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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간다의 살인마 등극

구름위 2014. 2. 26.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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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1월 25일 우간다의 살인마 등극


영국령 동아프리카였다가 1962년 독립한 신생국 우간다의 나날은 험난하고 고통스러웠다. 원래는 왕국으로 독립했다가 그 왕이 대통령이 되는 공화국으로 변신했지만, 총리였던 오보테가 쿠데타를 일으켜 전직 왕 겸 대통령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았다. 우간다의 대통령은 정부수반과 군 최고사령관의 지위를 겸하는 등 강력한 권한을 가진 자리였다. 심지어 단원제인 82석의 의...회도 그 중 27석은 대통령이 임명할 수 있었다. (아프리카판 ‘유정회’라고 하겠다. ) 이 위엄 가득한 대통령은 영연방 회의에 참석차 싱가포르로 떠난다. 불안한 정정의 신생국 대통령으로서는 담대한 외유였지만 그에게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193센티미터의 거구의 육군 참모총장은 오보테의 ‘믿을맨’이었다.


이 육군 참모총장의 군 경력은 영국군에서 시작된다. 제대로 된 교육은 받은 적 없지만 군인으로서는 꽤 능력을 발휘한 그는 영국군의 일원으로 아시아의 버마 전선에까지 와서 일본군과 싸웠고, 그 뒤 케냐에서는 역시 영국군으로서 독립을 위해 일어선 케냐인들을 공격하는 일익을 담당하기도 했다. 영국군이 심혈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름의 공을 들여 만들어낸 일종의 ‘살인 병기’였다고나 할까. 영내 헤비급 챔피언을 지내기도 했다는 그는 대통령이 외유를 한 틈을 타서 간단히 정권을 장악해 버렸다. 1971년 1월 25일이었다. 육군 참모총장은 대통령으로 그 직함을 갈아낀다. 우간다 신임 대통령 이디 아민의 등장이었다.


대통령이 된 후 그는 의회를 해산하고 정당활동을 금지시켰다. 이때만 해도 부패한 오보테 정권에 분노하고 있던 우간다 시민들은 새 대통령에게 지지를 보냈다고 한다. 하지만 곧 이 전직 권투 헤비급 챔피언이자 영국군 아프리카 중대 장교였던 이디 아민은 상상도 못할 만행을 저지르기 시작한다. 일단 전임 대통령 오보테의 사람들, 3천 명의 장교들과 1만 명의 시민들이 저승길로 간 것이 시초였다. 그 뒤 그에 반대하거나 삐딱한 사람들은 아낌없이 체포되어 서슴없이 살해된다. 최소한으로 줄여 잡으면 10만에서 일설에는 80만에 이르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토막난 채 늪지대로 던져졌다.

원래 심심찮게 빨래하는 여인들이나 미역 감는 어린이들을 습격했었던 우간다의 악어들은 이디 아민 정권 내내 포식을 하는 바람에 마치 야성을 잃은 듯 온순해져 동물학자들을 경악시켰다는 전설이 전해질 정도.

아민의 기행은 다방면으로 행해졌다. “각하, 원수, 모든 지상동물들과 바닷 속 물고기들의 신, 좁게는 우간다에서 넓게는 아프리카에 이르기까지 대영제국을 무찌른 정복자.”라는 어마어마한 호칭으로 그를 일컫게 했으며, 모든 공문서에 그렇게 쓰게 했다. 스코틀랜드 용병대의 일원으로 활약한 전력 때문인지 그는 스코틀랜드를 광적으로 좋아했고, 스코틀랜드를 잉글랜드의 압박에서 벗어나게(?) 하겠다며 스스로 스코틀랜드의 왕으로 일컫기도 했다. 탄자니아와 분쟁 과정에서는 무하마드 알리를 심판으로 대통령끼리 권투 시합을 벌여 보자고 호언하는가 하면, 우간다 공군의 폭격 실력을 보여 주겠다며 범아프리카 기구 내빈들을 모아 놓고 호수 위에 설정한 ‘케이프타운’ (남아공의 도시, 즉 인종차별에 반대한다는 시위였다)을 폭격하게 했다가 목표물이 빗나가자 전 공군 참모총장을 목표물로 설정, 폭격에 기어코 ‘성공’시키는 엽기도 선보였다.

기타 등등의 잡다한 이야기는 생략하기로 한다. 문제는 두 가지다. 첫째는 그 역시 제국주의의 사생아라는 것. 그가 집권했을 때 가장 먼저 승인하고 지지의 제스처를 했던 것은 영국과 이스라엘이었다. 전임 오보테 정권이 추진한 자원 국유화로 영국은 약이 올라 있었고, 우간다를 거점으로 삼아 수단에서 정치적 분쟁을 일으켜 아랍 연합의 변죽을 울리려던 이스라엘은 자신이 유리한 쪽으로 주판알을 퉁기고 있었다. 물론 이 둘은 늑대를 피하려다가 호랑이를 만나게 된 셈이지만.


둘째, 그는 그 악행을 저지르고도 천수를 다하고 호화생활까지 하면서 눈을 감았다는 것이다. 오래도 살았다. 1923년생 (28년생이라고도 한다)에 2003년 졸했으니 우리 나이로 여든 하나. 많게는 80만명이 죽었다는 우간다 인민은 끝내 그를 단죄하지 못했다. 처음에는 카다피 대령에게로 도망갔다가 일설에 따르면 그 딸을 건드린 다음에는 사우디로 내뺐고 그곳에서 “정치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해 주고 받은 빌라에서 유유자적 여생을 즐기다 갔다. “아버지의 시신은 ‘이슬람 전통에 따라’ 제다에 묻혔다.”고 발표한 그의 아들은 지금 우간다에서 정치인 노릇을 하고 있다고 한다. 이 자발없는 현실에도 어이가 실종될 지경이지만, 우간다 정부의 논평은 한층 더 무력했다. “그의 죽음은 죄값을 치른 것”이며 “그의 죽음과 장례는 우리들에게 있어 나쁜 과거와의 단절을 의미한다. ” 는 것이었다.



이디 아민이 쿠데타로 정권을 잡던 오늘,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이고도 이래도 한 세상 저래도 한평생 그 거구의 배를 두드리며 수십 명이나 되는 자식들을 싸지르고 살았던 한 살인마를 되새기면서, 끝내 그를 단죄하지도 못하고, 그의 죽음을 ‘축하’하고만 앉았던 우간다 사람들의 무기력에 혀를 차는 와중에 들려온 한 소식에 나는 그만 머쓱해지고 만다. 전두환의 연희동 사저를 취재 중이던 이상호 기자가 ‘전직 대통령 사저 경호를 방해한 현행범’으로 연행되었다는 뉴스가 그것이다. 자신의 야욕을 채우기 위해 쿠데타를 일으키고 죄 없는 이들의 목숨을 앗아갔던 독재자들의 말로가 어찌 이리도 비슷하게 평탄한지. 어쩌면 전두환은 “어허 왜 나만 가지고 그래. 아민은 80만명인데 나는 200명 밖에 안된다고.”라고 뇌까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