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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펌] 만보산 사건 - 과연 관동군 개입 근거나 개연성이 있는가?

구름위 2012. 10. 6. 2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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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45238&mobile&categoryId=159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만보산 사건)
 
[그런데 당시 일제는 중국에 대한 두 개의 외교 노선이 대립하고 있었다. 불간섭주의 원칙을 고수하자는 시데하라(幣原喜重郎)와, 무력간섭주의로 중국 본토는 장개석(蔣介石)이 만주는 장쭤린(張作霖)이 나누어 갖도록 하려는 다나카(田中義一)의 주장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1928년 다나카의 강경 외교는 관동군의 장쭤린 폭사 사건으로 후퇴하면서 시데하라의 불간섭주의 외교가 우위에 서게 되었다.

한편 1928년 12월말에 장쭤린의 아들 장쉐량(張學良)은 동삼성(東三省) 총보안사령관으로 취임한 뒤 조직적으로 배일 정책을 추진, 중국 민족주의를 고취시켰다. 그 결과 중일간의 현안 문제인 만철병행선·호로도 축항 문제 및 재만 한인의 토지 상조권 문제 등의 분쟁의 씨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적극적인 대륙 침략 정책이 어려움에 처하자, 중국민족주의가 고조되면서 자신들이 생명선이라고 부르던 이곳 만주에서 철수해야 하느냐, 최후의 수단으로 무력을 행사해야 하느냐의 기로에 봉착하였다.

이 때 관동군 특보 기관이 일본 중앙 정부의 의견을 무시하고 재만 한국 농민을 이용하여 대륙 침략을 위한 구실을 마련하기 위해, 바로 만보산 사건을 일으킨 것이다. 일제는 중국인 학영덕(郝永德)을 비밀리에 매수하여 일제의 자금으로 장농도전공사(長農稻田公司)를 설립하게 하고, 지배인으로 삼았다. 이에 1931년 4월 16일 학영덕은 이통하 동쪽 삼성번 일대 소한림(蕭翰林) 등 12호의 황지 500샹(晌: 약 15만평)을 조지 계약(租地契約)하였다.

그런데 계약 조항 중에는 “조지 계약은 장촌현 정부의 허가를 받아야 하며 만약에 현 정의 허가를 받지 못하게 되면 무효”라고 명시되어 있었다. 그러나 학영덕은 현 정부의 허가를 받기 전에 한국인 이승훈(李昇薰) 등에게 전조 계약(轉租契約)을 함으로써 위약으로 분쟁의 소지를 마련하였다.

이승훈 등이 만주 각지에 흩어져 있는 재만 한국 농민을 만보산 농장으로 불러들이자 180여 명이나 모여들었다. 그때 학영덕은 순수한 한인농민에게 이통하를 절단하게 하고 불법으로 계약한 토지와 이통하 사이에 수로를 개착하게 하였다.

중국인 지주들과의 분쟁이 야기되었지만, 한국 농민들의 수로 개척은 일본 장춘 영사관 경찰의 보호 아래 강행되어 6월 말에는 거의 완성될 단계에 이르렀다. 그런데 여름이 닥쳐오면서 이통하의 범람을 우려하던 중국인 지주와 현지 주민 약 400명은 7월 2일 수로공사 현지로 달려와 개착한 수로를 매몰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마침내 현장에 있던 한인 농민, 일본 영사관 경찰과 중국인 지주, 주민 사이에 일대 충돌이 일어났다. 그후 점차 중일양국 경찰이 서로 증원되고 약간의 총격전도 벌어지게 되면서 분쟁도 격화되어 갔다.

그러나 다행히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은 채 중국인 지주와 주민들이 일단 철수하면서 진정되었다. 그런데 일본 관동군은 장춘 영사관측을 이용하여 조선일보 장춘지국장 김이삼(金利三)을 유인, 만보산사건에 대한 과장된 허위 특보를 제공하여 본사로 지급 통전하게 하였다.

≪조선일보≫는 7월 2일 석간과 3일 조간 두 차례에 걸쳐 호외에 “중국 관민 800여명과 200 동포 충돌 부상, 주재 경관대 급보로 장춘 주둔군 출동 준비, 삼성보에 풍운점급”이라는 표제로 게재하였다.

