술 핵무기 감축 협약으로 전술 핵 탑재 지대지 미사일의 사용에 제한이 가해지자 그 대안으로 다연장로켓이 주목받고 그 연장선상에서 탄생한 것이 바로 MLRS다.

소수의 인원으로 운용 가능하며 신속한 전개와 발사,    재장전과 함께 목표에 대한 정밀한 공격이 가능한 MLRS의 등장은 다연장로켓이 현대 전장에서도 여전히 치명적인 무기라는 사실을 새삼 확인시키는 계기가 됐다.     가장 기본 무장인 M26 로켓 1발로 반경 200m 지역을 초토화시킬 수 있으며 이론상 MLRS 2대가 일제 사격할 경우 견고한 진지에 포진한 적 포병 1개 중대를 격멸할 수 있다.      여기에 MLRS에서 발사할 수 있는 ATCAMS(Army Tactical Missile System) 같은 강력한 발사체의 등장과 다종 다양한 탄두의 개발은 MLRS의 가치를 더욱 배가시키고 있다.

MLRS에서 발사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인 ATCAMS는 통상 165∼300㎞ 거리에 있는 축구장 2개 크기의 지역을 제압, 가능한 한 원거리에서 최대한 적에게 큰 타격을 줄 수 있다.      말 그대로 적의 머리 위로 강철의 비가 쏟아져 내리는 것이다.      걸프전쟁을 통해 그 위력을 과시한 MLRS는 현재 미 육군을 비롯한 한국·독일·일본 등의 국가에서 핵심 포병 전력으로 운용되고 있다.        지속적인 개량을 통해 그 위력을 배가하고 있는 MLRS는 자주포와 함께 현대 포병의 상징이자 미래 전장의 주요 포병 세력으로 활약할 것이다.

AT-3 대전차미사일

1973년 10월 6일 오후, 이집트군이 전면 침공했다는 급보가 이스라엘군에 전해졌다. 이스라엘군 14기갑여단의 전차들은 수에즈 운하를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갔다.

라시프 대령이 지휘하는 14기갑여단은 소수의 지원 차량을 제외하면     보병 없이 M-48·60 전차 110여 대로만 구성된 순수한 전차부대였다.        제3차 중동전까지의 전훈을 반영, 전차부대의 기동력과 충격력을 최대한 살리기 위한 편제였다.

M-60 전차 10대 정도로 구성된 선도 중대가 도하점에서 3㎞까지 접근할 때까지도    이집트군 진지에서는 어떠한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스라엘군 전차들이 방어선 전방 2000m 정도에 도달했을 때 이집트군의 참호선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하얀 연기들이 불쑥 솟아올랐다.       이어 연기 사이로 몽당연필에 날개를 장착한 것 같은 물체가 나타났다.        참호 속에 매복 중이던 이집트 특공대가 발사한 소련제 대전차미사일, 9M14M 말류츠카(나토명 AT-3·사진)였다.        이스라엘 전차병들로서는 모래 속에 은신한 채 미사일을 날리는 적 특공대를 상대할 이렇다할 방법이 없었다.

방향을 바꾸며 정확히 날아오는 대전차미사일에 전차들이 불타기 시작했고     소수의 경험 많은 장교들이 이를 회피하기 위해 돌격을 명령했지만     그들을 기다리던 것은 RPG-7 대전차로켓 세례였다.   불과 30여 분의 전투로 14기갑여단의 전차 80여 대가 격파됐다.       비록 살아남은 일부 전차들이 공을 세웠다지만 14기갑여단은 10월 6일 당일에 붕괴됐고 인접 부대인 401기갑여단이나 460기갑여단 예하 전차들의 운명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완전 편제의 기갑사단이 무게 11㎏, 길이 1m도 안 되는 9M14M 말류츠카 대전차미사일과 RPG-7로 무장한 보병들에게 완패한 것이다.

욤 키푸르 전투에서 정예기갑부대가 고작 이틀간의 싸움에서 200여 대의 전차를 잃고 전투력을 완전히 상실했다.       최정예 부대로 명성을 날리던 이스라엘 기갑부대가 참혹하게 무너지자 전차 무용론이 대두될 정도로 전 세계에 큰 충격을 줬다.       이런 대전차유도미사일의 뿌리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루르슈탈사가 만든 X-7 로트케펜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X-7은 유선유도식대공미사일 X-4를 기반으로 만든 대전차미사일로 사거리 1000m에 2.5㎏의 탄두로 200㎜의 장갑을 관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우수한 성능에도 불구하고 다른 독일제 병기와 마찬가지로 제대로 대량 운용되지도 못한 채 종전으로 폐기된다.

대전차미사일 X-7에 흥미를 느낀 프랑스와 소련은 이를 계승, 개발 계획을 이어 갔다.       소련은 3M6 쉬멜(나토명 AT-1), 3M11 쁠리따(AT-2)를 연이어 개발했다.       중동전에서 충격적으로 등장한 9M14M 말류츠카도 X-7의 손자뻘되는 무기였다. 하지만 대전차미사일의 전성시대는 오래가지 않았다.      욤 키푸르 전투로 대두된 전차무용론은 복합장갑을 장비한 3세대 전차의 출현으로 사그라들었다.      오늘날 보병용 대전차미사일은 그 발전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70년대 초반처럼 전차를 압도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도 대전차미사일은 보병부대를 위한 가장 든든한 대전차 수단으로서 전장에서 한몫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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