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중국 이야기

양식뢰(樣式雷) : 400년 황실건축세가

구름위 2013. 10. 28.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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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축설계후 미리 미니어처로 건축의 모양을 축소하여 짓는 것을 양식, 탕양이라고 하며, 청나라때 뇌씨집안이 만든 이런 미니어처건물 또는 그 집안을 "양식뢰"라고 한다. 

 

글: 송혁(宋奕)

 

북경서쪽 향산(香山)의 자락에 있는 거산촌(巨山村)은 배산임수의 풍수길지이다. 이 마을의 동쪽 끝에있는 두 줄기의 작은 내의 가운데에는 넓은 지대가 펼처져 있는데, 일찌기 이 곳은 근 30무(1무는 200평)에 이르는 묘원이 조성되어 있던 곳이다. 푸른 나무로 둘러싸인 묘지의 외형은 독특하여 마치 하나의 큰 배를 연상케 한다. 뱃머리는 서남방을 향하고 있어, 마치 묘에 누워있는 영혼들이 남방의 고향으로 배를 타고가고싶어하는 심정을 담은 것같다. 이 묘원은 일찌기 북경의 고궁, 천단, 원명원, 이화원, 북해, 중남해, 하북의 피서산장과 외팔묘, 청동릉과 청서릉등 청나라때 황실건축의 설계자였던 양식뢰가족의 조상묘이다.

 

그러나 오늘 날, 필자가 거산촌에 도착해서 이 건축세가의 유적을 찾아보려고 했을 때, 눈앞에 들어온 광경은 이러했다: 굳게 잠겨있는 공사현장의 철문안에 분묘나 비석은 일찌기 눈에 띄지 않았고, 어지럽게 쌓여있는 건자재의 가운데 유일하게 남아있는 백송이 외롭게 서 있었다. 백송은 하나의 표지판이 되어 흥성과 쇠퇴를 목격한 후, 일찌기 휘황찬란했던 이 건축세가의 인물들이 안식하고 있는 곳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양사성(梁思成) 선생은 일찌기 <<중국건축과 중국건축사>>라는 글에서 이렇게 양식뢰가족을 묘사한 바 있다: "청나라(1644-1911)의 260여년간, 북경황실의 건축사는 세습직위가 되었다. 17세기말, 남방의 장인인 뇌발달(雷發達)이 북경으로 와서 궁전을 짓는 업무에 가담했다. 기술이 뛰어나서 금방 설계업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시작하여 7대에 걸쳐 청나라말기에 이르기까지, 주요한 황실건축 예를 들어, 궁전, 황릉, 원명원, 이화원등은 모두 뇌씨가족이 책임졌다. 이 세습의 건축사가족은 "양식뢰"라고 불리웠다"

 

양식뢰의 선조는 명나라초부터 이미 목공건축업종에 종사했다. 명나라말기에 이르러 뇌씨집안의 목공기술은 뇌발달에게 전수되었고, 이후 200여년간 이어지는 찬란한 가족사가 시작되었다.

 

뇌발달. 원적은 강서성 남강부 건창현(지금의 영수현)이다. 명나라 만력17년(1619년)에 태어났고, 강희원년(1662년) 전쟁으로 인한 요역의 고통을 면하기 위하여 가솔을 이끌고 남경으로 이주한다. 강희22년(1682년) 겨울, 그는 당제(堂弟)인 뇌발선(雷發宣)과 함께 북경에서 목공을 모집하는데 응하여, 청나라 황가궁전건물을 짓게 된다. 그를 따라서 많은 자녀들이 북경 해정구의 괴수가(槐樹街)로 옮겨간다. 강희28년(1689년) 나이 70세된 뇌발달은 은퇴한 후, 남경으로 돌아간다.

 

뇌발달에 대하여, 민간에는 이런 전설이 전해져 온다. 강희가 자금성 태화전을 새로 지으려고 하는데, 고대의 예법에 따르면, 반드시 상량식을 거행해야 했다. 이날 황제가 친히 상량식을 주재하는데, 문무백관도 모두 출석했다. 그런데, 상량식에 문제가 발생했다. 대들보가 기둥과 들어맞지 않게 된 것이다. 공부(工部)의 관리들은 모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때, 한 관리가 아이디어를 내서, 뇌발달을 찾았고, 그에게 관복을 입혔다. 뇌발들은 손도끼를 들고 기둥을 재빠르게 타고 올라가서 도끼질 몇번에 대들보는 제자리를 잡게 되었다. 강희제는 이 광경을 목도하고 아주 칭찬해 마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뇌발달을 접견하고 공부의 영조소(營造所)에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이때부터 "위로는 노반(魯班, 공자시대의 유명한 목수)이 있고, 아래노는 장반(長班)이 있다"라는 소문이 날개돋친듯 퍼져갔다. 이 전설적인 이야기안에서 우리는 뇌발달이 양식뢰의 창시자로서 민간의 존경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전문가들의 고증에 의하면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뇌발달이 아니라, 양식뢰가족사업을 처음으로 전성기에 도달하게 만든 양식뢰의 제2대전인 뇌금옥(雷金玉)이라고 한다.