이로 인해 한국 내에서는 중국인 배척 사건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조선일보≫ 호외와 ≪동아일보≫·≪시대일보≫·≪중외일보≫ 등의 과장된 허위 보도에 기인된 것이었다. 그런데 중국측이 재만 한인을 일제의 대륙 침략의 앞잡이로 간주하고 미쓰야 협정에 근거하여 이들을 압박한 데에서 온 한중 양민족의 감정 대립도 간접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그래서 중국인 습격·살상 등이 한국·일본 등지에서 행해졌으며, 일제측의 선동과 은밀한 이면 공작에 의해 더욱 악화되었다.]

 

 

 

 

 

한국 근대사 산책 8 : 만주사변에서 신사참배까지 (강준만/인물과사상사/2008)

 

[먼저 만주사변의 전주곡이 된 ‘만보산 사건’을 살펴보자. 1931년 5월 하순부터 만주 창춘 근교의 만보산 삼성보에서 조선인 농민과 중국인 농민 사이에 수로 개설 문제를 둘러싸고 분규가 일어났다. 6월 초순 중국 경찰이 개입하여 조선 농민을 몰아내자, 일본의 영사 경찰은 조선 농민들이 법적으로 일본 신민이라며 이 분규에 개입했고, 조선 농민들은 일본 경찰의 보호 아래 수로 공사를 강행했다. 몇 차례 충돌 끝에 7월 1일 중국 농민 200여 명이 조선인들이 만든 수로를 파괴하자 일본 경찰이 출동하여 중국 농민들을 향해 발포하였다. 이른바 ‘만보산 사건’이라. 이 사건은 다행히 인명피해가 없어 그냥 넘어갈 수 있었는데, 중국 동북지방에 대한 침략의 구실을 찾고 있던 일본 관동군이 이 사건을 악용하여 문제가 커졌다. 관동군은 창춘 영사관에 지령을 내려 많은 조선인 농민들이 큰 피해를 입은 것처럼 조선에 허위보도하도록 했다. 그 결과 일본의 음모대로 조선 내에서 화교에게 보복을 가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이에 맞서 중국 내에서도 조선인에 대한 보복사태가 일어났다. 그러자 일제는 이 사건이 만주에 사는 조선인을 중국 당국이 박해하고 내쫓으려 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대대적으로 선전하면서 조선, 중국 민족의 대립과 충돌을 격화시키고자 했다.

일제의 음모는 일관되고 집요했다. 1931년 7월 16일 조선총독부는 만보산 사건이 유발한 국내 사태로 중국인이 100여 명 사망하고 수백 명이 부상했다는 사실을 소상히 발표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조선인은 만주와 중국에서 다시 박해를 받게 됐으며, 일본 관동군은 만주 거주 조선인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출병을 시작했다. 9월 18일 밤 일본군은 봉천 교외의 유조호 부근에서 남만주 철도의 일부를 폭파하고 이를 중국군의 소행으로 돌리며 공격을 개시했다. ‘만주사변(9.18사변)의 서막이었다.

 

(중략)

 

1932년 3월 1일 일본이 괴뢰국 만주국의 건립을 선포한 이후, 조선에는 만주 이민 열풍이 휘몰아쳤다. 1932년 60만 정도였던 만주 거주 조선인 인구는 1942년 150만을 돌파했다. 10년 동안 2400만 인구 중 100만이 빠져나갔으니 가히 ‘엑소더스(exodus, 대탈출)’라 불릴 만했다. 만주 붐과 함께 투기, 금광의 광풍도 휘몰아쳤다.]

 

 

 

 

http://shindonga.donga.com/docs/magazine/shin/2008/02/06/200802060500006/200802060500006_1.html

([전봉관의 옛날 잡지를 보러가다 32]

평양 중국인 배척 폭동 사건. 사상 최악의 오보가 불러온 사상 최악의 참사. 

