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1644년(명숭정17년, 청순치원년) 3월 19일, 이자성이 대순군(大順軍)을 이끌고 북경으로 진입했다. 명나라 숭정황제 주유검은 황궁의 북문인 현무문(지금의 선무문) 밖의 만세산(경산)에서 목을 매어 자결했다. 그러나, 숭정제의 죽음이 명나라 276년의 통치가 끝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강회(江淮)이남의 반벽강산(半壁江山)은 아직도 여전히 명나라에서 임명한 관리들이 통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여전히 명나라를 정통으로 받들었다. 북경이 함락된 후 2개월이 지난 5월 15일, 숭정제의 당형(堂兄)인 복왕 주유송이 남경에서 즉위하고, 연호를 홍광(弘光)이라 한다. 후세에서는 홍광제와 그 이후 명나라의 정통을 계승한 조정을 합쳐서 남명(南明)이라고 부른다.
당시 남명의 형세는 역사상의 동진이나 남송과 아주 유사했다. 그들은 모두 아직 전란에 휩싸이지 않은 강남지역을 점거하고 있었고, 모두 장강의 천험을 활용하여 북방유목민족의 철기를 막아내고자 했으며, 힘을 길러 중원을 수복하고자 했다. 그리고 명말시기의 강남은 여러 왕조의 경영으로 중국에서 가장 경제가 발달한 지역이 되어 있었다. 인구는 조밀하고, 물산은 풍부하며, 재산은 넘쳐났다. 강회이남의 병력은 여전히 50여만명이나 되었다. 이치대로라면, 이러한 인적 물적자원을 통하여 남명은 명나라를 중흥시킬 수 있었다. 최소한 동진이나 남명처럼 한귀퉁이는 차지하고 청나라와 남북대치국면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역사는 반복되지 않았다. 홍광제는 겨우 1년만에 와해되고, 이후의 융무제, 영력제도 겨우 절강, 북건, 광동일대와 서남의 변경에서 구차하게 연명하였다. 1662년(강희원년) 4월 25일, 영력황제 주유랑이 운남에서 체포되어 죽임을 당함으로써 주씨의 명나라황통은 철저히 끝장난다. 남명은 합쳐서 18년간 존속했다. 역사상의 동진과 남송은 모두 100여년간 존속했었다.
남명이 동진, 남송처럼 되지 못한데에는 내부적인 원인과 외부적인 원인이 있다.
외부적인 면에 있어서, 남명이 상대한 만주족의 청나라는 동진, 남송이 상대한 '오호'와 금나라와 비교해보자. 1616년(명만력44년)부터 누르하치는 여진 각부족을 통일하고, 대금국(후금, 1636년 청으로 변경)을 건립한다. 1644년 청나라가 명나라의 내란을 틈타 산해관으로 들어온다. 만주인들은 30년도 안되는 기간에 동북전체와 몽고각부 및 조선을 차지하고, 명나라와 전투중에 점차 우세를 점하게 된다. 1644년 5월 청나라군대는 오삼계의 인도하에 북경을 점령한 후, 섭정왕 도르곤을 위시한 청나라조정은 시기를 파악하여, 한족관리 범문정, 홍승주등의 건의를 받아들여, 무력으로 전국을 통일하겠다는 방침을 정한다. 1년의 시간을 들여, 북방의 대순군과 명나라 잔여세력을 소탕한 후, 청나라군은 바로 1645년, 장강을 넘어 강남을 차지한다. 한편으로는 현지관리를 그대로 써서 "이한제한"의 정책을 쓰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남명세력을 맹렬히 추격하여 타격을 가한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지도 못한 남명의 홍광조정은 숨쉴 기회도 얻지 못하고, 궤멸해버린다. 그러나, 동진, 남송은 건국초기의 정세가 전혀 달랐다. 서진이 멸망한 것은 동한이래로 황하유역으로 들어와 자리잡은 소수민족에 의한 것이었고, 사마씨의 내부에서 황족간의 동족상잔의 '팔왕지란'으로 인한 것이었다. 이들 소수민족은 각자 세력을 이루어 땅을 차지하고 왕, 황제를 칭하는데 급급했고, 동진의 건립초기에 힘을 모아 강남으로 쳐들어가지 않았다. 40-50년후에야 전진의 부견이 북방을 기본적으로 통일하게 되고, 그 때 비로소 강남을 공격하여 취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미 안정된 동진은 비수지전에서 이김으로써 이를 막아낸다. 800년후의 금나라는 비록 북송의 수도인 동경(개봉)을 차지했고, 휘종 흠종 두 황제를 포로로 잡았으며, 몇번에 걸쳐 강남으로 진공하고, 한번은 남송소조정을 절강성 연해까지 쫓아버렸지만, 그들에게는 천하통일의 목표와 결심이 없었던 것으로 봉ㄴ다. 왕왕 약탈을 한 후에 조금만 저항에 부닥치면 바로 군대를 이끌고 북으로 되돌아갔고, 점령했던 강남지역은 포기한다. 그리하여 남송은 몇번이나 위기를 넘기게 되고, 점차 금나라와 상대할만큼의 실력을 키우게 된다. 이로써 볼 때, 청나라조정의 명확한 전략방침과 유력한 수단은 남송으로 하여금 지방에 안주할 수 없게 만든 주요한 외부요인이었다.
