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서(미국ㆍ스페인)전쟁 - 1898년
세계적인 강국었던 스페인 제국의 지위는 19세기 후반부터 저하하기 시작하여 태평양, 아프리카 및 서인도 제도의 소수에 산재한
식민지밖에 남지 않았다. 하지만 이 대다수도 독립을 위한 운동을 반복하고 있었다. 필리핀에서는 에밀리오 아기날도, 쿠바에서는
안토니오 마세오와 막시모 고메즈, 호세 마르티 등 수십년에 걸친 게릴라전으로 스페인 정부를 괴롭혔다.
이러한 위협에 돈과 인적자원이 부족했던 스페인 정부는 쿠바 등에 수용소를 세워 주민과 독립군을 구분하여 지원한다는 작전을
포고했다. 스페인은 또 반역자로 의심되는 많은 사람들을 처형하고 마을에는 가혹한 징벌을 가했다. 1898년에는 쿠바 섬의 약 절반이
막시모 고메즈 장군이 이끄는 독립군에게 지배되자 스페인의 입장은 더욱 난처해지고 말았다.
쿠바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태는 미국 신문이 구독자 수를 늘려가던 시기와 일치했다. 1897년에는 <미국 부인을 발가벗기는 스페인
경찰>이라는 신문기자에 의한 날조기사를 계기로, 각 신문들은 스페인이 쿠바인들을 상대로 학살행위를 한다고 과대홍보하여
미국인들의 인도적 감정을 자극했다. 그리고 쿠바에 대한 개입을 촉구하는 노력도 증가되었다.
이 때문에 전쟁으로 길 외의 다른 압력, 미해군은 전쟁이 일어나기 약 1년 전부터 필리핀에서 스페인군을 공격하기 위한 계획을
작성했다. 서부로의 확장 및 아메리카 인디언들과의 대규모 교전의 종료는 미육군의 임무를 감소시켜 군의 지도자들도 새로운
임무를 갈망했다.
일찌기 미국인들 대다수는 쿠바가 자신들의 것이라고 여겨,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이란 이론에 근거해 플로리다 연안에
매우 매력적으로 보이는 섬들을 개척했다. 쿠바 경제의 대부분은 미국의 손에 있어서, 모든 무역은 미국과 이루어졌는데 몇 명의
재계인사들은 개전을 동시에 요구했다.
네브라스카 주의 상원의원이던 존 M. 새스턴은 <스페인과의 싸움은 모든 미국의 철도사업과 소득을 증가시킬 것이다. 이것은
모든 미국의 공장의 출력을 올리는 것이다. 그리하면 산업과 국내통상의 대부분이 자극을 받을 것이다>라고 천명했다. 그러던 중
1898년 2월 15일에 아바나 만에서 미해군의 전함인 <메인>이 폭발, 침몰해 266명의 수병을 잃는 사고가 발생했다.
폭발의 원인에 관한 증거는 여러가지 모순이 많고 결정적인 것은 없었지만, 뉴욕 저널, 뉴욕 월드의 두 신문을 필두로 한 당시
미국의 매스컴에서는 스페인 사람들의 비겁한 짓이 원인이라고 주장했다. Remember the Maine, to Hell with Spain!
(메인을 생각하라! 꺼져라 스페인!)이라는 호전적이며 감정적인 슬로건을 내건 신문보도는 한층 미국인들을 자극했다.
이러한 애국적이며 호전적인 풍조는 전쟁의 정당화를 뒷받침하게 되었는데, 폭발원인에 관한 전문가의 견해는 지금도 밝혀진
것은 없지만 연료이던 석탄이 우연히 발화하여 폭발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 일반적으로,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도 확인했다.
한편 석탄 자체에 그 원인을 찾는 것과 미국이 전쟁에 개입하도록 쿠바 혁명가들이 꾸몄다는 반론도 있지만 스페인이 전쟁에
소극적이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윌리엄 매킨리 대통령은 개전에 동의하지 않고, 여론이 진정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메인호의 폭발은 전쟁여론을 더욱 더
높이고 말았다. 스페인 수상이던 페라세데스 마테오 사가스타는 쿠바에서 관료들을 철수시켜 쿠바인들에게 자치권을 주는 등
전쟁을 막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그렇지만 이는 쿠바의 완전독립엔 불충분한 것이어서 상황을 크게 바꾸진 못했다.
4월 11일에 매킨리 대통령은 내전의 종료를 목적으로 한 쿠바로의 미군 파견을 요구하는 안건을 의회에 제출했다. 4월 19일에
의회는 쿠바의 자유와 독립을 구하는 공동선언을 승인하고 대통령이 스페인의 철수를 요구하기 위해 군사력을 행사한다는 것을
승인했다. 이로서 스페인과 미국은 외교관계가 정지되었다.