전봉관 한국과학기술원(KAIST) 교수)

 

 

[깊은 밤, 호외가 날아들었다. ‘중국인들이 만주의 조선인 농민들을 학살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이었다. 격분한 평양 사람들은 거리로 나섰다. 눈에 띄는 모든 중국인을 폭행하고 그들의 가게를 때려 부쉈다. 공식집계 사망자만 100명을 넘어서는 최악의 사태로 평양은 완전히 무정부 도시로 전락했다. 그러나 도화선이 된 애초의 보도가 일본의 농간에 휘말린 어이없는 과장보도였음이 확인되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1931년 7월5일, 뜨거운 여름 햇살은 오후 8시가 지나서야 자취를 감췄다. 평양 시내는 일요일 저녁치고는 이상하리만치 북적거렸다.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잔뜩 화난 표정으로 핏대를 세워 열변을 토했다. 날이 어두워지자 시내 중심가의 중국음식점 동승루 앞에 10여 명의 소년이 모여 야유를 퍼붓다가 일제히 돌을 던졌다. 조그만 돌멩이들은 유리창을 뚫지 못하고 맥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 광경을 보고 장정 60여 명이 몰려왔다. 장정들은 소년들을 밀치고 앞으로 나갔다. 이번엔 주먹만한 돌덩이들이 동승루를 강타했다. 출입문과 유리창은 산산이 부서졌다.

 

(중략)

 

폭동을 피하기 위해 일본 경찰의 보호를 받으며 평양역으로 몰려든 중국인들.

“중국인 목욕탕 영후탕에서 목욕하던 조선인 네 명이 칼에 맞아 죽었다!”

“시외 대치령리에서 조선인 서른 명이 중국인에게 몰살당했다!”

“서성리에서 중국인이 작당해 무기를 들고 조선인을 살해하며 시내로 진군하고 있다!”

“만주 창춘에서 동포 예순 명이 학살되었다!”

세 시간 동안 파괴와 약탈의 희열을 맛본 군중에겐 유언비어를 가려낼 분별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아니, 마음속 깊은 곳에서 그 말이 사실이기를 바랐다. 유언비어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질 때마다 한껏 부풀려졌다.

“중국인의 씨를 말리자!”

누군가가 외치자, 군중은 일순간 피에 주린 이리떼로 돌변했다. 피가 흥건히 묻은 곤봉을 든 장정 예닐곱 명을 앞세우고 무리를 지어 토끼몰이하듯 중국인을 찾아 헤맸다. 잿더미가 된 가게와 집을 정리하던 중국인들은 허겁지겁 피난길에 올랐다.

“저기 중국인이다!”

중국인이 발견되면 수백명이 함성을 지르며 쫓아가 기어이 때려눕혔다. 군중에게 발각된 중국인들은 채 10분이 못 돼 피투성이 시체가 돼 길가에 널브러졌다.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안면이 굳어버린 노인의 시체, 고사리 같은 두 주먹을 예쁘장하게 쥐고 두 눈을 뜬 채 땅바닥에 엎어진 영아의 시체, 젖먹이를 품에 안고 맞아죽은 여인의 시체, 온몸에 피멍이 든 임신부의 시체…. 거리에는 중국인들의 시체가 차곡차곡 쌓여갔다. 평양 시내가 무정부 상태에 빠진 그날 밤, 경찰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날이 밝자 간밤의 참상이 숨김없이 드러났다. 길 위에는 부서진 상품과 가구가 산적해 보행조차 곤란했고, 전깃줄에는 찢어진 이불이 걸려 새벽바람에 흩날렸다. 평양 시내는 하룻밤 사이에 폐허로 전락했다. 온 도시가 쓰레기더미와 시체로 뒤덮였다. 서성리에 사는 중국인 조성암의 집에서만 한꺼번에 10구의 시체가 발견됐다.

밤새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던 경찰은 폭동의 기세가 한풀 꺾인 아침에야 중무장을 하고 출동했다. 뒤늦게 나타난 경찰은 밤새 공포에 떤 중국인들을 호위해 중국영사관으로 대피시켰다. 약탈과 살인은 경찰이 출동한 이후에도 멈추지 않았다. 피난 가던 중국인 한 명이 대낮에 몰매를 맞고 살해됐고, 지하실에 숨어 있던 중국인 아홉 명이 갑자기 들이닥친 군중의 손에 몰살당했다.

