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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바꾼 스파이 체포

구름위 2014. 2. 26.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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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2월 3일 역사를 바꾼 스파이 체포 

정보 기관을 필요로 하지 않는 정권은 없다. 우리 나라에 초절정 울트라 파워 캡숑 진보 정권이 들어서라도 국정원을 폐지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만약 결연히 그럴 정권이라면 그냥 스스로 무너지는 것이 낫다. 문제는 정보기관을 정권의 입맛에 맞게 길들여 사람들을 옥죄고 불법을 자행하는 것이지 효율적인 정보 수집과 방첩 기능을 갖춘 정보기관은 국가라는 통치 체제가 포기되지 않는 한 필요할 것이기 때문이다. 

“의심나면 다시 보고 수상하면 신고하자”는 표어가 전국 도처에 나붙었을만큼 한국은 ‘반공’ 뿐 아니라 ‘방첩’에 노이로제가 걸렸던 사회였다. ‘간첩은 표시없다 삼천만이 살피’고 ‘어제 만난 이웃 사람 수상하면 다시 보아’야 하며 담배 몇 년을 끊었다가 다시 담배를 사게 된 이웃집 아저씨는 간첩으로 신고돼 곤욕을 치렀고 동네 꼬마들끼리 모여서 어느 집 아저씨가 밤새 라디오를 듣는 거 같더라며 간첩 아니냐며 수군거렸으니 닐러 무삼할 것인가. 

북한은 그만큼 남한 사회의 정보를 수집하고 ‘결정적 시기’를 준비하기 위해 무수한 간첩을 보냈고 남한이나 미국 또한 그에 뒤지지 않는 첩보전을 수행했을 것이다. ‘남조선 특무’에 마음을 졸인 것은 북한도 마찬가지였으니까. 통일이 되거나 하여 북한 정치보위부와 남한 국정원의 기밀들이 공개된다면 기절초풍할 사실들이 드러날 지도 모른다. 물론 그 전까진 아무도 모르는 것이고 몰라야 하는 사실들이지만. 

그런데 대개 진짜 무서운 간첩, 스파이란 담배값이나 버스비를 몰라 헤매는 어설픈 이방인이라기보다는 ‘두더지’라는 은어로 불리우며 상대의 핵심에 암약하여 정보를 캐내고 역정보를 흘리고 상대의 스파이망을 찾아내는 이들이었다. 그들은 외국에서 침투한 자들이기보다는 대개 자국민이었고 자국에서 그 실력을 인정받는 엘리트들인 경우가 많았다. 미국과 소련의, 서구와 동구의 수십년 첩보전 과정에서 그런 인물들은 별자리를 꾸밀만큼 많았고 그들은 역사를 바꿔 놓을 정도의 역량을 발휘했다. 1950년 2월 3일 체포된 영국인 핵물리학자 클라우스 푹스도 그런 존재였다. 

1911년 독일의 유서깊은 도시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난 푹스는 젊어서 공산당원이 됐지만 나찌 집권 뒤에는 영국으로 망명하여 영국에서 활동한다. 양자역학을 전공한 그는 에딘버러 대학 교수가 됐고 영국의 핵 개발에 참여한다. 나찌도 핵 개발을 목표로 연구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으니만큼 영국과 미국도 필사적이었다. 그런데 그 연구 프로젝트는 푹스에 의해 낱낱이 소련에 전달됐다. 그는 독일에 공격받는 소련을 돕는 것이 자신의 할 일이라고 굳게 믿었고, 자신을 둘러싼 비밀과 단속의 틀에서 벗어나는 것을 ‘자유’로 여겼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사회적 힘으로부터 완전히 독립시킬 수 있었기 때문에 나는 자유인이 된 듯 했다.” 

원자폭탄 실험 후 의기양양한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이 스탈린에게 “엄청난 규모의 신무기”가 개발됐음을 알리자 스탈린은 점잖게 “일본에 사용했으면 좋겠군요.”라고 되받는다. 스탈린은 수화기를 내려놓고 트루먼 이 바보 녀석....넌 트루먼 쇼를 하고 있는 거야 라며 키득거렸을지도 모른다. 그는 푹스의 보고를 받아 핵 개발의 모든 것을 실황중계 받고 있었던 것이다. 소련 KGB 문서에 따르면 푹스와 처음 접촉한 것은 미국이 원폭 계획을 상정하기도 전인 1941년 8월이었다. 