 

첫번째 이야기: 양식방 책임자의 지위상실 및 회복

 

강희22년, 뇌금옥은 부친을 따라 북경으로 온다. 국자감에서 공부한 후 관직대기상태에 있다가 나중에 내무부 포의기에서 일하게 된다. 부친과 함께 황가궁전의 건축을 담당하면서 금방 두각을 나타낸다. 당시, 강희제가 청나라의 첫번째 황가원림(皇家園林)인 창춘원(暢春園)을 만드는데 부친 뇌발달과 함께 참여하게 된다. 뇌금옥은 부친의 "영남목작공정(領楠木作工程)"을 이어받고, 곧 이어 "정전(正殿)의 상량때 황은을 입어 직접 만나 주청드리고, 황제로부터 내무부 총리흠공처장반의 직위를 받고, 칠품관직을 받았으며, 칠품의 녹봉을 받았다" 이 내용이 실제로는 위에서 말한 뇌발달의 태화전 상량식이야기 원형인 것이다.

 

강희성세의 여러 큰 황가건축에 참여한 이후, 뇌금옥은 다시 옹정제 초기에 원명원등의 건설에서도 노화순청(爐火純靑)의 건축조예를 보여주어, 옹정제의 총애를 받는다. 그리고 70세 생일날 "고희(古稀)"라는 편액을 선물받는다. 옹정7년(1729년) 뇌금옥이 사망한다. 옹정제는 금은을 상으로 내리는 외에, 황가역참연도에 운구하여 남경으로 가서 안장할 수 있도록 조치해준다. 황제가 내린 "고희" 편액은 뇌씨고택의 대당(大堂)에 걸려있다. 뇌씨가 대대로 양식방(樣式房)업무를 장악하고, 황가건축설계사를 세습하게 되는 창시자격인 뇌금옥은 뇌씨족보에서 나중에 뇌씨가족이 북경으로 이주한 북경의 지조(支祖)로 존중받는다.

 

뇌금옥이 서거하면서, 뇌씨가족은 양식방장안의 직위를 잃어버리고 온가족이 남경으로 이주한다. 뇌금옥이 힘들게 쌓아놓은 가업이 무너지게 생겼다. 이때 뇌씨가족사상 아주 중요한 여성이 운명에 대항하는 역정을 시작한다. 그녀는 바로 뇌금옥의 작은부인(小夫人)인 장씨(張氏)였다.

 

뇌금옥이 죽은 후, 장씨는 가족을 따라 남경으로 이주하지 않고, 3개월된 어린아들 뇌성징(雷聲澄)을 데리고 홀로 북경에 남는다. 모친으로써 어린아들을 교육하는 것은 당연한 책임이다. 그러나, 더욱 큰 사명감을 그녀는 가지고 있었는데, 바로 뇌씨의 후손이 양식방을 다시 중흥시키는 것이었다. 그녀는 예의범절의 속박을 벗어나 어린아들을 안고 공부(工部)에 가서 읍소했고, 이치를 따지면서 요구했다. 바로 뇌성징이 성년이 된 후 양식방을 다시 장악할 수 있는 자격을 달라는 것이었다. 뇌씨후손들은 동치연간에 장씨를 위하여 비문을 쓰면서, 그녀의 가족역사에서 빠뜨릴 수 없는 공헌을 기재해 두었다.

 

두번째 이야기: 황가의 기밀건축자료의 난세의 유리(流離)

 

건륭성세가 도래하면서, 황가의 건축사업은 흥성하기 시작했다. 건륭은 조부인 강희의 조치를 본받아서, 여섯번 강남을 순시하였다. 대량의 행궁을 만드는 것이외에 강남원림을 아주 좋아하여 정교하고 별다른 멋이 있는 강남원림을 북경의 황성내외로 옮겨왔다. 원명원의 확장과 청의원(淸園)의 건설이 연이어 이루어졌다. 뇌성징의 세 아들은 양식뢰의 제4대전인인 뇌가위(雷家瑋), 뇌가새(雷家璽)와 뇌가서(雷家瑞)였다. 그들은 바로 이런 환경하에서 기술을 뽐내었고, 건륭과 가경연간에 가업은 크게 발전했다.