그날 오후 1000여 명의 군중이 흰색 깃발을 휘날리며 기림리 중국인 피신처를 습격했다. 30여 명의 장정을 태운 트럭 한 대가 군중 사이를 오가며 폭동을 선동했다. 경찰이 중국인 보호를 명분으로 시위대에 발포해 조선인 한 명이 총에 맞아 사망하고 두 명은 중상을 입었다.

날이 저물자 폭동은 평양 시외와 진남포까지 번졌다. 중국인 상점과 가옥은 모조리 불탔고, 곳곳에서 폭행과 살육이 자행됐다. 불타는 중국인 상점과 가옥 때문에 그날 밤 평양 하늘은 유난히 밝았다.

총독부는 이틀 동안의 폭동으로 평양에서만 중국인 119명이 사망하고, 163명이 부상당하고, 63명이 실종됐으며, 방화 49건, 가옥 파괴 289건, 재산 손실 250만원이 발생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중국 국민당 정부의 조사 결과는 사망자 133명, 부상자 289명, 실종자 72명 등으로 피해 규모가 더 컸다. 뒤늦게 폭동 주동자 색출에 나선 경찰은 1200여 명의 조선인을 검거하는 기염을 토했다.

 

 

(중략)

 

평양 중국인 배척 폭동은 사흘 전인 1931년 7월2일 한밤중에 간행된 ‘조선일보’의 호외에서 촉발됐다.

싼싱바오(三姓堡) 동포 수난 갈수록 심해져. 200여 동포 또다시 피습. 완공된 수로를 전부 파괴. 중국농민 우리 동포를 대거 폭행. (창춘 김이삼 특파원 급전)

만주 완바오산(萬寶山) 부근 싼싱바오에서 조선 농민 200여 명이 석 달 동안 피땀 흘려 닦은 수로를 중국 관민 400여 명이 모조리 파괴, 매립해버렸다는 어처구니없는 소식이었다. 호외는 이튿날 밤에도 이어졌다.

중국 관민 800여 명과 200여 명 동포 충돌 부상. 대치한 중·일 관헌 한 시간 여 교전. 중국 기마대 600여 명 출동. 급박한 동포 안위. (창춘 김이삼 특파원 급전)

완바오산 사건의 발단이 된 싼싱바오의 수로.

수로 파괴 이후 중국 관민 800여 명과 조선농민 200여 명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 다수의 조선농민이 ‘살상’되었고, 150m 거리를 두고 대치하던 일본 경찰과 중국 경찰 사이에 교전이 발생했다는 소식이었다. 호외에 적힌 대로라면, 야박한 중국인들은 먹고살 길을 찾아 고향을 등지고 만주로 이주한 조선 농민의 생활 터전을 짓밟는 것으로도 모자라 목숨까지 빼앗은 셈이었다. 연이틀 한밤중에 간행된 호외는 조선인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중국인에 대한 분노는 극에 달했다.

흥분한 사람들은 전보의 발신지가 ‘싼싱바오’가 아니라 ‘창춘’인 것을 눈여겨 살필 겨를이 없었다. ‘조선일보’ 창춘 특파원 김이삼은 일본영사관에서 제공하는 정보를 사실 확인 절차를 거치지 않고 서둘러 타전했고, 서울의 본사 편집국은 전보만 믿고 부랴부랴 호외를 간행했다. 너무 서둘러 간행한 나머지 ‘부상’이 ‘살상’으로 오기된 것조차 걸러내지 못했다.

역사상 최악의 오보는 엉뚱한 곳으로 불똥이 튀었다. 첫 번째 호외가 간행된 지 몇 시간 지나지 않은 7월3일 새벽 2시, 인천 율목리 중국인이 경영하는 호떡집 앞에 격분한 조선인들이 몰려들어 돌을 던졌다. 유리창이란 유리창은 모조리 깨졌고, 잠결에 놀라서 뛰쳐나온 중국인은 피투성이가 될 때까지 구타당했다. 성외리, 중정, 용강정 등 7곳에서 중국인 폭행 사건이 발생했다. 뒤늦게 출동한 경찰은 주동자 7명을 체포하는 데 만족했다.

