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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운티호의 반란 - 1789년

구름위 2013. 12. 17.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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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운티호의 반란 -  1789년

 

 

 

바운티호는 타히티 섬에서 빵나무를 서인도 제도로 운반하는 임무를 위해 화물선을 매입하여 임시 군함으로 만든 영국해군의

징용선으로 소형의 선박이었다. 때문에 영화 등에서 묘사된 <전함>이라는 호칭은 적당하지 않다. 승무원은 유일한 장교였던

함장, 윌리엄 블라이와 상급 준사관 3명, 준사관 11명, 사관후보생 6명, 하사관 14명, 수병 11명의 총 46명이었다.

 

블라이 함장은 33세로 이전에 제임스 쿡 선장이 지휘하던 레졸루션 호의 항해장으로 일한 후 상선 승무원으로 항해경력도 있어

해상경험이 풍부했다. 하지만 함장이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1787년 12월 23일에 영국의 포츠머스 항을 출항하여 처음엔

남미의 혼 갑을 돌아 태평양으로 나아갈 예정이었지만 악천후로 인해 계획을 변경하여 희망봉을 돌아 인도양으로 진출한 후

1788년 10월 26일에 타히티 섬에 도착했다.

 

항해중에 블라이는 항해장이던 존 프라이어를 강등시키고 항해사였던 플레처 크리스찬을 2인자로 기용했다. 1789년 4월까지

빵나무 열매와 그 외 다른 식물을 탑재하기 위해 타히티 섬에 체재하던 중 크리스찬은 타히티 현지여성과 결혼했는데, 이에

다른 많은 선원들도 현지여성과의 생활을 즐겼다. 이 때 3명의 선원이 탈주죄로 체포되어 채찍형을 받았다.

 

1789년 4월 4일에 타히티 섬을 출항하여 희망봉을 경유하여 서인도 제도를 향하여 서진하던 바운티호는 4월 28일에 통가의

프렌들리 제도에서 반란을 맞이했다. 도중에 사망자를 제외한 당시 승무원은 44명이었는데 반란자는 크리스찬 이하 12명이었다.

블라이 함장 이하 19명은 구명보트에 태워져 망망대해에 추방되었는데 비반란자들 중 13명은 배에 남겨졌다.

 

블라이 함장이 지휘한 구명보트는 41일만에 뉴기니아와 호주 사이의 토레스 해협을 통과하여 티모르 섬에 당도했다. 한편

반란자를 태운 바운티호는 튜브아이 제도에서 3개월을 보냈는데 이후 타히티로 향했다. 16명의 선원이 타히티 섬에 남겨진 후

크리스찬과 8명의 반란자는 타히티 섬의 현지인(남자 6명, 여자 11명, 아기 1명)을 태우고 피지, 쿡 제도를 거쳐 1790년 1월 15일에

영국의 해도에는 표시되어 있지않은 핏케언 섬에 당도했다.

 

크리스찬 일행은 바운티호를 해체하여 그 자재로 집을 짓고 섬에서의 생활을 시작했다. 한편 같이 행동한 타히티 현지인들 중

자발적으로 바운티호에 승선한 자도 있었지만 크리스찬이 유괴하여 데리고 간 자들도 있었다. 1790년 3월 15일에 블라이 함장일행은

영국에 돌아가 반란을 보고했다.

 

1790년 11월에 프리깃함 판도라호(에드워즈 함장)가 바운티호의 수색을 위해 출항했다. 1791년 3월에 판도라호는 타히티 섬에

도착해 14명의 바운티호 승무원(대부분은 비 반란자)을 체포했다. 그 후에도 바운티호의 수색은 계속되었지만 8월 30일에

리프 환초에서 판도라호가 암초와 부딫쳐 침몰하는 바람에 핏케언 제도의 반란자들은 결국 찾아내지 못했다.

 

31명의 선원과 4명의 죄수가 사망하고 나머지 89명의 선원과 10명의 죄수만이 판도라호에서 살아남아 1792년에 영국으로 돌아갔다.

죄수 10명 중 4명은 무죄, 2명은 유죄였지만 국왕의 은전으로 석방되었고 1명은 법적수속 문제로 석방되어 나머지 3명만이 교수형을

당했다.

 

블라이 함장도 군법회의에 소환되었지만 무죄가 되어 현직으로 복귀했다. 블라이는 프로비던스 호의 함장이 되어 1791년에 같은

임무를 부여받고는 무사히 임무를 성공했다. 그러나 후에 총독으로 부임한 호주에서 현지의 유력자들과 대립하다가 배하의

치안부대의 반란으로 감금되고 말았다.

