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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실험의 역사

구름위 2016. 1. 22. 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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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월 6일 북한 조선중앙TV에 한복을 입은 리춘희 아나운서가 등장했습니다. 올해 일흔두 살인 리 아나운서는 조선중앙TV의 대표적인 간판스타였습니다. 2006년 북한이 첫 핵실험으로 세상을 놀라게 했을 때, 2011년 김정일이 세상을 떠났을 때도 리 아나운서가 등장해 소식을 전했습니다.

김정일의 사망 이후 방송을 떠난 줄 알았던 그가 다시 돌아왔다는 사실은 뭔가 또 중요한 일이 생겼다는 뜻이었죠. 오랜만에 등장한 리 아나운서는 특유의 격앙된 목소리로 “북한이 처음으로 수소핵폭탄 실험에 성공했다”고 알렸습니다.

북한은 2006년과 2009년, 2013년에 원자폭탄 실험을 했습니다. 수소폭탄은 원자폭탄보다 만들기가 어렵고 위력도 수천 배나 강하기 때문에 북한이 정말 실험에 성공했는지는 검증이 필요합니다.

1946년 미국이 비키니 섬에서 실시한 핵실험 장면

성공 여부를 떠나 북한이 여전히 핵무기 개발의 의지를 갖고 있다는 사실은 다시 한번 확인됐습니다. 유엔안전보장이사회는 긴급회의를 열었고 새로운 대북제재방안을 논의하고 있습니다. 인류를 공포에 떨게 하는 핵무기는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요. 미국 언론 워싱턴포스트는 “1945년부터 2016년 1월 6일(북한)까지 총 2055번의 핵실험이 있었다”고 보도했습니다.1) 핵실험의 역사를 알아보겠습니다.

가제트가 나가신다, 세계 최초의 핵실험 ‘트리니티’

 

세계 최초의 핵실험은 1945년 7월 16일 이뤄졌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진행되던 중이었죠. 미국이 핵무기 개발에 착수하게 된 가장 직접적인 계기는 아인슈타인의 편지였습니다. 우리가 아는 바로 그 아인슈타인 박사입니다. 독일 출신으로 상대성 이론을 발견하고 광전효과 연구로 1921년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아인슈타인은 나치의 집권을 피해 1933년 미국으로 망명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1939년과 1941년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 빨리 핵무기를 개발해야 한다고 촉구했습니다. 히틀러의 독일이 핵폭탄을 만들고 있으니 미국이 보다 빨리 새로운 무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독일의 위력은 세계를 집어삼킬 기세였고 불안한 미국은 ‘맨해튼 프로젝트’를 가동하기 시작했습니다. 핵무기를 만드는 연구였습니다. 미국의 저명한 과학자들이 이 프로젝트에 뛰어들었고 나치 정권의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유대인 과학자들도 힘을 보탰습니다.

가제트 폭탄의 모습

3년의 노력 끝에 맨해튼 프로젝트팀은 1945년 7월 16일 미국 뉴멕시코주 앨라모고도(Alamogordo) 사막에서 세계 최초의 핵실험을 실시했습니다. 모든 것이 비밀이었던 이 핵실험에는 ‘트리니티(Trinity)’라는 암호명이, 폭탄에는 ‘가제트(Gadget)’라는 이름이 지어졌습니다. 가제트는 오전 5시 29분 45초에 성공적으로 폭발했습니다. 인류 최초의 핵폭발은 하늘에 엄청난 섬광을 만들어 냈고 12km 상공까지 버섯기둥을 만들었습니다. 실험장소로부터 240km나 떨어진 곳에서도 핵폭탄이 만들어 낸 빛을 관찰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가제트는 TNT 20킬로톤(kiloton)의 위력을 가진 것으로 증명됐습니다. 갑작스러운 폭발에 뉴멕시코 주에선 뭔가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는 불안감으로 가득찼습니다. 정부는 공군기지에 있던 탄약 창고가 폭발한 것이라고 속였습니다.

