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우리 역사 이야기

[스크랩] 카르타고 군대 총정리.

구름위 2012. 10. 7. 2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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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베리아 전사들. 크게 3가지로 구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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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베리아 전사들은 직사각형 모양의 방패(Scutum)에서 이름을 딴 스쿠타리(Scutari)와 작은 원형방패(Caetra)를 지닌 카이트라티(Caetrati), 발레아레스 제도 출신의 투석병으로 나누어진다. 한니발은 이들을 켈트족과 같이 '방

 

패막이' 정도로 활용한 걸로 보이지만, 한니발의 신화같은 승리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이베리아 스쿠타리


                    

 

이베리아 카이트라티

 

 

폴리비우스와 리비우스에 따르면, 이베리아 전사들은 조국을 의미하는 보라색으로 가장자리를 장식한 흰색 면 튜닉을 입고 있었다

 

고 한다. 아마도 전투가 끝난뒤 죽은 로마군의 갑옷을 착용했을 것이라 본다. 그들의 전술은 로마의 보병과 매우 비슷했다. 이베리

 

아 전사들은 전체가 철로 된 투창을 일제히 던진 뒤에, 단검을 들고 돌격하였다. 그들이 썼던 단검의 종류에는 그리스의 콥시스

 

(Kopsis)에서 비롯된 팔카타(Falcata)라는 한쪽날이 휘어진 외날검, 로마의 글라디우스 히스파니엔시스(Gladius hispa-niencis)

 

의 원형인 찌르고 베는 곧은날검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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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베리아 기병과 로마 시민 기병과의 대전모습. (앵거스 맥브라이드 Angus Mcbride 그림), 이베리아 기병 기마상

 

 

이베리아 기병들은 보병과 거의 유사한 복장을 하고 있었는데, 휘어진 외날검(Falcata)와 기병용 창을 들고 싸웠으며 방어용으로는 작은 원형방패(Caetra)를 가지고 있었다. 이들의 군마는 고대 세계에서 최고의 명마로 꼽히는

 

이베리아 산지에서 자란 명마였으며, 카르타고의 귀족 기병들도 선호했다고 한다. 한니발은 칸나이 전투에서 이베리아 기병들과 켈트족 기병들을 한부대로 편성하였다. 한니발의 기병장교 하스드루발(Hasdrubal, 한니발의 동생

 

이 아님)의 지휘아래 이베리아와 켈트족 기병들을 통제하여 전장의 다른 곳으로 방향을 바꿔 신속하게 투입할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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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아레스 투석병의 모습.  카이트라(Caetra)와 팔카타를 든 인물은 안달루시아 출신 전사이다.



 

발레아레스 제도 출신의 투석병들은 전장에서 중요한 역활을 담당했다. 이들은 두 개의 분대로 조직되어 각각 엄청난 힘을 발휘했는데, 사정거리에 따라 세 가지 유형의 투석기를 사용했다. 그 정확도와 화력은 실로 대단해서 활

 

보다 훨씬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한다.발레아레스 투석병들은 단순한 모양의 튜닉을 입고 있었으며, 최소한의 장비만 갖추고 있었다. 칼은 발레아레스인들에게서 발견되는 특징으로 얼핏 팔카타의 형태와 비슷하다. (앵거스 멕브

 

라이드 Angus Mcbride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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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베리아 Skirmisher의 모습. 전체가 철로 된 투창 여러개와 '아트로피에드 안텐나이(Artrophied antennae, 칼자루가 있는 곧은 검)'를 갖고 있다. 칼집의 바깥쪽에는 휘어진 단도가 들어있다. 작은 원형방패(Caetra)를 들고 있

 

으며 독특하고 폭이 넓은 금속이 달린 벨트를 착용하고 있다. 투구는 가죽으로 만든 것처럼 보이며, 보강을 위한 금속띠가 둘러져 있다. (앵거스 멕브라이드 Angus Mcbride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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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2세기 후반 이베리아 전사들의 모습. 발렌시아에서 발견된 도자기 그릇을 참고하여 그린 것이다. 갑옷과 장비로 보아 정예부대

 

였음을 알수있다. 깃 장식 투구를 쓴 인물은 장교로 추정된다. (앵거스 맥브라이드 Angus Mcbride 그림)

 

 

 

 

 

 

 

아프리카 보병

 

 

카르타고(한니발)의 중심부대는 아프리카 출신 중장보병들이었다. 이들은 아프리카 여러 지역에서 충원되었는데 주로 리비아인, 카

 

르타고 시민, 누미디아 출신 경기병, 따로 분리된 신성군단 혹은 신성기병대로 이루어졌다.