내부적으로 보면, 남명은 황위계승과 정치방침등 측면에서 잘못을 많이 저질렀고, 멸망을 자초하게 된다.
황위계승의 측면을 보면, 남명은 동진과 남송에 비하여 부족함이 있었다. 동진의 첫번째 황제인 사마예는 원래 낭야왕이었고, 봉지가 산동이어서, 강남에 가까웠다. 서진이 철저히 망하기 전에 건강(즉, 남경)에 세력을 심어두고, 여러 편을 끌어들였고, 서진의 마지막황제인 민제 사마업에 이하여 승상, 대도독중외제군사에 임명되었다. 그리하여 서진이 멸망하자, 황위계승은 아주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그리고 남송의 첫번째 황제인 송고종 조구는 금나라병사들이 동경(개봉)을 포위했을 때, 북송의 마지막 황제인 흠종 조환의 친필서신에 의해 천하병마대원수로 임명된다. 휘종과 흠종이 모두 포로로 잡히자 그는 자연스럽게 등극하여 황제가 된다. 그러나, 남명의 첫번째 황제인 홍광제 주유송은 여러 신하들의 내부투쟁과정에서 억지로 황위에 올랐다. 주유송은 원래 복왕인데, 봉지는 하남 낙양이었고, 이자성의 군대를 피하여 강남으로 도망쳐 온 것이었다. 당시 강남에 피해와 있던 명나라의 번왕들 중에서, 주유송은 숭정제와 혈통이 가장 가까웠다. 그리고 당시 강남정치중심인 남경근처의 회안에 거주하고 있었다. 순서나 지리적으로 제일 유리한 위치에 있었고, 당연히 황통을 계승해야 했다. 다만, 당시의 강남은 동림당의 세력범위였고, 주유송의 조모는 바로 만력제 주익균의 총애를 받은 정귀비이다. 당시 동림당인들이 극력반대하여, 신종과 정귀비는 주유송의 부친인 주상순을 태자로 앉히지 못했다. 동림당인들은 주유송이 등극하면 자기세력에 불리할 것을 우려하였다. 그리하여 복왕을 옹립하는데 극력 반대했다. 당시 중요지위에 있던 남경병부상서 사가법은 우유부단했고, 부지불식간에 주유송은 암중에 병권을 장악하고 있던 고걸, 황득공, 유량좌와 봉양총독 마사영등과 결탁하여 복왕을 옹립하는 것으로 선포한다. 병졸하나도 장악하지 못하고 있던 사가법과 동림당인들은 어쩔 수 없이 현실을 인정하고 복왕을 맞이하게 된다. 이 풍파는 비교적 안목과 실력이 있던 사가법을 조정내에서 실권을 잃게 하였을 뿐아니라, 홍광조정의 신하들중 동림당인과 복왕옹립파간에 상호투쟁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병권을 장악한 장군들은 조정의 명령을 듣지도 않았다. 이리하여 홍광조정은 단결하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함께 국난을 헤쳐갈 수도 없었고, 청나라군에 맞서거나 실지를 회복하는 것은 기대하기 어려웠다.