트리니티 폭발 후 0.006초ㅣ0.016초ㅣ15초 <출처: http://nuclearweaponarchive.org>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꼬마’와 ‘뚱보’

 

최초의 핵실험은 핵무기가 정말 가능한 것인지 그 위력은 어느 정도인지를 확인하는 실험이었습니다. 최초의 핵실험이 트리니티였다면 핵무기가 인류에 첫 신고식을 한 곳은 일본 히로시마였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은 1945년 5월 7일 항복을 선언했지만 일본은 끝까지 연합군과 대치했습니다. 미국은 새로 발명한 핵무기를 1945년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 상공에 투하했습니다. ‘리틀보이(Little Boy)’라는 이름의 이 폭탄은 히로시마 600m 상공에서 폭발했습니다. 폭발 당시 사망자만 8만 명, 이후 방사능 오염으로 사망한 사람의 수는 수십만 명에 달했습니다.

사람들은 단 한 번의 폭발로 도시 하나를 사라지게 할 수 있는 폭탄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우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큰 과학적 도박을 했다”며 성공적인 핵폭발을 자축했습니다. 1945년 8월 9일에는 일본 나가사키에 두 번째 핵폭탄 ‘팻맨(Fat Man)’이 투하됐습니다. 나가사키에서 첫 넉 달 동안에만 6~8만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일본은 그해 8월 15일 항복을 선언했습니다.

일본 히로시마(왼쪽)와 나가사키(오른쪽)에 핵폭탄이 투하된 뒤 피어오른 버섯구름

제2차 세계대전을 끝낸 일등공신이 ‘꼬마’와 ‘뚱보’라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핵폭탄의 사용이 적절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있습니다. 사망자 대부분이 민간인이었고, 현장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조차도 평생 후유증으로 고통받으며 살아갔으니까요. 핵폭탄이 전쟁을 빨리 끝내긴 했지만 전쟁이 몇 년 더 지속됐다고 해서 원자폭탄만큼 많은 사람들이 희생됐을까 하는 의문도 듭니다. 특히 미국이 나가사키에 두 번째 핵폭탄을 떨어뜨린 것은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라기보다 두 번째 핵폭탄의 위력을 시험해 보고 싶었던 것 아니냐는 비판도 많습니다. 목적의 정당성을 떠나 핵폭탄의 위력이 사망자 수로 증명된 인류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핵실험이었습니다.

최초의 수소핵폭탄 실험 ‘아이비 마이크’

 

원자폭탄이 우라늄 원자핵을 분열시키는 과정에서 나오는 열에너지를 이용하는 것이라면 수소폭탄은 수소 원자핵의 융합반응을 이용합니다. 핵융합 과정에선 엄청난 에너지가 방출됩니다. 수소폭탄의 위력은 원자폭탄의 수백~수천 배입니다.

수소폭탄은 미국에 귀화한 헝가리의 물리학자가 에드워드 텔러가 1951년 폴란드 수학자 스태니슬로 울람의 구상(분열폭탄을 핵융합을 위한 기폭제로 쓸 수 있다는 것)을 토대로 만든 ‘텔러-울람’ 설계에 바탕해 만들어졌습니다.

최초의 수소핵폭탄의 이름은 아이비 마이크(Ivy Mike)입니다. 첫 실험은 1951년 태평양의 산호초섬 에네웨타크에서 진행됐습니다. 아이비 마이크의 위력은 TNT 1040만t으로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핵폭탄의 450배에 달했습니다.

태평양의 산호초섬 에네웨타크(Enewetak Atoll)에서 1956년에 행해진 핵실험. 이 섬에 서 20세기 중반에만 여러 차례의 핵실험이 있었다.

원자폭탄에 이어 수소폭탄까지 만드는 데 성공하면서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힘 있는 나라’가 됐습니다. 원자폭탄과 수소폭탄을 가진 나라이자 유일하게 핵폭탄을 써본 나라인 미국은 무서운 속도로 핵무기 수를 늘려나갔습니다.

미국 핵실험 사상 가장 위력이 컸던 것은 1954년 3월 실험한 수소폭탄 ‘캐슬 브라보(Castle Bravo)’였습니다. 실험 당시 5만5000℃의 열풍이 만들어졌고 200㎞ 거리까지 충격파가 전해졌다고 합니다. 미국은 1962년 한 해에만 96번의 핵실험을 했습니다.

