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로우주센터는 10년 동안 한국과 러시아의 첩보 전쟁터였다
입력 : 2015.04.02 08:05 | 수정 : 2015.04.02 10:45
정병선 디지털뉴스본부 차장
E-mail : bschung@chosun.com</dt>
“한국은 러시아가 수십년 동안 개발해 얻은 발사체 개발 기술을 10년 만에 확보했을 것이다.”
나로호 개발에 참여한 러시아 연구원 예브게니 부킨(46·가명)은 “한국에는 10년 전 발사체 액체 로켓엔진을 이해하는 자가 한 명도 없을 정도로 ‘나비쵸크(초보자)’였다”며 “당시 한국 기술진은 초등학생 수준이었지만 지금은 우리가 경계할 수준이 됐다”고 놀라워했다.
그는 “1·2차 나로호 발사가 실패하자 러시아 엔지니어들 사이에는 ‘한국이 러시아의 발사체 기술을 확보하려고 의도적으로 실패로 몰아갔다’는 말이 나돌았다”며 “항공우주연구원(항우연) 측이 제작한 2단 로켓이 시험발사 때는 한차례도 실패한 적 없는데 유일하게 발사 당일 문제가 발생했기 때문이었다”고 했다.
2013년 1월 30일 오후 4시 전남 고흥군 나로우주센터에서 발사된 우주로켓 나로호가 불꽃을 뿜으며 하늘로 올라가고 있다. 나로호는 2009년, 2010년 두 차례 실패 후 이날 세 번째 도전에서 성공했다. 우리나라 최초 우주발사체 나로호(KSLV-1)가 30일 고흥우주센터 발사대에서 우주를 향해 힘차게 비행하고 있다. 항우연제공
한국 측은 러시아 측 주장에 반발했다. 한영민 한국형 발사체 추진시험팀장은 “러시아는 우리가 2단 로켓의 페어링(로켓 덮개) 분리 실험을 진공상태에서 하지 않은 것을 문제 삼은 것”이라고 했다. 지난 10년 동안 한국과 러시아 연구진들 간의 설전은 이래저래 끊임없이 전개돼왔다.
전남 고흥 외나로도 나로우주센터는 총성 없는 전장(戰場)이었다. 특히, 2층 발사체 조립장은 나로호 발사 당시 발사체를 조립했던 곳으로 출입통제가 가장 심했던 보안구역이었다. 이곳은 러시아 보안 요원들이 상주하면서 최후의 순간까지 감시를 늦추지 않았던 곳이다. 24시간 감시카메라가 작동했다. 러시아에서 반입한 장비 일체에 대한 감시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1-2차 나로호 발사 실패로 양국 여론이 악화되면서 한국과 러시아 발사팀들은 긴장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항우연제공
러시아 보안요원 드미트리 포노마료프(55·가명)는 “나로호 발사 이후에도 철수 때까지 감시망을 소홀히 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동료 엘례나 표도로바(53·가명)와 2인 1조로 발사대 주변과 발사통제센터, 발사체 조립장 내 러시아 장비들이 있는 모든 보안구역을 대형 모니터를 통해 스크린했다.
러시아는 나로호 발사 때까지 지나칠 정도로 엄격한 규정을 내세우면서 러시아 엔지니어와 한국 항우연 직원들과의 사소한 접촉마저 차단했었다. 러시아 엔지니어들이 한국 엔지니어들과 조금만 밀착해 대화를 나누는 듯하면 어디선가 나타나 제지했다. 발사체 조립장은 물론 식당, 회의장 등 러시아인들의 움직이는 동선에서는 예외가 없었다. 대화 채널은 발사체 제작사 흐루니체프의 프로젝트 매니저인 콘스탄틴 샤이비치로 일원화했다.
러시아 측은 나로호 모형 주위로 러시아로 철수할 물품들을 봉인한 채 선적 순위를 매겼다. 정병선 기자
나로우주센터는 러시아인들이 철수하기까지 한국이 아닌 러시아의 우주센터를 방불케 했다. 지난 2013년 1월 30일 나로호 발사를 전후로 러시아에서 온 연구원과 엔지니어는 200명이 넘어설 정도였다. 당시 블라디미르 포포프킨 러시아 연방우주청(로스코스모스) 청장을 비롯한 우주사업 핵심 요인들도 총출동했었다.
부킨은 “나로호 발사 과정에서 한국은 러시아가 제작한 1단 액체 로켓엔진 기술이 최대 관심사였다”며 “러시아 엔진 제작사 에네르고마쉬가 만든 RD-151엔진은 한국이 반드시 보유해야 하는 최첨단 기술의 복합체였다”고 했다.
이 엔진은 170t으로 140t의 나로호를 196㎞ 상공까지 쏘아 올리는 강력한 것이었다. 액체상태 연료와 산화제를 분사한 뒤 혼합시켜 연소시킬 때 나오는 추진력의 비결을 알면 한국도 당장 발사체 개발 성공을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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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보안요원들의 24시간 밀착 감시가 진행됐던 발사체종합조립동. 정병선 기자
이런 이유로 러시아 측은 엔진 작업하는 날엔 어느 때보다 감시를 철저히 했다. 긴장감이 넘쳤다. 한국 연구원들이 엔진에 대한 질문을 하면 러시아 연구원들은 하나같이 “나는 너를 믿는데 너는 나를 믿지 않는다”며 답했다. “물어보면 답을 할 수 없다는 것을 뻔히 알고도 질문을 하면 곤란하지 않으냐”는 의미였다.