 

 

 

 

신성군단(Sacred Band)

 

 

 

 

신성군단의 기수. 리처드 후크(Richard Hook)의 그림

 

 

카르타고인들은 주로 용병을 썼다 알려지지만 그들도 부유한 시민과 귀족으로 이루어진 정예병이 있었다.

 

플루타르코스는 시칠리아를 지키기 위해 카르타고와 맞써 싸우게된 티몰레온과 마주치게 된 1만명의 카르타고 선봉대를 "화려한 투

 

구와 흰갑옷, 화려한 장식이 달린 방패를 차고, 뒤따라가는 용병-리비아, 이베리아, 누미디아-들에 비해 질서 정연한 군대"라 언급한

 

다. 카르타고쪽의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아 그들이 자신들의 정예부대를 뭐라고 불렀는지는 알수 없다. 하지만, 카르타고인들과

 

수백년 동안 맞써 싸운 시칠리아 계 그리스인들과 남부 이탈리아인들의 기록에 의해 대략적으로 그(신성군단)들의 존재를 알수 있

 

다.

 

 


 

 

신성군단과 외국용병들의 편성비율은 정확히 알수는 없지만, 그들이 자신들의 정적-그리스인-들과 맞써 싸울때의 기록으로 대략적

 

으로 알수 있다. 기원전 341년 크리메수스(Battle of Crimesus)에서 코린트출신의 시라쿠사 성웅 티몰레온과 맞써 싸운 카르타고 군

 

대는 7만명이었다. 그중 외국용병들은 6만명이었고, 카르타고 정예병인-또한 선봉부대였던-신성군단은 1만명이었다고 플루타르코

 

스는 친절히 설명해 준다. 티몰레온이 죽은 후, 시칠리아계 그리스인들은 시라쿠사 참주 아가토클레스의 지휘아래 다시 한번 카르타

 

고인들의 침략에 맞써 싸운다. 아가토클레스의 해군과 맞써 싸운 카르타고 해군은 리비아 용병 1만명, 신성군단 2천명으로 5:1의 비

 

율을 보여준다.

 

 

 

역사가 폴리비오스는 신성군단을 "수십만의 병사들이 싸우는 전장에서도 빛나는 카르타고의 상징"이라 언급한다. 이들은 카르타고

 

부유한 시민이나 귀족들만 지원할수 있었고, 카르타고인들의 주신 바알(Baal)신전에서 지급된 무기로 무장한 이름그대로 '신성한

 

군대'였다.

 

 

 

카르타고인들은 아스타르테(Arstarte, 카르타고 전쟁과 사랑의 여신)신전에서 따로 기병대를 모집했는데, 이 기병대들은 인신공양대

 

신 군역에 종사할 조건으로 바쳐진 어린아이들을 중기병으로 편성한 것이다. 신성기병대(Sacred Band Cavarly)의 복장과 무장은

 

신성군단과 같이 '죽음'을 상징하는 흰갑옷과 그리스식 원형 호폴론 방패, 긴 기병용 창을 들었다. 이들의 군마는 이베리아산지에서

 

자라는 혈통좋은 명마중의 명마였다.

 

 

 

신성기병대의 활약은 한니발의 이탈리아 켐페인에서 돋보이진 않았지만, 그의 운명을 결정짓는 전투라 할수있는 자마전투에서 로마인들

 

에게 포위된 한니발을 구출해내기도 하였다.

 

 

 

 

 

 

 

리비-페니키아 중장보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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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군 갑주를 착용한 리비-페니키아 중장보병 (리처드 후크 Richaard Hook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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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니발의 정예병중에서 중심을 이루었고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한것은 리비아,카르타고 시민들로 이루어진 리비-페니키아 중장보

 

병이었다. 이들은 흔히 아프리카 보병으로 불리우며 한니발이 이탈리아 원정에서 그토록 아끼고자한 부대였다. 포에니 전쟁시기당시

 

이들은 로마군단에 대항하여 후기 그리스식의 무장과 방진을 형성했던것으로 추측된다. 하지만 로마의 집정관 레굴루스가 카르타고 본토를

 

침략하면서 카르타고 원로원들은 스파르타 출신 용병대장 크산티포스를 데려오도록 했는데, 크산티포스는 리비-페니키아 중장보병의 기존

 

팔랑크스 방식을 당시 헬레니즘 세계에서 유명한 마케도니아식 팔랑크스로 변화시켰다. 마케도니아식으로 재편된 1만명의 리비-페니키아

 

중장보병 즉, 아프리카 보병들은 레굴루스의 군대를 격파하기에 이른다. 포에니 전쟁이 끝난후, 금료채불에 불만을 품은 용병들의 대규모 반란

 

당시에도 이들이 활약했다고 한다.

