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무기 이야기

소련군의 저격전

구름위 2017. 1. 7. 2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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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군의 저격전

저지선 전방에 은폐 진지 구축 적 유도
2008. 05. 06   00:00 입력 | 2013. 01. 05   03:47 수정


핀란드의 전설적인 스나이퍼인 시모 하이하는 저격수들의 우상이었다. 1998년, 핀란드에서는 전쟁영웅이며 500~600명의 적을 사살해 세계 최고의 개인 살인기록을 세운 하이하와 인터뷰를 하며 그의 악몽 같은 과거를 떠올렸다.

“어떻게 그런 명사수가 될 수 있었습니까?”
“연습했습니다.”
“그러면 그런 끔찍한 기록은 어떻게 달성했습니까?”
“명령에 따랐을 뿐입니다.”

노쇠한 하이하는 2002년 4월 1일 아침에 97세의 일기로 숨을 거뒀다. 그가 남긴 전장의 유언은 저격수의 세계를 한마디로 대변하는 필승의 철학이었고 스나이퍼들에게 생존의 지혜를 심어 주는 진리였다. 핀란드와의 겨울전쟁에서 겪은 피의 교훈은 소련 붉은 군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과거 나폴레옹을 물리친 교만함이 그들을 죽음으로 내몰았고 결국 핀란드의 시골뜨기 저격수한테 그 대가를 지불하고 만 것이다.소련군들의 군사력은 세계대전을 통해 새롭게 건설됐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소련군 스나이퍼의 보병용 소총은 노리쇠 작동식으로, 7.62mm 모델 1891/30 모신-나강(Mosin-Nagant)으로서 저격용으로 정밀도를 높였고 망원 조준경이 부착됐다.

이 튼튼한 무기는 러시아의 혹독한 기후를 잘 견딜 수 있었고 소련과 독일 저격수 모두에게 인기가 있었으며 독일의 저격수들은 많은 노획품을 사용했다. 이 총은 전쟁 동안 최전선의 부대에서 사용됐을 뿐만 아니라 후일 한국전쟁, 베트남 전쟁 때까지 소련군이 지원하는 게릴라들이 저격용으로 사용했다.

소련 정부는 이미 1930년대에 제쓰(Zeiss) 광학 회사에서 4배율 PE망원 조준경을 대량으로 생산했다. 또 이 망원 조준경을 장착할 수 있는 5만4000정의 M1891/30 모신 나강총을 생산했다. 소련군은 세계대전이 벌어지자 더 가벼운 3.5배율 PU 조준경을 기존 PE 모델과 함께 군대에 편제했다.

한편, 보병의 화력을 증강하기 위해 소련군은 두 가지의 반자동식 소총, 즉 토카레프(Tokarev) 모델 1938과 1940을 도입했다. 이 소총은 둘 다 망원 조준 스코프를 부착할 수 있도록 제조했고 일부 저격수들에게 지급됐다. 이 총은 후일 반자동식 무기 설계용으로 독일 소총 제조업자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었다.

전쟁하는 동안 소련 붉은군대는 핀란드 하이하의 저격술을 발전시켰다. 그것은 공산 혁명정신으로 무장된 일격필살의 신념과 사상이었다. 모신 나강 소총의 우수함과 스나이퍼들의 정신력과 함께 저격수 역할에 대한 인식이 서구보다 더 폭이 넓었고, 전문적인 저격기술을 완전히 통합한 보병전술의 한 부분으로 발전시켰다.

소련군의 스나이퍼들은 보통 한 팀으로 움직였고, 행동에서 상당한 자유가 주어졌다. 때로는 초보적인 전술임무를 수행하면서 중대와 소대로부터 직접 명령을 받았다. 저격수들의 능력을 과도하게 운용하는 경향도 있었지만 통상적으로 대부분의 저격수들은 일반적인 전술적 상황에서 소부대 지휘자로서의 역할도 수행할 수 있었다.

이것은 저격전 위주로 전투를 수행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1941~1942년에 독일군의 집중공세로 말미암아 붉은군대는 후퇴하지 않으면 안 됐다. 전투할 때 소련군 저격수들이 대량으로 전선에 투입돼 거대한 독일국방군의 진격을 지연시키기 위해 힘썼다.

소련군 저격수들은 저지선 전방에 은폐된 진지를 구축한 다음 적 정찰병, 장교, 그리고 독일군 포격을 유도하는 포병 관측수들에게 사격을 가했다. 이러한 전술은 당연히 저격수들의 많은 희생이 뒤따랐다. 그러나 당시 소련군 모로조프 중장은 이러한 효율적인 방어 저격전에 대해 좋은 사례를 제시했다.

“중대장 스테파노프 중위는 저격수 3개 팀을 전방 방어선으로 나가 진지를 잡도록 했다. 그들은 적의 선두가 어느 선에 도달하면 본대로 철수해야 한다는 지시를 받았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자 드디어 독일군 정찰병들이 나타났다. 지형지물을 이용하면서 그들은 중대의 방어선으로 다가왔다.

저격수들은 그들이 옥수수 밭을 빠져 나올 때까지 기다린 다음, 200m 거리에서 일제히 사격을 개시했다. ‘탕! 탕! 타-탕!’ 이것은 기습이었다. 장교를 포함해 대부분의 정찰병들이 쓰러졌다. 그러자 당황한 독일군들은 기관총을 투입했고 저격수들이 이를 저지하는 데 30분이 걸렸다.

독일군들은 분명히 우리 저격수들이 포진하고 있는 위치를 전방 방어선이라고 오판한 것 같았고 그곳에 포병 사격을 집중했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저격수들이 철수한 뒤였고 독일군의 포격은 헛된 것이었다.결국 독일군의 전진은 실패했고 즉시 역습을 개시한 소련군 대대가 그들을 격퇴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