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4/10 16

21.노비와 여자 문제로 인한 모함

노비와 여자 문제로 인한 모함 위의 사건들은 대부분 왕조에 대한 원한 때문이지만 그보다 더 많은 것은 개인끼리 무고였다. 지방 수령을 하급 관헌이 무고한 사건도 줄을 이었고 그와 같은 혐의로 평안도 서북면 도순무사 최윤지를 모해한 전 낭장 김영수가 목이 잘렸다. "윤지 부자가 역적모의를 하고 있다." 라고 모함했기 때문이다. 일벌백계로 김영수의 사지를 찢어서 각도에 돌렸지만 그 뒤로도 이런 무명장이 끊임없이 나타났다. 노비와 여자 문제로 들어오는 무명장도 많았다. 1398년 태조 7년 전 관원 김귀생이 익명서를 만들어 전 현령 이적이 반란을 꾀한다고 무고하였다가, 일이 발각되어 사지를 찟어서 조리돌렸다. 그 사건의 발단은 김귀생이 이적과 노비를 가지고 심히 다툰 일 때문이었다. 범인을 잡으려고 이적을 불..

20.그렇게도 많았던 투서와 모함

그렇게도 많았던 투서와 모함 무기명 투서를 제보한 판관을 파직하라 대부분의 학자들은 우리 민족성이 나쁜 점을 거론할 때 그 원인을 항상 일제나 군부독재 시절의 영향이라고 강변한다. 정말 그럴까? 우리나라는 지금 연간 고소고발 건수가 세계 최고이다. 근래 몇 년의 평균치만 해도 연간 40만~50만 건 내외에 달한다. 인구 1만 명당 80건 정도인데 일본은 1만 명당 평균 1.3건이다. 우리나라는 사기 사건도 세계 최고다. 자동차 사고, 자살률도 마찬가지다. 왜 이렇게 부끄러운 나라가 됐을까? 이것이 일제나 군부독재 탓인가? 아니다. 배고픈 건 참아도 배 아픈 건 못 참는 게 우리 국민의 특징이다. 일종의 민족 성향 때문이다. 조선에서 횡행한 것 중 하나가 바로 '무기명 투서'였다. 무기명 투서를 조선에서는..

19.서얼이란?

서얼이란? 서얼(庶孼)은 양반의 자손 가운데 첩이 낳은 자손을 말하는 것으로, 양인 첩이 낳은 서자(庶子)와 천인 첩이 낳은 얼자(孼子)를 함께 이르는 말이다. 또한 서얼의 자손도 서얼로 불렸다. 서얼은 양반의 신분에 속했으나 가정에서 천한 대우를 받았으며 상속권(相續權)도 없었다. 조선 시대에는 대부분이 혈통이나 결혼으로 인한 인척 관계로 출세가 규정되었다. 서얼에 한해서 문과의 응시 자격을 주지 않았고 무과에 한해서 허용하였으며, 이도 또한 대부분이 실직(實職)이 아닌 벼슬을 주었다. 이것은 귀천의식(貴賤意識), 유교의 적서(嫡庶)에 대한 명분론에서 나온 것으로 고려나 당나라·명나라에서도 없던 제도이다. 서얼은 수가 많고 사회적으로도 큰 문제가 되어 선조 때에는 서얼의 차별을 잠시 완화하여 음관(蔭官..

18.첩만 거느릴 뿐 자식은 나몰라라 -서자들의 잦은 반란-

첩만 거느릴 뿐 자식은 나몰라라 -서자들의 잦은 반란- 관직 진출은 물론 재산 상속권도 없어 조선의 왕 중에서 여자를 가장 많이 거느린 왕은 태종이다. 이때부터 왕은 후궁이라는 명칭으로 여자를 들이기 시작했는데 가장 많이 거느린 순서를 보면 태종-성종-세종-선조-영조가 된다. 연산군도 비등하다. 태종은 원경왕후 민씨 외에 16명의 후궁을 두었다. 세종은 그 명성과는 달리 왕후 외에 11명의 후궁이 있다. 성종도 계비와 후궁을 포함하여 12명. 성종, 선조, 영조 모두 10명 언저리지만 물론 이 숫자들은 정확한 것이 아니다. 남아 있는 기록으로 헤아린 것인데 에 기재되지 않은 경우도 많아서 정확한 수는 알기가 어렵다. 은 왕실 족보이며 자손이 있어야 거기 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왕들은 이렇게 많..

17.영창대군 역모 사건에 희생된 자만 천여 명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과는 거리가 먼 잔혹한 형벌제도 영창대군 역모 사건에 희생된 자만 천여 명 1613년 광해군 5년 영창대군 역모사건 당시 친국 모습을 액면 그대로 재현해본다. 4월 25일, 왕이 서청에 나아가 친국하였다. 참석 대신 전원이 배석하고 왕이 나와 앉은 가운데 비변사낭청이 소리 높여 조인의 범죄 사실과 죄인들의 성명, 전력을 읽었다. 영의정 이덕형, 좌의정 이항복, 의금부판사 박승종, 대사간 이지완, 형방승지 권진, 그리고 뒷전으로 전 대사헌 이이첨 등이 입시했다. 여강가에서 강도질을 하던 서자의 자식들이 잡혀왔고 그들의 입에서 영창대군을 새 왕으로 추대하려 하였다는 자백이 나오자 가족 전부와 내왕이 있었던 사람들이 남여노소 가리지 않고 체포되어 친국장으로 끌려 나왔다. 여자인 선이는 나이..