질 수 없다, 소련의 폭주

 

냉전시대의 또 한 축이었던 소련도 핵무기 개발에 욕심을 냈습니다. 미국이 1945년 핵무기를 가졌다는 사실이 확인된 뒤 소련의 마음은 더 급해졌죠. 소련은 독일 나치 정권에서 핍박받았던 유대계 과학자들을 납치하다시피 데려와 핵무기 개발에 투입시켰습니다. 1946년부터 원자로 건설을 시작했고 1949년 8월 29일 카자흐스탄의 초원에서 처음으로 원자핵폭탄 실험에 성공했습니다. 소련의 첫 핵폭탄(RDS-1)은 첩보활동을 통해 미국의 플루토늄 설계도면을 복사해 만든 것이라고 합니다.2)

원자핵폭탄은 미국의 것을 베낀 것이었지만 수소핵폭탄은 자체 기술로 완성했습니다. 미국이 만든 수소폭탄은 ‘습식 수소폭탄’이었습니다. 폭탄의 원료인 중수소를 액상으로 보존하기 위한 별도의 냉각장치가 필요하기 때문에 무기로 상용화하기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3)

소련은 이런 단점을 보완한 ‘건식 수소폭탄’을 만드는 데 성공했습니다. 소련은 1953년 TNT 40만t 급의 건식수소폭탄 RDS-6s를 만들었습니다. 1955년 만든 수소폭탄은 1.6메가톤 급의 위력을 보였습니다. 당시 폭발의 위력이 너무 커서 폭발지점에서 수십 km 거리에 떨어져 있던 병사 한 명이 폭발로 파괴된 건물에 깔려 숨졌고, 실험장소 외곽의 작은 마을에 있었던 두 살 소녀도 대피소 밖에서 놀다가 변을 당했다고 합니다.4)

지금까지 인류가 실험한 수소폭탄 중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한 것으로 기록된 소련의 ‘차르 봄바’의 폭발 장면(유튜브 동영상 캡쳐)

1961년 소련이 만든 수소폭탄 ‘차르 봄바(Tsar Bomba)’는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폭탄으로 기록됐습니다. 차르는 황제, 봄바는 폭탄이라는 뜻입니다. 1961년 10월 30일 소련 북극해 군도 노바야제믈랴 제도에서 실행된 이 핵실험은 ‘폭탄의 황제’라는 이름값을 보여줬습니다. 위력은 무려 TNT 5800만t이었습니다. 1000km 떨어진 곳에서도 폭발하는 모습이 보였고 폭탄으로 만들어진 지진파는 지구를 세 바퀴나 돌았습니다. 실험장소에서 1000km 떨어진 핀란드에서 차르 봄바의 위력에 유리창이 깨질 정도였다고 합니다. 차르 봄바의 힘은 미국이 히로시마에 떨어뜨린 원자폭탄의 3800배였습니다.

핵실험을 한 나라들

 

미국과 소련에 이어 세 번째로 핵실험에 성공한 나라는 영국입니다. 영국은 독일과 제2차 세계대전을 치르느라 핵무기 개발에 몰두하기 어려웠습니다. 영국은 자체적으로 개발하던 정보를 미국의 맨해튼 프로젝트에 넘기고 대신 핵무기 정보를 공유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미국으로부터 정보를 건네받는 데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영국이 직접 핵실험을 한 것은 1952년 10월 2일이었습니다. 영국은 호주 몬테벨로 섬에서 처음으로 핵실험을 했습니다. 위력은 25킬로톤. 비슷한 시기 미국과 소련이 보유한 핵무기와 비교하면 힘이 많이 떨어졌지만 영국은 독자개발 했다는 데 의미를 두었습니다. 1957년에는 수소폭탄 실험도 성공했습니다.

1953년 미국 네바다의 핵실험

프랑스의 핵실험은 영국보다 늦은 1960년 2월 13일 알제리 남부 사하라 사막에서 처음 실시됐습니다. 첫 번째 폭탄의 이름은 ‘푸른 날쥐(Gerboise Bleue)’였습니다. 원자핵폭탄이었고 위력은 70킬로톤이었습니다. 2년 뒤인 1968년에는 수소폭탄 실험에도 성공했습니다.

