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무기 이야기

MiG-15 전투기

구름위 2017. 1. 8. 1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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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G-15 전투기

 


1950년 11월 1일 압록강 지역을 초계비행하고 있던 미 공군의 F-51D 전투기 편대는 은빛 기체에 커다란 붉은색 별이 그려진 제트 전투기의 공격을 받고 혼비백산한다.

미 공군 전투기들에 일격을 가하고 순식간에 북쪽 하늘 너머로 사라져 버린 이 제트 전투기의 정체는 바로 소련이 비밀리에 중공에 제공한 MiG-15(사진)였다. MiG-15는 뛰어난 상승 능력과 중고도 이상에서의 고기동성, 그리고 대형 폭격기조차도 단 일격에 격파할 수 있는 37㎜ 기관포를 장착, 당시 한반도에 배치된 모든 유엔군 전투기의 성능을 압도했다.

그러나 11월 7일 한반도 북단 신의주 상공에서 세계 최초의 제트 전투기 간 공중전이 벌어졌을 때 그 결과는 MiG-15의 판정패였다. 이후 10여 일 동안 소련의 비밀병기 MiG-15는 총 다섯 대가 격추됐다. 기체 성능은 MiG-15가 압도적으로 우월했지만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 이후 급조된 중공군 조종사들의 실력은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전투기의 성능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중공군 사령부의 잘못된 작전과 소련의 간섭도 악재로 작용했다.

이후 소련의 전폭적인 군사 지원으로 만주와 북한 지역에 MiG-15가 대량으로 배치되고 소련군 베테랑 조종사들이 전투에 참가하기 시작하면서 전세는 역전되기 시작했다. 중공군 조종사들도 점차 MiG-15에 적응하기 시작했고 기체 성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공중전 전술도 개발해 냈다. 그러나 미 공군이 최신예 F-86 전투기를 긴급 배치하면서 상황은 다시 반전된다.

사실 MiG-15의 원형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이 심혈을 기울여 개발한 제트 전투기 Me1101이다. 종전 후 독일을 점령한 소련은 거의 완성 단계에 있던 Me1101의 뛰어난 완성도에 주목했고 그 기술을 강탈해 MiG-15 개발에 최대한 활용했다. 몇 가지 기술적 문제가 있었지만 당시 우방 관계에 있던 영국에서 제트 엔진 기술을 도입하고 스탈린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으면서 순조롭게 개발이 진행, 47년 6월 2일 처녀 비행에 성공했다. 48년부터는 양산이 시작됐고 49년 초에는 모스크바 주변 핵심 방공부대를 중심으로 실전 배치됐다.

한국전쟁 기간 공산군은 MiG-15와 개량형인 MiG-15bis를 운용했다. 방공 요격 전투기로 설계된 만큼 F-86을 비롯한 유엔 공군 전투기에 비해 기체가 작고 중량이 가벼웠다. 때문에 F-86을 포함한 유엔 공군 전투기에 비해 기동성과 상승 성능이 우수했고 특히 최대 상승고도가 더 높아 고공에서 급강하하며 기습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항공전자장비와 조준 장치, 기체의 전체적인 완성도와 신뢰성 부분에서는 상당히 뒤떨어졌다. 급선회시 실속에 빠지기 쉽고 스핀 회복이 어려운 것 등 비행 안정성에도 크고 작은 문제가 있어 베테랑 조종사가 아니면 조종하기 힘들었다.

유엔 공군에 대한 MiG-15의 우위는 F-86이 한반도에 배치되면서 곧 깨졌지만 전쟁 기간 동안 공산군의 핵심 공중 전력으로 활약했다. 여러 가지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MiG-15의 등장은 한국전쟁과 이후 벌어진 공중전의 양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또 이후 소련의 전투기 개발에 하나의 이정표가 됐다.

F-111 아드바크

전쟁을 통해 수많은 무기가 등장하고 사라지지만 그중에서 미 공군의 F-111 아드바크(Aardvark·사진)는 특이한 존재다. 무기체계의 성능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 실전 배치와 동시에 전쟁에 사용된 몇 안 되는 현대 무기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특히 베트남전쟁이 한창이던 1968년 실전에 투입돼 91년 걸프전쟁을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완전히 퇴역했는데 이처럼 전쟁을 통해 등장하고 전쟁을 끝으로 퇴역한 무기는 F-111이 유일하다.

최초 완성기가 모습을 드러냈을 때 미 공군 관계자들은 F-111에 대해 대단한 만족감을 표시했다. 총 중량이 36톤(최대 45톤)에 전투기라고 부르기에는 민망할 정도의 대형기가 돼 버렸지만 미 공군의 까다로운 작전 요구 성능을 완벽히 충족했고, F-111의 특기인 장거리 침투 공격 능력은 이러한 단점을 상쇄하고도 남았다.

특히 세계 최초의 실용 가변익 전투폭격기라는 점도 크게 작용했다. 완성된 F-111은 핵무기를 포함한 다종 다양한 폭탄을 장착하고 60m 이하의 초저고도를 고속으로 비행, 장거리 목표를 타격할 수 있었다.

F-111의 성능에 크게 만족한 미 공군은 실전 배치와 동시에 베트남전쟁 작전 투입을 결정했다. 그러나 F-111의 최초 실전 참가 성적은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최첨단 무기로 주목받으며 화려하게 등장했지만 겨우 55회의 출격 임무만 수행하고 본토로 소환된 F-111은 명성에 걸맞지 않은 졸전(?)으로 미 공군에서 퇴출될 위기까지 몰리게 된다. 그러나 미 공군은 F-111을 퇴출시키는 대신 개발 당시 발견되지 않았던 문제점들을 하나씩 개선하고 운용 전술을 보완하면서 명예회복의 기회를 노렸다.

4년이라는 시간 동안 기체의 성능과 장단점을 철저히 다시 파악한 미 공군은 72년 F-111의 실전 투입을 재개한다. 그리고 동년 9월부터 작전에 투입된 제474전술전투비행단 소속 F-111A 2개 비행대는 이러한 기대에 부응하듯 이듬해 3월까지 4000회가 넘는 출격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이 작전 기간 중 기체 손실은 단 7대에 불과했다.베트남전쟁 당시 작전에 투입됐던 F-105나 F-4 등의 전투기에 비해 F-111은 높은 귀환율과 함께 월등히 우수한 폭탄 탑재력, 정밀 폭격 능력과 90% 이상의 폭격 명중률을 자랑했다.

특히 지원기가 불필요한 단독 작전 능력 등은 F-111의 능력을 돋보이게 하기에 충분했다. 영원한 퇴출이냐 화려한 부활이냐는 위기 상황에서 F-111은 화려한 부활에 성공했다. 이후 F-111은 리비아 공습 작전인 엘도라도 협곡 작전에서 편도 5000㎞ 이상의 거리를 비행, 주요 목표를 정밀 타격함으로써 장거리 폭격 능력과 침공 능력을 다시 한번 과시했고 퇴역 직전인 걸프전쟁 당시에도 총 2417회의 출격을 통해 이라크군의 주요 군사 시설을 타격했다.

만약 최초 실전 투입 결과에 실망한 미 공군 수뇌부가 F-111의 퇴출을 결정했다면 이후 F-111이 거둔 승리와 영광은 결코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F-111은 퇴역하기 전까지 전투기 외형을 가진 미 공군 최후의 전투폭격기이자 핵심 전폭기 전력으로 운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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