날이 밝자 인천경찰서 도가와 서장은 인천 전역에 비상경계령을 내렸다. 비번인 순사까지 소집하는 한편 경기도 경찰부에서 40명의 순사를 지원받아 시내 곳곳에 비치했다. 중국인이 경영하는 상점의 영업을 중지시키고, 시내에 흩어져 사는 중국인들을 중국영사관으로 대피시켰다. 인천 시내는 전시를 방불케 했다. 하지만 날이 저물자 중국인 거류지로 또다시 성난 군중이 몰려들었다. 수천 군중은 철통 같은 경찰의 경계선을 돌파하고 중국인 가옥과 요릿집을 닥치는 대로 파괴했다.

 

(중략)

 

싼싱바오에서 조선 농민이 중국 관민의 손에 ‘살상’되었다는 것은 명백한 오보였지만, 조선인과 중국인의 충돌이 발생한 것은 사실이었다. 7월1일, 중국 농민 400여 명은 실제로 조선 농민 200여 명이 석 달 동안 애써 파놓은 수로를 파괴했다. 하지만 이날의 충돌은 중국 농민들만의 잘못은 아니었다. 조선 농민은 수로를 건설하기 전 합당한 법적인 절차를 밟지 않았고, 충돌 직후 일본 경찰은 기껏해야 삽이나 곡괭이를 든 중국 농민들을 향해 서른여덟 발의 실탄을 발포했다. 조선, 중국, 일본 3국의 복잡미묘한 이해관계가 충돌해 이른바 ‘완바오산 사건’이 일어났다.

한일 강제합방 이후 조선인의 국적은 ‘대한제국’에서 ‘일본’으로 바뀌었다. 만주로 이주한 조선 농민의 국적 역시 일본이었다. 중국 정부는 외국인에게 토지 소유권을 인정하지 않았고, 이중국적 또한 허용하지 않았다. 만주로 이주한 조선인이 중국의 토지를 소유하려면 국적을 ‘일본’에서 ‘중국’으로 변경해야 했는데, 일본은 원칙적으로 조선인의 일본 국적 이탈을 허용하지 않았다. 중국 국적을 취득하지 못한 대다수의 조선인은 중국 지주의 소작인이 되거나 토지를 장기임차해서 경작하는 수밖에 없었다.

1931년 4월, 완바오산 지역 싼싱바오로 이주한 조선 농민 200여 명은 중국인 허융더로부터 미개간지를 임차했다. 하지만 허융더 역시 그 땅의 지주가 아니라 임차인일 뿐이었다. 허융더가 지주와 맺은 임대차계약서 마지막 조항에는 “만일 지방정부에서 허가하지 않으면 계약은 무효가 된다”고 명시돼 있었지만, 허융더는 지방정부의 허가가 나기도 전에 임차한 땅을 조선 농민에게 재임대했다. 법적으로 허융더와 조선농민이 맺은 계약은 무효였다.

미개간지를 임차한 직후, 조선 농민들은 벼농사를 짓기 위해 20여 리 떨어진 이퉁허(伊通河)의 물을 끌어오는 수로 공사를 시작했다. 수로는 폭과 깊이가 각각 10m, 길이가 8km에 달했다. 수로가 지나가는 땅도 사유지였지만, 조선 농민은 지주에게 아무런 양해도 구하지 않고 수로 공사를 단행했다.

중국 농민들은 당연히 반발했다. 남의 땅을 제멋대로 파헤쳐 수로를 놓는 것도 문제였지만, 멀쩡한 땅이 두 쪽으로 갈라지고, 댐을 쌓는 바람에 하천을 통한 뱃길이 막히고, 수로 부근 논밭이 상습 침수지역이 되는 것이 더 큰 문제였다. 지방정부는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수로 공사를 중단할 것을 명령했지만 조선 농민은 그대로 밀어붙였다.