정치방침측면을 보자면, 홍광조정은 강남을 지키는 정책을 세운다. 당시 청나라군은 북방에서 이자성의 대순군과 각지의 저항세력을 진압하느라 바빴고, 강남을 돌볼 틈이 없었다. 하남, 산동일대의 청나나군은 아주 박약했다. 남명의 입장에서는 도모할 수가 있었다. 만일 홍광조정에서 군대를 황하일선으로만 보냈더라면, 북상하여 청나라를 몰아내지는 못했을지라도, 강남에 대한 병풍역할을 하고, 청나라군대가 순조롭게 강남으로 내려올 수 없도록 막아냈을 것이다. 그렇다면, 강남에서 편안히 지낼 수 있었을 것이다. 사가법은 홍광제에게 올린 글에서, "진나라는 군신이 중원을 회복하고자 했기 때문에 강좌를 지킬 수 있었고, 남송은 군신들이 전력을 다하여 초, 한을 가졌기 때문에 임안을 보존할 수 있었습니다. 지방에 안주하려는 자는 반드시 퇴보하고, 뜻이 없이 그저 안주하면 어찌 스스로 설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장기적인 안목이 있는 사람들은 하남, 산동을 회복하고, 농민군과 연합해서 함께 청나라에 대응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홍광조정과 조정실권자들은 이를 보지 못했다. 그들은 청나라군을 호랑이처럼 무서워하고, 북상하여 청나라조정을 건드리고자 하지 않았다. 동시에 그들은 농민군을 적대시하는 입장을 바꾸지 않았고, 청나라군의 힘을 빌려 복수하고자 했다. 이호써 눈앞의 '편안함'에 안주하고자 한 것이다. 그리하여 안휘와 강소북부일대만 방어하게 된다. 이리하여 하남, 산동일대는 정권의 공백상태가 된다. 앉아서 청나라군대가 이자성군대를 소탕하고 북방의 반항을 진압하는 것을 보고 있게 된다. 청나라조정은 황하이북의 통치를 공고히 한 후에 아무런 걱정없이 전력을 다하여 남하한다. 홍광조정은 겨우 1년간 존속하다 무너지고 만다. 이는 스스로 자초한 결과이다. 강남의 부유한 땅이 청나라의 손에 떨어지게 되니, 반청복명의 세력은 급격히 약화된다. 나중에 두 개의 남명조정은 모두 청나라군대에 의하여 쫓겨나서 절강, 복건, 양광(광동,광서) 연해와 운남, 귀주등 변방에서 겨우 생존에 급급하게 된다. 강남을 수복할 여력도 없고, 청나라와 대치할 실력도 없다. 동진의 초기를 되돌아보면, 적극적으로 파병하여 북방의 실지를 수복했다. 남송의 초기를 되돌아봐도, 고급관리를 하남, 하북에 보내여 항금반란군을 흡수했고, 금나라의 요지를 교란시켰으며, 악비를 보내어 악북의 중요도시 양양을 회복하여, 측익에서 금나라군이 남하하지 못하도록 위협하는 국면을 형성했다. 이렇게 하여 동남의 땅을 확고하게 지키게 된 것이다. 둘과 비교하자면, 남명 홍광조정은 식견이 짧고, 생각이 졸렬했다는 것이 너무나 확연하다.
당연히 명청교체기의 국면에 영향을 준 요소들은 많다. 예를 들면, 청나라조정은 명나라 선비들을 포용하는 정책을 썼다. 그리하여 일정한 정도에서 반청세력을 약화시키게 된다. 명나라말기에 많은 관리들은 부패하고 이기적이며, 기개가 없었으며 기꺼이 청나라를 위하여 일하려고 하게 된다. 각지의 반청세력은 서로 협조하지 않았고, 각자 싸웠다. 그리하여 청나라에 각개격파당한다. 남명내부의 문신, 무장들이 안목이 좁았다. 권리를 다투기만 하였고, 내부소모가 심했다. 그러나, 가장 주요한 요소는 위에서 언급한 내외부요소 이외에, 홍광조의 '안주하려는 정책'의 잘못이었다. 17세기중기의 중국에서는 다시 한번 남북조가 형성되지 못했다. 남명이 동진, 남송처럼 되지 못한데에는 그 원인이 남송 자신, 특히 홍광조의 군신들에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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