16.임경업 장군, 국문 두번 만에 매 맞고 숨져

임경업 장군, 국문 두번 만에 매 맞고 숨져 동학교도들의 경우 이런 처형을 가장 많이 당했고 한말의 개화주의자 김옥균도 이런 육시형을 받았다. 이 당시는 수레로 끌어당기는 것이 아니고 망나니들이 칼로 몸을 토막내던 시대였는데 영국의 화가이자 여행가인 아널드 랜도어는 그 장면을 목격하고 그림으로 남겼다. 망나니들이 기술이 서툴러 목을 먼저 잘라야 하는데 어깨가 잘리는 등 중국보다도 더 처참한 광경이었다고 썼다. 잘라진 다리나 팔 등은 거지가 주워서 끌고 다니면서 협박식 구걸행위로 동냥을 했다. 동학군 지도자 김개남의 목이 잘린 채 장대에 묶여 허공에 매달려 있는데 그 아래서 아이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놀고 있는 사진이 공개되어 있다. 며칠 후 비로소 이런 잔혹한 형벌은 중단해야 한다면서 중지령이 관보에 게재..

15.서울 한복판에서 능지처참형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과는 거리가 먼 잔혹한 형벌제도 서울 한복판에서 능지처참형 "너는 금부의 국문이 얼마나 무섭다는 것을 아느냐?" 그 말 한 마디에 박 치의의 몸은 부들부들 떨렸다. "금부에서 국문이 시작되면 역모나 강도사건의 범인은 먼저 곤장을 쳐서 반죽음을 만든 다음 주리를 트는 것으로 이어진다. 두 다리를 한데 묶고 그 사이에 두 개의 주릿대를 넣어 비트는 방식이다. 그다음에는 커다란 태로 사정없이 등을 두들기는 태배형이 이어지고 그다음에는 판자 위에 날카로운 사기조각을 얹고 그 위에 무릎을 끓게 한 다음 다시 그 위에 판자를 깔아 무거운 바위덩어리를 올려 굴리다가 다시 나장 여러 명이 올라가 흔들어 대는 압슬형, 나중에는 죄인을 여러 명 묶어 놓고 여러 명이 장으로 아무 곳이나 마구 때리는 난장..

14.정조 암살미수사건(1777년)

정조 암살미수사건(1777년) 즉위하기 전에 정순왕후와 숙의 문씨 등의 왕실세력과 홍인한.정후겸 등의 척신 세력으로부터 여러 차례 곤란을 겪었던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이들에 대한 정치적 탄압을 감행하였다. 홍인한과 정후겸을 귀양보내고, 문숙의의 착호를 삭탈하고 사저로 쫓아냈다. 그리고 문숙의의 동생 문성국과 그의 어미를 노비로 만들었다. 대비인 정순왕후를 직접 공격하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동생 김구주 일파를 숙청하였다. 뿐만 아니라 척신들과 결탁하여 부당하게 정치에 끼어든 환관들도 대대적으로 개편하였다. 정조의 이러한 조치는 그와 반대편에 있었던 여러 사람들을 긴장하게 하였다. 사도세자를 죽이는데 가담하고 세손으로 있던 정조를 핍박했던 이들은 특히 그러하였다. 이들로서는 무엇인가 특단의 조치를 취하지 않으..

13.끊임없이 이어진 역모와 반역

인조반정(1623년) 1623년(인조 1년) 서인 일파가 광해군 및 대북파를 몰아내고 능양군 종(후의 인조)을 왕으로 옹립한 사건이다. 선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당론의 폐해를 통감하고 이를 초월하여 좋은 정치를 해보려고 애썼으나, 자신이 대북파의 도움을 받아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당론을 초월할 수 없었다. 처음에는 이원익·이항복·이덕형 등 명망 높은 인사를 조정의 요직에 앉혀 어진 정치를 행하려 하였으나, 이이첨·정인홍 등 대북파의 무고로 친형 임해군과 이모제 영창대군을 죽였으며, 또 계모인 인목대비를 유폐하는 패륜을 자행하였다. 이와 같이 광해군의 실정이 계속되어 기강이 문란해지자 서인 이귀 · 김자점 · 김류 · 이괄 등은 반정을 모의, 1623년 3월 21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모든 계..

12.조선의 대표적인 반역, 반정을 살펴보면 대략 아래와 같다.

이징옥의 난(1453년) 이징옥(?∼1453)의 본관은 양산으로, 중추원지사 전생의 아들이다. 어렸을 때 호랑이를 산 채로 잡았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용감하였다. 세종 초에는 김종서를 따라 북변에 종군하여 1424년에는 경원진 첨절제사가 되어 여진족의 침입을 격퇴하였다. 1436년 회령부판사로서 여진족의 추장을 살해하였으며, 이 해 경흥도호부판사에 올랐다. 1449년 중추원지사로 승진하였으며, 1450년 세종 때 북방 6진 개척에 크게 공헌했다 하여 김종서의 후임으로 함길도 도절제사가 되었다. 그런데 1453년 정권을 획득한 세조가 이징옥이 김종서계의 인물임을 꺼려서 이징옥을 파직하고 그 후임에 박호문을 임명, 함길도에 보냈다. 이징옥은 박호문에게 자리를 인계하고 호위병력 약간을 거느리고 서울로 가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