 

세형제중 뇌가새는 특히 뛰어났다. 그는 만수산, 옥천산, 향산, 열하피서산장, 창릉과 원명원동로등의 황실공사를 설계했을 뿐아니라, 건륭의 80세 생일잔치때 등채(燈彩)와 염화(焰火)의 설계도 담당했다. 그리고 원명원의 동락원 대극대도 설계건축했다.

 

뇌가새의 셋째아들인 뇌경수(雷景修)는 가경, 도광, 함풍, 동치의 4대황제기간동안 16세부터 원명원 양식방에서 "세습가업"을 익혔다. 도광5년(1825년), 중병에 든 뇌가새는 아들이 중임을 맡기 힘들다는 것을 알고는 유언으로 양식방장안의 직위를 다른 동료에게 넘기게 한다. 뇌경수는 20여년간 분투하여, 마침내 도광29년(1849년)에 다시 양식방장안의 직위를 빼앗아 온다.

 

그러나, 이때 청나라정부는 이미 내우외환에 시달려 만신창이였다. 뇌경수는 양식방업무를 중단해야 하는 액운을 벗어날 수 없었고, 해정구의 옛집이 강도당하고 영국프랑스연합군에 의하여 원명원이 불타는 것도 목격해야 했다. 두 눈을 부릅뜨고 뇌씨가족 몇 대가 완성한 원명원이 불에 타 먼지로 화하는 것을 보았다. 이때부터 뇌경수는 가업을 힘들게 꾸려가면서, 새로 집을 짓고, 족보를 정리하고, 조상묘를 꾸민다. 그가 한 또 다른 큰 일의 하나는 원명원에 보관되어 있던 설계양식을 몰래 성내로 옮겨와서 세칸의 집을 지어 보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때부터 원래 황가의 비밀건축자료가 난세에 궁바깥으로 옮겨지게 된 것이다.

 

세번째 이야기: 말세의 마지막 영광

 

뇌경수의 장남인 뇌사기(雷思起)는 도광6년(1826년)에 태어난다. 어려서부터 부친으로부터 엄격한 훈련을 받고, 황가건축공사의 모든 분야를 익힌다. 건축설계부터 시공기술 및 조직관리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회계업무에서 공사지질, 생태 및 풍수에 이르기까지. 그는 부친을 쫓아 창서릉, 모동릉등 공사에 참여하고, 이후 정릉, 정동릉, 혜릉과 서원 및 여러 왕공, 귀족의 저택, 원림, 능침의 건축설계에 참여한다.

 

서태후의 40살생일을 축하하기 위하여 동치12년(1873년), 동치황제는 서태후를 위하여 원명원을 다시 짓기로 결정한다. 뇌사기와 장남 뇌정창(雷廷昌)은 명을 받아 설계를 담당한다. 밤낮을 계속하여 수천건의 설계도면과 양식이 만들어진다. 그러나, 당시 국력이 허약하여, 이렇게 많은 돈이 드는 공사는 반대의 목소리 앞에서 요절하게 된다. 남은 것은 그저 수천건의 양식뢰 도면이었다.

 

광서2년(1876년)말, 피로가 겹친 뇌사기는 정동릉, 혜릉 공사현장에서 병을 얻어 북경으로 돌아온 후 오래지 않아 세상을 떠난다. 이때, 제7대전인인 뇌정창은 이미 여러 황실공사를 맡아 경험이 있었으므로, 순조롭게 양식방장안의 중임을 이어받아. 천단 기년전, 자금성 태화문 및 서태후 만수경전의 점경루대등을 건축하는 것을 주재한다.  다음 해, 그는 혜글의 금권합룡과 융은전상량에 공이 있다는 것으로 하여 조정으로부터 2품의 직위를 받는다. 양식뢰가족은 다시 한번 전성기를 맞이한 것이다.

 

광서23년(1897년), 서태후는 다시 원명원재건공사를 시작하고자 한다. 뇌정창의 장남이면서 20살이 되지 않은 뇌헌채(雷獻彩)는 원명원양식방장안을 맡는다. 이후 그는 부친과 함께 보타욕 정동릉의 중건을 담당한다. 그리고 팔국연합군에 불타버린 경성, 궁원, 단묘, 저택등 황실건축의 중건과 수리를 담당한다. 그리고 "신정(新政)"기간동안에 각종 신식양방의 설계도 담당한다.