 

 

 

위대한 카르타고 장군 한니발의 역사적인 원정에서도 이들은 기꺼이 알프스의 험한 고지를 마다하지 않았다. 한니발의 아프리카 보병 역시 후기

 

그리스-마케도니아 식으로 무장한 팔랑크스 보병으로 5~7m의 장창을 들고있었을 것이다. 한니발은 트레시메노 전투이후 전사한 로마군의 가장

 

질 좋은 사슬갑옷(로리카 하마타)를 벗겨 아프리카 중장보병에게 입게끔 하였다. 이것은 훗날 칸나이 전투 당시  리비우스가 묘사하듯이, 한니발의

 

아프리카 보병은 완전 '로마군' 같았다고 한다. 여기서 논란이 되는게 있다면, 과연 한니발이 로마군의 갑옷을 제외한 로마군의 무기를 아프리카 보병

 

에게 쥐어주었나는 것이다. 어떤 학자들은 칸나이 전투당시 아프리카 보병들은 로마군과 완전 흡사한 즉, 필룸과 검으로 무장한 보병이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한니발의 아프리카 중장보병들이 완전 로마군 방식과 전술로 채택하였음을 추측하기도 한다. 아마도 로마군처럼 맨 앞쪽대열의 아프리카 보병은

 

필룸과 검을 소지한 보병이고, 후방에는 장창을 소지한 팔랑크스 보병이었을 것이다.

 

 

 

 

 

 

 

누미디아 경기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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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시민 기병과 싸우는 누미디아 경기병 (리처드 후크 Richard Hook 그림)

 

 

 

고대 누미디아인들은 가장 뛰어나고 날렵한 기수였다. 그들은 고삐도 없는 말에 올라 말의 목에 감아놓은 밧줄과, 무릎의 힘, 작은  채찍만으로 말을 몰았다. 타고난 기수였던 이들은 적직 가까이까지 달려가 창을 던졌으나 결코

 

근접 전투에 휘말리지 않았다. 이들은 대부분 갑옷을 착용하지 않았으며, 장비도 투창 몇개와 적기병의 창을 방어할 가죽방패가 전부였다. 이들은 소규모 전투에서 특히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는데, 유목민족 특유의 전술을 사용했

 

다. 트레비아 전투당시 1000명의 누미디아 기병이 셈프로니우스의 '준비안된' 로마군을 끌어들이는 데 성공하였다. 리비우스의 묘사에 따르면 칸나이 전투당시 이들은 500명의 특수부대를 따로 조직하여, 로마군에게

 

거짓으로 항복하였다. 로마군이 안심하고 있는사이, 이들은 튜닉속에 숨겨놓았던 단검을 빼들어 로마군을 기습했다고 한다. 자마전투당시 한니발은 자신이 가장 이용했던 이 유목민기병들을 많이 편입하지 못했지만,

 

그의 적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4000여명의 누미디아 기병을 자신의 군대에 포함시키고 있었다.

 

 

 

 

 

 

 

 

 

곡길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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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타고는 코끼리 병종으로 유명한 국가이다. 그들은 로마인과의 전투에서 코끼리를 이용함으로써 재미를 보았으며, 한니발도 자신의 원정대에 코끼리를 참가시켰다. 흔히 전투코끼리를 생각해보라면 코끼리를 모는 기수가 목

 

위에 앉아있고 등에는 -마치 포탑과 같은- 상교가 있으며, 상교에는 궁수와 장창병이 있을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이들은 전형적인 알렉산드로드 3세의 제국을 계승한 -셀레우코스같은-국가들이 사용한 전투코끼리이지, 카르

 

타고 전투코끼리가 등에 상교를 달았는지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몇몇 학자들은 전투코끼리로 보이는 그림이 새겨진 카르타고 동전을 증거로 제시하여, 카르타고 전투코끼리는 상교가 없었다고 주장한다. 위의 동전을 보듯이 카르타고 전투코끼리는 달랑 기수 한명이 코끼리를 조종했으며, 주로

 

돌격하여 적 보병에게 큰 혼란을 주었다. 몇몇 이들은 아프리카에서 발견된 상교가 있는 전투코끼리 조각상을 증거로 제시하지만, 이는 포에니 전쟁 후대에 만들어진 로마군 전투코끼리이다. 카르타고 전투코끼리는 아닌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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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타고인들이 어떻게 코끼리 병종을 채택했는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어떤 이는 카르타고가 반(半) 헬레니즘 국가인 만큼, 헬레니즘 국가들에 의해 코끼리 병종을 채택했다고 한다. 만약 이 설이 맞다면 카르타고 전

 

투코끼리에게는 상교가 있었을 것이다. 이에 대해 어떤 이들은 북아프리카에 거주한 리비아, 누미디아인들에 의해 키 작은-현대엔 멸종된- 북아프리카산 코끼리를 채택했다고 한다. 필자는 후자의 주장이 맞다고 생

 

각된다.

