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틀빅혼(Little Bighorn) 전투 - 1876년
1870년대 미국 연방정부의 대통령인 그랜트는 선주민인 인디언에 대하여 유화정책을 펼쳤는데, 인디언을 불신했던
반 그랜트파는 외회에서 격렬히 대립했다. 1874년에 미주리군 사령관이던 필립 셰리던은 남북전쟁에서 활약했던 부하인
조지 암스트롱 커스터에게 명하여 인디언의 성지로 원정을 떠나게 했다.
인디언의 영지를 침범한 이들에 대해 연방정부가 협정을 위반했다고 여긴 인디언측은 강한 불신감을 안게 되었는데,
6월에 크룩의 부대는 크레이지 호스의 인디언 부대와 전투를 교환한 후 후퇴했다. 커스터의 소속이던 테리 부대는 리틀빅혼 강을
향하여 남하진군했다.
1876년에 육군장관이던 셔먼은 인디언 토벌군을 편성했다. 커스터는 제 7 기병대의 연대장으로서 참가를 허락받았다.
작전은 몬타나 주 남동부의 수우족 본거지를 기번대, 크룩대, 테리대가 세 방면에서 포위하여 섬멸하는 것이었다. 커스터대의
인디언 척후는 강 연안에 집결한 인디언 각 부족 1,500명의 티피 야영지를 발견했다.
테리, 기번대는 협공을 기획하여 26일에 총공격을 예정하여 커스터대를 남방의 강 상류로 파견했다. 이 때 기번은 커스터에게
<커스터군, 너무 욕심내지 말게, 인디언은 어쨌든 많으니까>라고 충고했다. 커스터가 가장 신뢰했던 인디언 척후인 리 족의
브래디 나이프 추장과 샌티 수우족과 프랑스인 혼혈척후인 미치 부이에도 <수우족이 많으니 조심하라>고 몇번이나 충고했다.
이들 척후는 전력면에서 불리함을 알고 유품을 맡기는 등 전사를 각오했다. 이 때 야영중이던 인디언 부족은 우호동맹을 맺었던
라코다와 타코마의 수우족, 샤이안족, 알라바호족 연합군으로 고르, 크레이지 호스, 투 문스 등 저명한 전사들이 참가했다. 이들은
종교행사인 썬 댄스와 백인의 거류지 정책에 토의하기 위해 연일 회담을 거듭했다.
6월 25일, 일요일 정오까지 커스터 부대는 야영지 인근에 도착했다. 한편 인디언측도 척후의 보고로 커스터 부대가 접근함을 알았다.
아침부터 인디언의 진영에는 싸움에 대비하기 위한 전령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인디언들은 밤늦게까지 춤추다가 새벽녘에서야
잠드는 이가 많았다. 낮에는 더위를 피하기 위해 움직임을 멈추고 느긋하게 말에게 풀을 먹이면서 낮잠과 헤엄으로 시간을 보냈다.
커스터의 부관이던 마커스 리노는 <신중히 움직여야 합니다>라고 진언했지만, 공명심에 빠진 커스터는 이를 귀담아 듣지 않고
본대를 세 부대로 나누어 리노 부대를 도하시켜 정찰을 하게 했다. 먼저 리노 부대가 행크파파족의 야영지를 급습했지만 행크파파족에
오글라라족이 가세하면서 격퇴당했다.
브래디 나이프와 롱샘 찰리 레이놀즈 등 척후들은 이 때 전사하였는데, 풀에 불을 질러 리노 부대는 연기에 휩싸여 산산히 흩어졌다.
크레이지 호스 등 오글라라족은 적의 숫자가 적은 것에 의심하면서도 동향을 파악하고 야영지의 좁은 강을 따라 하류로 향했다.
고르 등 행크파파족은 강을 건너 딥 계곡의 각 방면으로 말을 전진시켰다.
리노 부대가 상류에서 인디언 부대와 싸우던 사이, 커스터는 독단으로 공격을 명령했다. 커스터 부대는 강 동쪽에서 남쪽으로 향하여
메디신 테일 계곡을 넘어 딥 협곡을 건너던 순간 고르의 부대에게 공격을 받았다. 고르 부대가 북방 하류로 커스터 부대를 몰아넣는
순간에 인디언 연합부대는 반대측으로 진군해 커스터 부대를 남북에서 협공해갔다.
퇴각할 장소를 상실한 커스터 본대는 결국 전멸하여 커스터를 포함해 직속의 병사 225명 전원이 전사했다. 인디언측은 수우족만이
136명이 전사하고 160명이 부상당했다. 인디언들은 다시 리노 부대를 몰아넣었지만 이 때 기번의 부대가 도착하면서 인디언들은
물러났다. 이리하여 세기의 싸움은 막을 내렸다.