4월 25일에 연방의회는 미국과 스페인 사이에서의 전쟁상태가 4월 21일 이후 존재함을 선언했다. (의회는 4월 20일에 전쟁승인)
아바나 만에서 의문의 폭발사고로 침몰한 미국전함 <메인>, 자세한 설명은 이리로 -> http://blog.naver.com/mirejet/110138096843
전쟁은 아시아에서 먼저 일어났는데, 홍콩을 출항한 조지 듀이 제독의 미국 태평양함대가 마닐라 만에서 5월 1일에 벌어진 해전에서
파트리시오 몬토조 제독이 이끄는 7척의 스페인 함대를 공격했다. 6시간의 싸움 끝에 스페인 함대는 기함을 포함해 3척이 침몰하고
4척이 불타거나 파멸적인 상황에 몰렸었지만 미국함대의 피해는 부상자 7명 뿐 거의 무탈했다.
마닐라 해전의 결과, 필리핀의 스페인 해군은 괴멸했지만 마닐라에는 1만명 이상의 스페인 육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해전 후에
듀이와 회담한 필리핀의 독립운동 지도자인 에밀리오 아기날도가 이끄는 필리핀의 민족주의자는 미군의 지원과 상호연대하여
스페인군을 공격했다.
독립군은 1만명을 넘어 1898년 6월엔 루손 섬 중부를 제압하고 아기날도는 필리핀 공화국의 독립을 선언 후 잠정정부를 구성했다.
미국의 매킨리 정권은 마닐라 시를 점령하기 위해 웨즐리 E. 메리어트 소장의 지휘로 대규모의 파견군(2만명 남짓)을 급파했다.
6월 30일에 파견군 선봉부대, 7월 중순에 메리트 소장도 현지에 도착하자 8월 14일에 휴전협정이 체결되면서 스페인군은 항복했다.
필리핀인에 의한 보복을 두려워 한 스페인군은 마닐라에 필리핀군이 입성하지 못하도록 항복조건을 명시하여 스페인이 항복한 후,
필리핀의 통치는 미국이 장악하게 되었다. 이것은 독립운동 측으로부터 불만을 사게 되어 독립운동의 대상이 스페인에서 미국으로
옮겨가 미국 - 필리핀 전쟁으로 이어지게 된다.
6월 20일엔 미해군의 순양함 <찰스턴> 및 수송선 3척이 당시 스페인 식민지이던 괌을 포격하였다. 괌의 스페인 사령관은 전쟁이
일어난 것도 몰랐기에 사령관 자신이 항복을 선언하여 54명의 스페인 병사들과 함께 포로가 되어 송환되었는데 이후 괌은 미국의
점령하에 들어갔다.
한편, 5월 19일에 대서양측의 쿠바에선 파스쿠알 세르베라 제독이 이끄는 스페인 대서양 함대가 산티아고 만에 입항했다.
윌리엄 심슨 제독이 이끄는 미국 대서양 함대는 산티아고 만을 봉쇄하고 육해군이 공동으로 스페인 함대를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쿠바에 주둔하던 스페인군은 약 10만이 넘었지만 산티아고(산 챠고)만 부근에는 14,000명 정도 뿐이었다.
미국의 욱상병력은 의용 기병대인 러프 라이더스 연대를 포함한 약 17,000명이었다. 육상에서의 큰 싸움은 7월 1일 뿐이었지만
요충지인 산 후안 요새가 함락되면서 하루만에 끝났다. 이 때 러프 라이더스 연대의 중령으로 산 후안 고지전투를 지휘하여 영웅이 된
사람이 훗날 대통령이 된 시어도어 루즈벨트였다. 미군은 가르시아 장군이 지휘한 쿠바독립파를 원조했다.
7월 3일에 스페인 함대가 만 바깥으로 탈출을 시도했지만 미해군에 포착되어 공격을 받아 침몰, 좌초 혹은 항복 등으로 전멸했다.
미군은 스페인 함대를 격파해 쿠바 주변의 스페인이 관리하던 수로를 파괴했다. 이로 인해 보급이 막힌 스페인군을 상대로 미군은
안전히 병력을 상륙시켰다.
지상전은 스페인군보다도 열사병 및 풍토병이 기승을 부렸다. 하지만 약 한달 후 미군은 쿠바 섬을 장악하여 7월 25일에는 푸에르토
리코에 미군이 상륙했다. 스페인은 태평양 함대, 대서양 함대를 잃고서 전쟁을 수행할 능력을 상실했다. 8월 12일에 교전은 완료되어
형식상의 평화조약이 12월 10일에 파리에서 조인되어 1899년 2월 6일에 미국 상원의회는 이를 비준했다.
미국은 필리핀, 괌 및 푸에르토리코를 포함한 스페인 식민지의 대부분을 획득하여 쿠바를 보호국으로 두면서 사실상 지배하에 넣었다.
이후 미국의 국력은 비약적으로 증가하여 남북 아메리카 대륙과 태평양에서 스페인의 영향력이 일소되는 한편 미국이 이를 대체하는
형태로 패권을 이양받는 형태가 되었다.
스페인은 전후, 식민지를 상실하여 국력이 저하했고 신흥국가인 미국에게 패한 것으로 유럽에서의 국제적인 지위 및 발언력도 동시에
상실했다. 르네상스로부터 시작된 포르투갈, 스페인의 제국주의는 소멸하고 산업혁명에 지탱되어진 새로운 제국주의로 완전히 이행된
순간이 다가왔던 것이었다.
출처 : 루이스 페레즈 <쿠바 및 18세기 후반의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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