 

광서26년(1900년) 팔국연합군의 침입으로, 북경성과 성내외의 각종 황실건축이 다시 한번 재난을 당한다. 뇌정창과 장남 뇌헌채는 대규모의 수리, 중건공사를 책임진다. 북경 정양문(正陽門) 및 전루(箭樓)등 성루와 대고현전, 중남해 및 이화원의 재건공사를 맡는다.

 

뇌정창이 서거한 후, 청나라말기의 숭릉, 섭정왕부등 중요한 공사설계도 모두 뇌헌채가 주재하여 완성한다.

 

네번째 이야기: 망각되고 꺾여진 기억

 

시대는 양식뢰를 만들었지만, 시대가 흐름에 따라 양식뢰도 사라져갔다. 신해혁명이후, 청왕조는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황가건축설계와 양식방업무도 같이 사라졌다.

 

뇌씨족보의 기재와 뇌씨후예들의 기억에 의하면, 뇌헌채는 일찌기 두번 처를 취했는데 후손을 두지 못했다고 한다. 그는 실업의 우울함과 자손이 없는 비애 속에서 세상을 떠난다. 8대를 전승한 양식뢰건축전통은 이렇게 종말을 고한 것이다.

 

이어진 난세에서 뇌씨가족은 금방 쇠퇴한다. 가족의 후손들은 생활이 힘들어지자 서로 갈라지고 집안의 각종 도안과 양식을 팔아버리기 시작한다.

 

양식뢰의 명성이 아주 대단했으므로, 이런 도면과 양식은 아주 잘 팔렸다. 길거리에서도 살 수 있었고, 해외에도 흘러나갔다. 다행히, 양식뢰도면, 양식의 외부유출은 금방 뜻있는 사람들의 주의를 끌었고, 특히 주계검(朱啓鈐) 선생은 위시한 영조학사는 문인과 관련기관을 동원해서 대량으로 도면과 양식을 사모으기 시작한다.

 

1930년, 양식뢰의 후인은 4500은원의 가격으로 대부분의 도면과 양식을 당시 북평도서관에 매각한다. 그리하여 안전한 수장환경에서 보존되게 된다. 당시 옮겨온 도면과 양식은 트럭 10대분량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일부 도면과 양식은 뇌씨후손의 손에 들어있었다. 그들의 운명은 어찌될 것인가?

 

30년이 흘렀고, 시간은 이미 1964년말이다. 또 다른 재난인 문화대혁명이 닥치기 전에, 두 명의 양씨후손이 북경시 문물국에 나타났다. 그들이 가져온 것은 삼륜차에 실린 양식뢰 도면이었다. 시정부 지도자는 그들에게 식사를 대접하고, 영수증을 끊어주었으며, 나중에 상장을 보내주었다. "문혁"이 시작된 후에 남아 있던 도면과 양식은 뇌씨후손들이 모두 불태워버린다. 그리하여 재가 되어 호성하에 버려지게 된다.

 

이로부터 "양식뢰"라는 세 글자는 점차 사람들에게서 잊혀지게 된다.

 

또 다시 40년이 흘렀다. "양식뢰-화하건축의장의 전세절향"이라는 전람이 2004년 8월 중국국가도서관에서 개막되었다. 이어서 양식뢰 도면, 양식은 세계기억유산으로 신청할 예정이며 관련한 국제세미나를 개초할 것이라는 소식도 들렸다.

 

세상사람들이 민족건축의 보배로 경탄해 마지 않을 때, 금년 3월, 다시 양식뢰가족의 경서 거산촌에 있는 조상묘가 공공연히 파헤져진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뒷이야기

 

30세의 뇌초(雷超)는 지금 운전사이다. 그는 이름이나 말하는 데서 모두 전통을 부정하려는 모습이 나타난다. "부친은 나를 멍청이라고 하고, 비교적 개성있다고 합니다" 열두,세살 때, 그는 할아버지로부터 가족의 역사를 전해듣는다. 그러나, 조상의 성취에 대하여 말할 때도 그는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들이 잘나갔던 것은 그저 그들의 일이다" 최근들어 전문가들과 미디어가 양식뢰에 관심을 가지는데 대하여그는 자기의 의견을 말했다. "한참 시끄럽게 떠들었지만, 조상묘는 그래도 파헤쳐 졌잖아요"

 

그러나, 자신이 양식뢰의 제몇대후손인지에 별다른 관심이 없어보이던 뇌초도, 자식을 가진 후에는 점점 가업을 전승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느끼는 것같았다. 그는 두 달된 아들에게서 약간의 희망을 본 것같다. 그는 가족의 배분에 따라 아들에게 뇌세탁(雷世鐸)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고, 아이가 큰 후에 전통건축을 배우도록 할 생각이라고 하였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선의 끊어진 가닥을 다시 잇게 하려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