 

두 차례의 반란으로 인해 퇴역위기에 몰린 블라이는 후에 제독(중장)으로 승진하긴 했지만 영국정부의 눈 밖에 나서 지원이 끊겨

이후 궁핍한 생활을 하며 여생을 보냈다. 한편 반란의 원인은 여러 설이 있는데 모두 확실하지는 않다. 블라이 함장은 부하들을

다루는 것이 가혹하여 인망이 없었다는 말도 있지만 그가 행한 체벌은 당시 평균적인 체벌에 비해 심하지 않다는 견해도 있다.

 

빵나무 수송을 위해 선원들의 거주공간을 희생시킴으로 항해중 생활환경이 열악했지만 타히티 섬에서 쾌적한 자유시간을 주었기에

선원들이 다시 불만의 선박으로 돌아가는 것에 염증을 느낀 거도 한 원인으로 여겨진다. 또 반란이 성공한 원인으로 크리스찬이 다수의

선원들에게 인망을 샀고 상급사관의 숫자가 적었던 점, 해병대를 승선시키지 않은 점도 꼽힌다.

 

블라이는 이후 항해에서 상급사관 숫자를 늘리고 해병대원도 탑승시켰다. 1808년 1월에 미국선박인 토파즈호가 핏케언 제도에

다다랐을 때 선원이던 존 애덤스만이 유일하게 생존해 있었다. 토파즈호의 폴져 선장은 크리스찬의 아들인 세스디 옥토버 크리스찬의

안내로 애덤스 외 아이 20여명, 폴리네시아계 여성 10명이 핏케언 섬에 살고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다른 반란자들은 질병이나 자살, 사고, 싸움 등으로 사망했는데 이들의 자손은 섬에서 생활중이었다. 크리스찬도 내분으로 살해되었다고

한다. 1825년에 애덤스는 은사로 무죄가 되었고 1838년에 핏케언 제도는 영국령이 되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바운티호가 해체된

장소는 바운티만이라고 명명되었고 현재도 잔해가 남아있다.

 

1831년에 300명 가까이 인구가 증가하자 식량과 수용문제로 인해 영국정부는 일시 섬 주민들을 타히티 섬으로 이주시켰다. 그러나

익숙하지 않은 타히티에서의 생활에 핏케언 섬으로 돌아가는 자가 적지않아 섬 주민들은 다시 핏케언 섬으로 돌려보내졌다. 허나

섬 주민은 조슈아 힐이라는 미국인에게 고통받았다고 한다.

 

힐은 마우이 섬에서 이주시 마우이 섬의 지사를 폭행하고 타히티로 넘어와 핏케언 섬으로 넘어갔다. 그는 영국정부가 파견한 통치자라

섬 주민들을 속이고 핏케언 섬의 독재자가 되었다. 1823년에는 핏케언 섬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영국인 존 바펫과 19세의 존 에번스,

그리고 1828년부터 섬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목사, 조지 노브스에게 채찍질을 하고 섬 주민들에게도 저항자는 마구 구타했다.

 

견디지 못한 섬 주민들이 근처의 영국선박에게 폭군 힐로부터 해방시켜달라고 청원하여 1837년에 영국군에 의해 힐이 추방되기

전까지 섬 주민들은 6년간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1856년에 다시 섬은 인구증가로 인해 194명을 제외한 나머지가 영국정부에 의해

무인도였던 노포크 섬으로 이주되었다.

 

노포크 섬도 이들을 수용하기엔 좁았는데 몇 명은 핏케언 섬으로 귀환을 요구하여 돌아가기도 했다. 1937년에 바운티호의 선원과

타히티인의 자손 233명이 핏케언 제도에 거주했지만 이후 뉴질랜드, 노포크 등으로 이민하여 현재는 47명밖에 남아있지 않다.

핏케언 섬의 전 촌장인 스티브 크리스찬은 반란자였던 크리스찬의 자손이다.

 

2004년 9월에 발생한 여자아이게 가해진 성적학대 혐의로 7명의 섬 주민이 기소되는 핏케언 제도 소녀폭행사건으로 이곳은 다시

주목을 받기도 했다. 한편 1935년, 1962년에 이 사건은 소설과 영화로 만들어졌는데 1935년과 1962년의 영화에는 블라이 함장이

잔악한 폭군으로 묘사되었지만 실제로 블라이 함장은 구명정을 지휘해 남태평양을 3,000km를 주파하여 전원을 생환시켜 오히려

항해자와 지휘관의 능력이 탁월했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멜 깁슨이 주연한 1984년의 영화에선 보다 사실에 가깝게 묘사되어 함장 이하 등장인물은 여러 성격으로 묘사되어 반란의 여러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인과되었는데 상대적으로 오락성은 결여되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한편 일본의 방송 프로그램인

<기적체험 언빌리보> 2011년 9월 1일 방송에서 이 바운티호의 반란과 핏케언 섬의 참극재현이 드라마로 재현되었다.

 

그런데 핏케언 섬의 취재에는 섬 주민들 전원의 취재허가를 받아야 했기에 취재허가가 이루어지기까지 3년의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출처 : 스테판 월터 <바운티호의 반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