한국과 러시아 연구원들은 서로 알고 지내면서도 우주센터에서는 보이지 않는 팽팽히 긴장감을 유지해야 했다. 그 와중에서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보이지 않는 정보전이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나로호 발사 이후 러시아로 반입할 물품을 24시간 감시하는 최후의 감시자.정병선 기자
항우연 한국형 발사체 개발사업단 서견수 책임연구원은 “한국은 나로호 후속작인 75t급 한국형 발사체(KLSV-2)의 설계와 액체 로켓엔진 기술을 나로호 발사를 통해 확보한 것이나 다름없다”며 “러시아와의 나로호 공동 제작을 하면서 KLSV-2에 대한 선행연구를 해왔다”고 말했다. 그는 “러시아도 한국의 집요한 발사체 개발 의지에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고 말했다.
러시아는 ‘미사일통제시스템(MTCR)’과 ‘우주기술보호협정(TSA)’ 등 국제 규정 때문에 로켓 기술 유출이 불가능했지만 한국으로서는 러시아 측의 조립·시험 과정을 하나라도 눈으로 보기 위해 노력할 수밖에 없었다. 러시아와 한국의 연구원들은 모두 “나로우주센터는 어찌 보면 지난 10년 동안 한국과 러시아의 첩보 전쟁터였다”며 “정보를 주지 않으려는 러시아와 정보를 입수하려는 한국의 치열한 기 싸움이 24시간 펼쳐진 현장이었다”고 했다.
당초 러시아 발사팀은 2009년 나로호 1차 발사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고 서둘러 한국에서 철수하려고 했다. 나로호 발사 계약 당시 발사 실패 때 러시아 측이 부담금(계약금의 5%인 1050만달러)을 내게 돼 있어 1차 발사에 사활을 걸어야 했다. 하지만 3차까지 발사가 이어지면서 4년 동안 한국에 추가 체류하며 엄청난 손실을 보았다.
러시아 연구원들은 나로호 발사가 성공하자 “후련하다”는 입장을 보이면서도 향후 한국과의 협력에 기대감을 나타내기도 했었다.
러시아 측의 모니터링실. 항상 봉인하면서 보안에 만전을 기한 흔적이 남아있다. 정병선 기자
러시아 전문가들은 “지난 10년 동안 한국은 러시아 발사체 기술을 날로 먹은 것이나 마찬가지다”며 “러시아가 직접 기술 이전은 하지 않았지만 전 작업 과정을 눈으로만 봐도 기술이전 효과를 충분히 누렸을 것”이라고 했다. 이철형 전 항우연 나로우주센터장도 “1차 발사에 성공했으면 좋았겠지만 두 차례 발사 실패로 오히려 러시아로부터 더 많은 기술 접촉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며 러시아 측의 주장을 부인하지 않았다.
러시아 엔지니어들과 나로호 제작에 나서면서 나로호에 관련된 설계 시스템 제작, 2만5000쪽에 이르는 시험평가 자료를 접하면서 한국형 로켓을 개발할 수 있는 기반을 확보했다는 것이다.
러시아로 반입직전 봉인된 궤짝들. 정병선 기자
항우연 팀들은 국가프로젝트를 위해 사활을 걸었다.
서견수 책임연구원은 “처음에는 러시아 로켓제작사 후르니체프, 엔진제작사 에네르고마쉬, 지상발사대 개발 설계국 모두가 일사불란하게 한국에 설계도조차 보여주지 않을 정도였다”며 “하지만 1·2차 나로호 발사 실패가 오히려 우리에게는 러시아의 설계 개발 검증 시스템과 기술을 접할 수 있는 더할 나위 없는 기회로 작용했다”고 말했다.
나로우주센터는 지난 10년 동안 약 1000여명에 이르는 러시아인이 다녀갔을 정도로 북적였다. 이 때문에 우주센터가 위치한 고흥의 호텔과 모텔 모두 러시아인 차지였고 동네 가게에서도 보드카를 팔 정도로 흥청했다. ‘말렌카야 라시야(미니 러시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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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종이 기록을 파쇄한 뒤 폐기 직전의 모습. 정병선 기자
나로호 발사를 위해 파견된 러시아 엔지니어들과 장비는 2013년 완전히 철수한다. 그해 6월 50여명의 엔지니어가 발사체 관련 장비 1~2차 포장 작업과 더불어 장비 선적을 끝으로 나로우주센터에서 더 이상 러시아인들을 볼 수가 없다. 하지만 러시아인이 떠난 지금 나로우주센터는 여전히 긴장감이 넘친다. 2019년 예정된 나로호 후속작 한국형발사체(KLSV-2) 시험 발사를 위한 엔진 개발이 한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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