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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 폴로, 그리고 문순득

구름위 2014. 2. 26. 16:01

1324년 1월 8일 마르코 폴로, 그리고 문순득

 

1324년 1월 8일 70된 이탈리아 노인 하나가 임종을 맞고 있었다. 뭔가에 대해 말할 때마다 하도 백만 백만 그래서 “백만(百萬)의 마르코”라는 별명까지 붙었던 이 허풍선이에게 신부는 이제 그만 생전의 당신 거짓말을 회개하고 당신이 늘어놓은 허황된 이야기들이 거짓말이라고 고백하라고 타일렀지만 이 노인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내가 보고 들은 것의 반도 이야기하지 못했소.” 마침내 ‘백만의 마르코’ 마르코 폴로는 숨을 거둔다. 사람들은 그가 떠벌인 거짓말을 들먹이며 고소를 금치 못하고 있었지만 어떤 이들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그가 들려 준 신비로운 이야기들을 되새기고 있었다. 정말일까? 아냐 그럴 리가 없어. 근데 사실이라면 진짜 환상이잖아?

 

마르코 폴로. 아버지와 숙부와 함께 콘스탄티노플 너머 오리엔트를 거쳐 중앙아시아를 지나 세계를 호령하던 몽골 제국의 심장부에 가서 쿠빌라이칸의 신하가 되고 중국의 한 지방의 지방관까지 지냈다는 그의 경험을 담은 <동방견문록> (원제는 밀리오네이고.... 일본을 거쳐 들어오면서 동방견문록이 됐다고 한다)의 주인공이지만 그 책은 그가 쓴 것이 아니다. 이웃 도시 국가 제노바와의 전쟁에서 포로가 돼 감옥에서 만난 연애 소설 작가 루스티텔로가 마르코 폴로의 구술을 받아 쓴 것이 그 책이되 그 원판본조차 남아 있지 않고 여기 저기서 가필되고 누락되고 윤색하고 과장한 구석이 하나쯤 보이는 각자 다른 판본으로 남았다가 수백년이 지난 뒤에야 그것들이 대충이나마 묶였으니 <동방견문록>의 작자를 마르코 폴로라고 하기에는 다소의 무리가 있다.

 

<동방견문록> 의 내용도 좀 황망한 것이 많다. 머리가 없는 괴물이라든가 하늘을 나는 코끼리라든가 테라노돈 급으로 커다란 새라든가 아라비안 나이트에 등장할 법한 이야기들이 널려 있는 것이다. 당장 그가 중국에 갔는지조차 의심하는 의견도 많다. 한때 독일과 예루살렘 근처까지 육박했던 동방의 대제국에 대한 정보는 근동 지역에 널려 있었을 것이고 그는 그런 정보를 집대성한 정도가 아닌가 하는 의심이다.

 

중국에서 지방관까지 했고 쿠빌라이칸의 각별한 총애를 받았다는데 중국 역사책에는 한 줄도 기록돼 있지 않고 중국어나 몽골어보다는 페르시아어로 된 단어를 많이 구사하고 있다거나 하는 등등이 그렇다. 그러나 그 부정확함에도 불구하고 마르코 폴로의 여행담은 십자군 전쟁에서 패하여 전전긍긍하던 유럽 사람들의 상상력의 날개를 펴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그의 기록이 사실로 드러난 것도 많다. 줄무늬 사자는 호랑이를 말하는 것이었고 물 속을 헤엄치는 용이란 악어였고 불타는 돌이란 석탄, 타지 않는 천이란 석면을 의미했으며 원나라 때 사용되던 ‘종이 화폐’에 대해서도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들이 모르던 세계에 엄청난 문화와 재물들이 넘쳐난다는 사실은 이를 믿든 믿지 않은 유럽인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 조잡한 인쇄 시설 속에서도 마르코 폴로의 저작은 성경 다음가는 베스트셀러가 됐고 수많은 여행가들의 교본이 됐다. “중국의 어느 항구에는 모두 1만 2천개의 돌다리가 있고, 게다가 이 다리의 아치가 얼마나 높은지 그 아래로 배들이 돛대를 접지 않고도 쉽게 지나다닐 수 있다.지팡구(일본)는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금이 나고 궁궐의 보도들 역시 순금으로 되어 있고 두께는 두 손가락 정도다.” 라고 떠벌여 놨던 것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그가 묘사한 중앙아시아와 동아시아의 파노라마 자체가 유럽 사람들에게는 로망이고 유혹이 됐다. 200년 뒤의 콜럼버스는 그 중의 하나일 뿐이었다.