창춘 주재 일본영사는 ‘일본 국민’인 조선인 보호를 구실로 기관총으로 무장한 일본경찰 60여 명을 싼싱바오로 파견했다. 조선 농민의 수로 공사는 엉뚱하게도 중국과 일본의 외교문제로 비화했다. 일본 경찰의 보호 아래 수로가 완성되자, 격분한 중국농민 400여 명은 농기구를 들고 800m가량의 수로를 막았다. 일본 경찰은 수로를 파괴하는 중국농민에게 발포했지만 다행히 사상자는 없었다. 7월1일의 충돌 이후 중국과 일본이 외교적으로 옥신각신할 뿐 완바오산 일대에서 더 이상의 무력충돌은 없었다. 하지만 일본영사관의 허위 정보와 이를 받아쓴 오보 탓에 조선에 이주한 중국인만 억울하게 수난을 겪었다.

 

(중략)

 

인천의 중국음식점 일화루(日華樓)는 ‘이 집 주인은 일본인이오’ 하고 큼지막하게 써 붙였다. 일화루 주인이 일본인인지 중국인인지는 알 도리가 없었지만, 중국집 이름이 중화루(中華樓)가 아닌 것만으로도 일화루는 피해를 보지 않았다.

서울 서소문정에 사는 중국인들은 폭동 기간에 조선옷으로 변장을 하고 다녔는데, 조선옷을 사러 가는 것도 위험하다고 느낀 사람들은 일본 옷을 사다 입었다. 하지만 게다(일본 나막신)가 발에 맞지 않아 기우뚱거리며 걸어서 멀리서도 한눈에 가짜 일본인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가짜 일본인들이 폭도에게 발각되면 더 심하게 구타당했다.

7월5일 오후 7시, 서울의 중국영사관에는 4000여 명의 중국인 피난민이 모여들어 입추의 여지없이 혼잡했다. 어수선한 영사관 한구석에서 별안간 여자의 비명이 들렸다. 8000개의 눈동자는 일제히 비명을 지른 여자에게 쏠렸다. 배가 남산만큼 부른 임신부가 산기를 느끼고 지르는 비명이었다.

신당리에 사는 중국인 주수행의 아내는 몇 시간 동안의 진통 끝에 쌍둥이를 낳았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가까스로 탈출해 찜통 같은 영사관에서 의사는커녕 산파의 도움도 없이 쌍둥이를 출산했지만, 다행히 산모와 쌍둥이 남매 모두 건강했다. 피난민들은 아수라장에서 태어난 쌍둥이를 보고 오랜만에 환하게 웃으며 연신 축하의 인사를 건넸다. 그밖에도 7월12일 평양의 중국인 피난민 천막에서 진씨가 쌍둥이를 낳는 등 폭동 기간 피난민 수용소에서 태어난 쌍둥이가 무려 다섯 쌍이나 됐다.

7월5일, 서울 돈의동 열빈루에서 말끔한 신사복을 입은 조선인 네댓 명이 중국요리를 먹고 나왔다. 열빈루 주변을 배회하던 청년 몇 사람이 신사들을 에워싸고 을러대기 시작했다.

“이놈들, 네놈들도 조선 사람이냐. 이와 같은 불경기에 뱃속 편하게 요리 먹으러 다니는 것도 괘씸한 일이거늘 조선 동포는 만주에서 되놈에게 박해를 당하는 판에 너희 놈들은 명색이 신사니 유지니 하면서도 되놈에게 돈을 주고 요리를 먹는단 말이냐. 너 같은 놈들은 봉변을 당해도 싸다!”

청년들은 신사의 뺨을 후려갈겼다. 양복쟁이 신사들은 아무런 반박도 못하고 그저 “예, 잘못했습니다. 우리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하며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서 더 큰 곤욕을 가까스로 피했다.