 

 

1차 포에니 전쟁당시 스파르타 출신의 용병대장 크산티포스가 로마 집정관 레굴루스를 패배시킬때 당시 100마리의 코끼리를 사용함으로써 그 위력을 실감케 하였다. 이후 카르타고는 하스드루발에게 120마리의 코

 

끼리를 추가시킨 군대로 팔레르모를 공격토록 하였다. 하지만, 깊은 해자에 빠진 코끼리는 오히려 미쳐 광폭에 빠져,  카르타고 군 자체에게 큰 피해를 주었다. 한니발도 37마리의 코끼리를 자신의 원정에 데리고 갔으

 

나 론강에서 6마리가 죽었으며 트레비아 전투당시엔 10마리의 코끼리만이 살아있었다. 전투이후 '수루스'라는 애꾸눈 코끼리를 빼고 전부 죽었으며, 한니발은 수루스의 등위에 타고 다니며 행군을 하였다한다.

 

 

 

기원전 207년 한니발의 동생 하스드루발 바르카는 메타우르스 전투에서 15마리의 코끼리를 동원했으나 로마군의 투창세례에 미쳐 진영을 이탈하였다. 이 전투에서 패한 하스드루발은 모가지만이 한니발을 영접할수

 

있었다. 기원전 206년 일리파 전투당시 카르타고에서 파견된 장군 '하스드루발 기스고(기스고의 아들 하스드루발)'는 30여 마리의 코끼리를 동원했으나 그 역시 로마군의 적절한 대응에 오히려 코끼리들은 카르타고

 

군에게만 골치덩어리로 변하였다.

 

 

이탈리아 원정당시 한니발은 카르타고 원로원들에게 소수의 코끼리를 지원받았지만, 전투에서 이들은 방해만 되었다. 자마 전투당시 80여마리의 코끼리는 한니발의 기대를 무참히 꺠버렸다. 로마군의 질서정연하고

 

유연한 진형과 투창세례에 80여마리의 코끼리는 무용지물이 되어버린것이다.

 

 

 

 

 

 

 

전차병

 

 





카르타고 군대에서 전차병의 존재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아마도 코끼리 병종에 의해 가려진것 같다. 하지만, 그리스인들과 페르시아같은 동방전제국들과 같이 카르타고인들도 전차병을 이용했다. 크리메수스강 전투에서 코린

 

트 출신 시칠리아 성웅 티몰레온과 맞써 싸울때, 카르타고는 수백대의 전차부대를 동원했다. 카르타고의 전차부대는 막강한 위력을 발휘하여 티몰레온의 그리스 기병들을 거의 궤멸 직전에 까지 몰았지만, 갑작스러운 폭풍우에

 

강이 불어나면서 전차부대 대부분은 강물에 휩쓸려 내려갔다. 전투가 끝난후 그리스인들은 카르타고 전차 200대를 포획할수 있었다.

 

 

고대 리비아인들은 뛰어난 전차기수였기 때문에 카르타고 전차기수 대부분은 리비아인이었다. 시라쿠사 참주 아가토클레스는 카르타고 해군이 시칠리아를 포위하자 그것을 역이용하여 카르타고의 수도 카르타고를 빈집털이하

 

였다. 이때, 아가토클레스는 리비아인들을 전차기수로 고용하여 수도 카르타고를 거의 함락직전에 이르기도 하였다. 카르타고의 전차부대는 알렉산드로스3세가 페르시아의 전차부대를 격파해을즘 혹은, 코끼리 병종을 도입하면

 

서 사라진것으로 보인다.

 

 

 

 

 




카르타고의 수도 카르타고의 수호신이자 달의 여신인 타니트를 상징하는 문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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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대로 제가 소유하고있는 서적과 지식을 동원하여 카르타고 군대를 총정리해보았습니다.

 

몇몇 보강해야 될 부분은 고수님들이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출처 : THIS IS TOTAL WAR
글쓴이 : 다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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