 

그로부터 500년쯤 뒤 1805년 지구 반대편, 마르코 폴로가 지팡구와는 달리 인색하게도 딱 한 줄로 묘사했던, “대칸이 승리하자 복속한 네 나라 중의 하나 ‘카울리’로 나타나는 고려의 후신 조선 땅의 음력 1월 8일에 또 한 명의 여행자가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 이름은 문순득. 홍어 장수였다. 그는 홍어를 싣고 장사를 다니던 중 1801년 풍랑을 만나 동지나 해를 떠돌다가 오키나와, 즉 유구국에 상륙한다. 장사에 능한 유구국 사람들은 이 불운한 사람들을 잘 돌봐 줬고 청나라에 가는 사신의 배가 뜰 때 문순득 일행을 태워 줬는데 여기서 또 풍랑을 만나 이번엔 여송국, 즉 오늘날의 필리핀으로 표류하게 된다. 여기서도 장사 수완을 발휘한 문순득은 중국 상인들의 장사를 도우며 여비를 마련해 필리핀을 출발, 마카오를 거쳐 난징 지나 베이징 찍고 요동 가로질러 압록강 건너 서울로 왔다가 1805년 음력 1월 8일 고향에 돌아온 것이다.

 

마르코폴로에게는 루스티첼로가 있었지만 문순득에게는 정약용의 형 정약전이 있었다. 흑산도에 귀양와 있던 정약전은 이 기막힌 표류담을 듣고 기록으로 남긴다. 그게 ‘표해시말’이라는 기록이다. 조선 사람으로서는 그야말로 보기 드문 기록이고 조선 정부가 나서서 탐해야 할 내용이었지만 귀양객의 호기심 외에는 그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었다. 그저 우리와는 관계없는 오랑캐의 나라, 중국 땅 수만 리 밖의 나라 사정을 알 것이 무엇이 있겠느냐는 모르쇠가 있었을 뿐.

 

반면 홍어장수 문순득은 몇 년 뒤까지도 필리핀 말을 잃지 않고 있었다. 도무지 어느 나라 사람들인지도 모를 표류객들이 제주도에 왔을 때 조선 조정은 청나라로 이들을 보냈다. 그런데 청나라도 이들을 다시 돌려 보냈다. “무슨 나라에서 왔는지 모른다 해 알아서 하라 해,” 이들은 다시 제주도에 귀환하여 고통스런 억류자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별안간 구세주같이 문순득이 그들 앞에 나타났다. 복장을 보고 그들이 필리핀 사람인 것을 단번에 알아챈 문순득이 필리핀 말로 그들에게 말을 걸었을 때 아마 그들은 문순득이 천사로 보였으리라. “이들은 여송국 사람입니다.”는 문순득의 말 한 마디로 그들은 고향으로 갈 길이 열렸고 중국을 통해 송환됐다.

 

그래도 아무도 여송국 말을 배우려고도 하지 않았고 여송은 어떤 나라이고 누가 지배하고 있으며 그 땅을 지배하는 백인들은 왜 자꾸 조선 근해에 와서 설치는 것이며 그들은 그 넓은 바다를 어떻게 건너 왔는지에 대해 궁금해 하는 사람은 적었다. 아니 호기심 넘치는 조선 사람들의 DNA야 그때라고 다르지 않았겠지만 그 호기심을 체계화하거나 진취적으로 승화시키는 일은 극히 적었다. 동네 아이들 정도나 문순득의 이야기에 초롱초롱했을까. 기나긴 여행 끝에 북경에 도착한 문순득 일행을 만난 조선 사신은 이렇게 노래했다. “흑산도 민속은 매우 어리석어 바다에서 이익을 쫓느라니 대부분 곤궁하구나......(중략) 원하노니 네 고향엘 가거들랑 농가에 안식해서 농사나 힘쓰시게.”

 

 

마르코 폴로에게 보여준 유럽 사람들의 관심과 문순득에게 보여 준 우리 나라 사람들의 그것은 그렇게 태평양만큼의 차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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