중국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핵무기 개발에 몰두했습니다. 첫 실험은 1964년 10월 16일 위구르 지역의 소금 호수인 로프노르에서 실시했습니다. 원자핵폭탄이었고 위력은 22킬로톤이었습니다.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보단 많이 뒤졌고 위력도 약한 편이었지만 중국은 세계에서 다섯 번째, 아시아에선 처음으로 핵무기를 가진 나라가 됐습니다. 3년 뒤인 1967년에는 수소폭탄 실험도 성공했습니다.

다섯 나라 외에도 인도가 1974년과 1998년 핵실험을 했고 파키스탄도 1998년 두 번의 핵실험을 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핵실험을 했다는 것이 곧 핵무기를 보유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스라엘도 수소폭탄을 가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지만 이스라엘 정부는 공식적인 입장을 내놓은 적이 없습니다. 북한은 2006년과 2009년, 2013년 원자핵폭탄 실험을 했습니다.

핵을 가진 인류의 미래는?

 

북한이 수소폭탄실험을 했다고 발표한 날 워싱턴포스트는 71년동안 인류가 행한 핵실험을 정리해 발표했습니다. 워싱턴포스트에 따르면 1945년부터 2016년 1월까지 8개 국가가 총 2055번의 핵실험을 했습니다.

B-53 핵폭탄의 점검(미국)

가장 많은 핵실험을 한 나라는 미국으로 1945년부터 1992년까지 1032번의 핵실험을 했습니다. 소련은 1949부터 1990년까지 715번의 핵실험을 했습니다. 세 번째는 1960부터 1996년까지 198번의 핵실험을 한 프랑스였습니다.

영국은 1952년부터 1991년까지, 중국도 1964년부터 1996년까지 45번의 핵실험을 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경쟁적으로 핵폭탄을 개발하던 나라들은 1996년 유엔 산하 포괄적핵실험금지조약기구(CTBTO)에 서명하고 추가 핵실험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습니다. 현재 CTBTO에 서명한 나라는 183개국입니다. 북한과 인도, 파키스탄은 이 조약에 서명하지 않았고 미국과 중국은 서명은 했지만 비준은 하지 않았습니다. 북한은 21세기에 핵실험을 한 유일한 나라입니다.

핵을 가진 인류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요? 제2차 세계대전 후 세계가 정면충돌하지 않고 21세기를 맞은 것은 열강들이 서로가 갖고 있는 핵무기의 힘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있습니다. 국제원자력기구(IAEA)에서 일한 안준호 박사는 <핵무기와 국제정치>라는 책에서 “인류를 전멸할 수 있는 핵무기의 위력을 잘 알고 있었기에 핵무기를 서로 보유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핵전쟁을 억제할 수 있는 효과가 있었고 그래서 그렇게 오랫동안 유럽에 평화가 유지되었는지 모른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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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사키에 떨어진 핵폭탄 ‘팻맨’의 실물 크기 모형 <출처: (cc) Ed Uthman at Wikimedia Commons>

미국 언론 뉴욕타임스는 북핵실험 발표 후 “가난하고 고립된 나라들은 종종 내부에서 리더십을 강화하거나 국제사회로부터 원조를 쥐어짜내기 위해 ‘핵위협’을 무기로 쓰곤 했다”고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핵무기가 군사무기가 아니라 정치적 무기가 됐다는 뜻이죠.

그러나 언제까지 핵무기가 각 나라의 창고에 저장돼 있기만 할지, 핵무기가 안전하게 잘 관리될 것인지는 확신하기 어렵습니다. 세계는 테러와 전쟁의 위협에 휩싸여 있고 돈과 무기는 여전히 각 나라의 힘을 가장 쉽게 과시할 수 있는 수단입니다. 언젠가는 내가 먼저 핵무기를 폐기했다고 자랑하며 경쟁하는 평화의 시대가 올 수 있기를 기원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