가끔 이 전투를 <인디언측에 의한 기습, 학살>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은데, 인디언들은 의식과 회의로 모였을 뿐, 싸움은 먼저
커스터 부대가 시작하여 촉발하였다. 블랙 에리크, 레드 호스, 리노를 비롯해 당사자들은 <기습을 먼저 한 것은 커스터였다>라고
증언했다. 인디언들도 상기처럼 많은 전사자를 내어 일방적인 학살로 보긴 어렵다.
커스터 부대는 다수의 인디언 척후를 투입했었는데, 대부분이 수우족과 적대관계였던 크로우족, 알리칼라족, 포니족 등이었다.
수우족의 고르 추장은 이 써움에서 어릴때부터 숙적이던 브래디 나이프 추장을 토벌했다. 알리칼라족은 현재도 브래디 나이프 추장의
춤을 추면서 이 추장의 용맹을 전하고 있다고 한다.
커스터 부대의 패인으로는 여러가지 설이 있는데, 특히 커스터 배하의 제 7 기병대는 구성원들이 모두 동유럽에서 건너 온 이민자들로
전투경험이 그다지 없고 평원을 가로지르는 긴 행군에 지쳐 물자도 제대로 공급되지 않아 사기도 저하되어 있었다. 부하인 벤틴 대위가
군사재판에 제출했던 커스터의 최후의 메모는 <탄약 꾸러미를 좀 가져다 달라>였다.
훗날 재판에서 교수형에 처해 진 리노는 <제 7 기병대는 한 명당 124발의 탄환밖에 없었지만 수송마차엔 24,000발의 탄약이 남아있었다>
라고 증언했다. 이에 반해 인디언측은 커스터 부대의 4배에 달하는 총을 소유하고 있었다. 또 커스터 부대는 단발식의 스프링필드
M1873을 사용한 것에 반해, 인디언측은 위력과 사거리, 명중도가 열세지만 연사속도가 빠른 헨리 연발총(윈체스터 라이플의 원형)및
활과 도끼 등을 사용하는 근접전을 펼쳐 많은 사상자를 냈지만 커스터 부대의 장점을 막아버렸다.
그 결과, 전투는 시작과 동시에 일방적으로 흘러가 커스터 부대는 2시간이 채 되지도 않아 전원 몰살당했다. 인디언들은 버팔로 사냥에
익숙했던 기술을 사용하면서 지리적인 잇점을 활용해 기병대를 분산, 고립화시켜 궁지로 몰아넣은 뒤 간단히 처리했던 것이었다.
이러한 일방적인 전황이 학살로 포장됨과 동시에 남편인 커스터를 신격화시킨 엘리자베스 리비 부인의 열성적인 활동으로 미국사회에서는
반 인디언 정서가 높아져 인디언에 대한 무력토벌이 이루어졌다. 이리하여 운디드니의 학살 등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또, 커스터의 부관이던 마커스 리노는 패전 후 군사재판에서 혼자 전쟁의 책임을 떠 앉았다. 신문에서는 리노의 실망스런 행보가 커스터의
죽음을 초래했다고 쓰기도 했다. 전후 이 전장은 <커스터 국립기념전쟁터>로 명명되어 국립공원으로 편입된 후 <제 7기병대 기념비>가
세워졌다.
1927년에 이에 대항하여 수우족의 토마스 비버하트 부인이 미 육군성에 탄원서를 제출했다. 수우족과 샤이언족은 여기서 당한 쪽은
우리 인디언들로, 전장은 리틀빅혼이며 우리 인디언의 기념비도 세워달라고 항의를 계속했지만 이는 무시되었다. 이윽고 1960년대에
들어서 공민권 운동이 높아지면서 항의 목소리는 더욱 커지게 되었다.
1988년 6월 25일에 러셀 민즈 등 수우족 파견단은 <제 7 기병대 기념비>의 근처에 <인디언 전사의 기념비>로서 임시 기념비를 세워
이에 항의했다. 1991년에 미의회는 이 요구를 받아들여 <커스터 국립기념전쟁터>를 <리틀빅혼 국립전쟁터>로 개명하는 법안을
결의하여 부시 대통령에게 재가를 받았다.
하지만 예산 집행이 미뤄지면서 2001년 9월에서야 드디어 상하원에서 예산이 반영되었는데, 이 예산법안을 만든 것은 아버지 부시,
서명한 것은 공교롭게도 아들 부시 대통령이었다. 2003년 6월 25일에 <리틀빅혼 전쟁기념비>와 <인디언 기념비>가 건립되어
백인과 인디언들을 포함하여 완성 축하전이 이루어졌다.
수우족, 샤이언족, 알라바호족, 그리고 적으로 싸웠던 크로우족, 알리칼라족, 포니족 대표가 말을 타고 출석했는데, 수 천명의
인디언이 모여 수백 채의 인디언 가옥(티피)가 세워져 성대한 축하연이 벌어졌다. 이 결의에 노력했던 인디언 최초의 상원의원인
벤 나이트호스 캠벨(그는 샤이언족 출신)은 이 식전에 참가하여 드디어 인디언들이 대등한 영예를 누리게 되었다고 축사했다.
출처 : R. G 하트포드 <리틀빅혼의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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