 

(중략)

 

1931년 7월, 완바오산 사건 직후 조선 전역에서 발생한 중국인 배척 폭동은 우리 역사상 가장 수치스러운 사건 가운데 하나였다. 중국인 배척 폭동에는 분명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했다. 일본 경찰은 ‘일본 국민’인 조선인 보호를 구실로 중국 농민들에게 총격을 가했고, 창춘 주재 일본영사관은 김이삼 특파원에게 거짓 정보를 제공했으며, 평양에서 최악의 폭동이 발생한 날 밤 경찰은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역사학자들은 곧잘 중국인 배척 폭동이 조선인과 중국인을 이간질하려는 일본의 교묘한 음모 때문에 발생한 불상사였다고 설명하지만, 설령 그러한 음모가 작용했다 하더라도 조선인이 100여 명의 무고한 중국인을 살해한 책임을 면할 수는 없다.

조선에서 벌어진 중국인 배척 폭동은 즉각 중국에도 알려졌다. 박해받던 조선 농민들의 신변은 더 위태로워졌고, 조선에서 중국인이 그랬던 것처럼 만주의 조선인들도 창춘의 일본영사관으로 피신했다. 다행히 중국에서 조선 농민들에 대한 보복 폭행은 발생하지 않았다.

김이삼 특파원은 중국인과 조선인 앞으로 사과문을 발표했다. 한용운, 안재홍, 송진우 등 민족지도자들은 중국인 배척 폭동이 조선인 전체의 의사가 아님을 천명하고 중국 정부와 중국인들에게 고개 숙여 사죄했다.]

 

 

 

 


보면 전봉관 교수의 기술이 그래도 제일 객관적인 것 같습니다. 

 

관동군이 비밀리에 배후에 개입했다는 건 그냥 짐작인 모양인데, 사실 '비밀리에' 공작을 벌였다면 무슨 문서 등의 근거가 남아있을 수는 없지요.

때문에 사건의 전말과 개연성을 봐야 관동군이 이 만보산 사건에 개입했을 가능성을 추측할 수 있을 듯 합니다.

 

전봉관 교수의 글을 보면 일단 만보산 일대의 조선인 농부들은 요즘 말로 이야기하면 '전전세' 계약을 맺은 것입니다. 엄연히 불법인데 아마 임차료가 싸서 그랬으리라 봐야겠죠. 조선인 농부들은 전전세 임차 후에 벼농사를 짓기 위해 수로 공사를 하는데, 엄연히 중국인 지주가 따로 있고 자기네 전전세 임차지도 아닌 땅에다 땅주인 허락도 없이 멋대로 '폭과 깊이가 각각 10m, 길이가 8km에 달하는' 수로 공사를 감행합니다.

 

사실상 조선인 농부들이 자신들이 법적으로 '일본인'임을 악용하여 중국 공권력(당시 이 지방은 장학량 치하)을 개무시했던 것이죠. 중국 경찰이 나서서 조선인 농부들을 몰아내니 조선인 농부들이 일본 경찰에 요청하여 일본 경찰이 출동합니다. 일단 이 조선인 농부들은 법적 일본인이고 일본 경찰이 출동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죠. 일본 경찰이 조선인 농부들 편을 들어주어 수로가 완성됩니다. 그러자 중국인 농부들이 열받아서 400명이 출동하여 수로 8km 중에서 800m 정도를 망가뜨리고 일본 경찰이 출동합니다. 중국 경찰도 출동한 가운에 양측이 발포합니다. 아마 공포만 쐈는지 부상자도 없었습니다.

 

전말을 보면 현지 조선인 농부들이 일본 빽 믿고 현지 중국인들과 중국 공권력을 개무시하여 일어난 사건이라고 밖엔 보여지지가 않습니다. '폭과 깊이가 각각 10m, 길이가 8km에 달하는' 수로 공사를 제멋대로 감행한 것이 사건의 원인인데 관동군이 이런 것까지 개입했으리라고 보면 좀 괴랄하죠.

 

더구나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공동으로 장춘에 파견한 특파원인 김이삼 기자의 오보 사건도 그렇습니다. 장춘 주재 일본 영사관이 관동군 지시받고 잘못된 정보를 김이삼 기자에게 줘서 그랬다는데... 이것도 아무 증거는 없고 그냥 그랬을 것이야... 뭐 이거거등요.