푹스의 정보를 통해 소련은 예상보다 훨씬 빠른 1949년 원폭 실험에 성공했고 이에 트루먼 대통령은 수소폭탄 계획을 세우지만 그 계획도 푹스에 의해 컨닝됐으며 1950년 초 스탈린은 미국의 우라늄과 플루토늄 생산량까지 보고받고 있었다. 그 정도 양으로는 소련에 전면적인 핵전쟁을 일으키지는 못하리라는 판단을 한 스탈린이 뻔질나게 모스크바에 찾아와 “남조선 해방 전쟁”을 일으키자는 김일성과 박헌영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는 설도 있다. 아득하게 먼 나라에서 살던 스파이가 일으킨 날개짓은 극동에서 태풍이 되기도 했던 것이다. 

푹스를 비롯하여 소련을 위해 일한 영국인 간첩 킴 필비 등 케임브리지 출신 엘리트들은 돈보다는 신념에 따라 움직였다. “동이나 서나 창녀일 뿐이다. 그러나 나의 창녀는 내 아이를 가졌다.”는 브레히트의 말처럼 소련이 기대했던 사회주의 사회는 아니었을망정, 자본주의를 극복한 새로운 사회라고 믿고 그를 위해 자신의 생을 걸었던 것이다. “조국이란 없다.”는 신념을 가진 이들이었을망정 그들의 ‘조국’에는 그럴 수 없이 심대한 배신자들이었다. 그리고 푹스는 “역사를 바꾼 유일한 물리학자”가 됐다. 

푹스는 체포되어 14년 형을 선고받는다. (납북됐다 돌아와서 이웃 사람에게 북한도 꽤 잘 살더라는 말을 한 죄로 사형을 선고한 극동의 나라와는 좀 차원이 다르다) 그나마 막후 교섭을 통해 그 형기를 채우지 않고 석방돼 자신의 고향 동독으로 돌아간다. 그는 거기서 “나는 지금도 맑스주의자이며 공산주의를 위해 노력하겠다.”면서 기염을 토했고 그 후 중국의 핵개발에까지 결정적인 도움을 주는 등 활동을 멈추지 않으며 여생을 보냈다. 그가 죽은 것은 맑시스트들이 세운 나라 동독의 깃발이 내려지기 1년 전, 1988년이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것을 살아생전 보았다면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냉전 시대 이전 동서의 첩보전은 그야말로 불꽃을 튀겼다. CIA의 핵심을 지휘했던 올드리치 에임스가 간첩으로 밝혀져 미국을 발칵 뒤집기도 했고 푹스를 포섭했고 저 유명한 로젠버그 부부와 접촉했던 전설적인 간첩 페클리소프의 이야기는 막후의 20세기 현대사에 다름아니다. 신념에 따라, 그리고 돈에 팔려, 또는 여자(남자)에 낚여서 수많은 이들이 스파이 노릇을 했고 국가라는 이름의 통치 도구는 그들의 정보를 취합하고 걸러 내고 더 고급의 정보를 빼내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그 숨가쁜 막후의 역사를 읽다가 갑자기 “음지에서 일하며 양지를 지향”하며 “정보는 국력”이라고 자랑하는 대한민국 국정원의 현실을 보면 갑자기 백화점 명품관을 둘러보다가 2천원 든 지갑을 펴 본 심경으로 쪼그라들고 침울해진다. 음습한 오피스텔에 앉아서 ‘오늘의 유머’ 사이트에 들어가 자국민들을 상대로 ‘심리전’을 펼치고 앉았고 그걸 뭐라 했더니 ‘명예훼손’으로 고발장을 들이미는 이 찌질하고 서글픈 정보 기관에게 너와 나의 세금이 쓰여지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소매치기에 찢긴 지갑을 보는 것처럼 망연해지고 비참해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