 

싼싱바오(三姓堡) 동포 수난 갈수록 심해져. 200여 동포 또다시 피습. 완공된 수로를 전부 파괴. 중국농민 우리 동포를 대거 폭행. (창춘 김이삼 특파원 급전)

 

중국 관민 800여 명과 200여 명 동포 충돌 부상. 대치한 중·일 관헌 한 시간 여 교전. 중국 기마대 600여 명 출동. 급박한 동포 안위. (창춘 김이삼 특파원 급전)

 

호외 내용이 이건데... 무슨 크게 잘못된 것도 없어 보이거든요. 죽거나 중상자가 없다는 거지 수백명이 떼거지로 충돌하고 양측에서 위협하려고 총을 쏴대고 이런 건 사실이니까요. 장춘 주재 일본 영사관이나 김이삼 기자나 뭐 현지에 있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 상황인데, 직접 현지에 가보지 않은 김이삼의 잘못이지 무슨 관동군이 일본 영사관에 김이삼이한테 허위 정보 주라고 시켰다고 하는 건 너무 궁색한 음모론인 것 같습니다. 전봉관 교수 글에 보면 조선일보 서울 본사에서 급히 호외판을 찍느라 김이삼 기자 글에는 '부상'인데 호외에는 '살상'으로 잘못 오기되어 나갔다고 하고 사실 이게 결정적인 듯 하거든요. 이게 관동군하고 도대체 무슨 상관인지...

 

중간에 강준만 교수 글에도 나오듯이 만보산 사건 이후 만주국이 성립되자 만주 드림을 쫓아 만주로 100만명에 달하는 조선인들이 나갔다는데... 이게 말이죠. 만주에서는 일본이 갑이니 법적 일본인인 우리도 일본 빽으로 만주가서 좀 득을 보자는 생각이 당시의 조선인들에게 분명 있었으리라고 봅니다. 당장 만주국 성립 전인 만보산 사태 때도 재만 조선인들이 저리 중국인들과 중국 공권력을 개무시하는 거 보세요.

 

암튼 만보산 사태는 무슨 관동군의 음모니 일제가 중국인과 조선인을 이간질하려는 음모니 이런 건 말짱 우리 측의 자기합리화가 아닌가 싶습니다. 처음 발단부터 끝까지 대부분의 과실은 조선인들에게 있었고 사실 중국인들 입장에선 조선인들이 관동대지진에서 학살당한 거나 마찬가지로 억울하다 봐야죠. 만보산 사태에서 중국인들 때려죽인 조선인들이나 관동대지진에서 조선인들 쳐죽인 일본인들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양쪽 모두 유언비어에 속아서 그런 광란극을 벌인 거죠.

 

관동군이 만보산 사태를 만주 침략에 이용하려고 들었다면 애초에 만보산에서 조선인 농민들이 중국인들에게 수십명 맞아죽도록 사태를 몰아갔었어야지요. 총격전 벌일 때 중국인 농민 몇 명 죽였으면 그쪽에서도 열받아서 수적으로 밀리는 조선인들을 마구 쳐죽였을 것이고 그럼 관동군이 '중국인이 (법적) 일본인 수십명 살상했다 워워~~' 이러며 군사적으로 일을 벌일 빌미가 마련되는 것이거든요. 이런 쉬운 길을 놔두고 웬 장춘 주재 기자한테 허위 정보를 제공하여 조선에 반 중국 폭동을 일으키겠다는 복잡한 계획을 세울 리가 있나요? 애초에 김이삼이 영사관에서 들은 정보는 만보산에서 양측간에 몸싸움, 총격전, 부상 이 정도였던 모양인데 이 정도 정보로 조선에 대폭동 일어나리라는 걸 어떻게 관동군에서 예상하고 음모를 꾸민다는 건지...

 

조선에 반중국 폭동 일어난다고 일본한테 무슨 큰 이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죠. 암튼 만보산 사건은 일본에게 괜히 책임 떠넘기지 말고 우리부터 반성해야 할 사건이 아닌가 합니다.


출처 :  http://cafe.naver.com/historygall/28010




출처 : THIS IS TOTAL WAR
글쓴이 : 어하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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