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자유주부
청나라때 태의원(太醫院)의 관등은 기본적으로 8급으로 나뉘었다. 아래부터 순서대로 하면 다음과 같다: 의생(醫生), 의원(醫員), 의사(醫士), 이목(吏目), 어의(御醫), 우원판(右院判), 좌원판(左院判), 원사(院史). 태의원이 막 설립되었을 당시에는 원사 1인을 두었는데, 정오품(正五品)이다. 좌우원판을 각각 1인씩 두었는데, 정육품(正六品)이다. 이들은 태의원의 관리층이며, 친히 입궁하여 황상의 병을 진료했다. 그 아래에 어의 10인을 두는데, 어의는 정팔품(正八品)이고, 그 아래에 이목 30인, 의사 40인, 의생 20인, 절조의생(切造醫生) 20인이 있었다. 나중에 각 조대에서 인원수에는 약간의 증감이 있었다. 예를 들어 옹정8년(1730년)에는 식량의원(食糧醫員) 30인을 증설한 바 있었다. 태의원의 관리와 의료인원은 통칭하여 태의(太醫)라고 불렀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한족이었는데, 건륭시기에는 만주족 1명이 원무를 관리한 바 있었다.
태의원에서 원자의 직위는 좌원판이 나중에 승진하여 맡고, 좌원판은 우원판이 승진하여 맡으며, 우원판은 어의가 승진하여 맡는다. 어의, 이목, 의사등의 관직은 먼저 각 성(省)에서 의료에 정통한 사람을 태의원에 보고한 후, 태의원이 다시 선발한다.
청나라때, 어떻게 하여야 태의원의 어의가 될 수 있었을까? 과정은 상당히 길다. 첫째, 먼저 의생이 되어야 하고, 의?교육을 받아야 한다. 청나라때 태의원의 몇개 소속기구중에는 교습청(敎習廳)이 있었다. 이곳에는 교습 2인을 두는데, 교습은 어의, 이목중에서 의술이 뛰어난 자를 선발하여 맡겼다. 만일 교습청에 들어가 의술을 학습하려면, 한족은 일반적으로 동향의 6품이상 관리의 추천이 필요했다. 만주족이라면 관리의 추천외에, 태의원의 의관이 보증을 서야만 가능했다. 추천된 학생은 먼저 태의원의 면접시험을 치른다. 면접시험은 태의원의 수령청(首領廳)에서 담당하는데, 이는 태의원의 행정기구이다. 입학자격심사, 면접시험, 심사등은 모두 수령청이 통일관리하였다. 면접시험합격자는 의생(醫生)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의생은 아직 태의원에 들어가 배울 수는 없다. 먼저 신청을 한 다음 태의원의 윤허가 떨어져야 비로소 태의원에 들어가 배울 수 있다. 태의원에 들어갈 자격이 있는 의생을 모두 이업생(肄業生)이라고 부른다. 학습내용은 주로 <<내경(內經)>>, <<본초강목(本草綱目)>>, <<상한론(傷寒論)>>, <<금궤요략(金櫃要略)>>등의 관련 의학서적이었고, 나중에는 <<의종금감(醫宗金鑒)>>이 추가되었고, 점차 주요한 교과서로 자리잡았다. 청나라때의 의학교육은 의술교육(醫術敎育)이외에 의덕교육(醫德敎育)을 중시했다. 의술을 가리킬 때 모두 의생으로서 갖추어야 할 도덕적인 수양을 가르쳤다. 청나라때의 의덕규범은 다음과 같았다: 명리를 탐하지 않는다, 환자가 위급한데 위급하게 대응한다, 빈부를 구분하지 않는다, 사람의 생명을 중시한다, 겸허하고 조심한다, 서로 배운다 등등.
이업생은 학습기간동안 매년 4차례 시험을 치렀다. 나중에는 두번으로 고쳐졌는데, 태의원의 관리가 주재했다. 시험성적은 예부에 보고되어 기록이 남았다. 3년의 학습기간이 만료된 후, 예부의 관리가 시험을 주재하며, 시험합격자는 의사(醫士)로 승격되고, 불합격자는 계속 공부하여 3년후에 다시 시험을 친다.
매년의 회고(會考)는 태의원에사 가장 중시하는 큰 시험이었다. 태의원내에 엄격한 시험규정이 있었다. 회고의 기간은 하루 종일이며 폐쇄식의 시험이었다. 규정에 따르면, 시험문제는 반드시 분명하고, 경문을 잘라서는 안되며, 모범답안은 간략해야 한다. 시험답안지에 관한 규정에서는 반드시 규정된 크기로 구매해야 하며, 길이가 달라서도 안되며, 시험지에는 태의원의 관인을 찍어야 하고, 중간에는 참가한 시험의 의사(醫士)의 성명, 반급을 적데 되어 있다. 아래에는 부첨(浮簽)을 붙여서 연결되는 곳에 교습청의 도장을 찍는다. 시험답안지는 "정, 대, 광, 명"의 네 종류가 있는데, 시험전에 시험감독을 책임진 수장관이 시험번호에 따라 분류한다. 예를 들어, 1-10번 시험번호를 가진 자는 정류(正類)이고, 수장관은 시험답안지에 "정"자를 쓰나. 다 쓴 후에는 시험답안지를 접어서 밀봉한다. 접은 곳에는 다시 교습청의 도장을 찍는다. 부첨에는 해서로 성명을 적고, 곁에는 자리번호를 추가한다. 그리고 다시 교습청의 도장을 찍는데, 절반은 시험답안지, 절반은 부첨에 찍히도록 한다. 이렇게 된 답안지만이 제대로 된 답안지로 취급해준다. 이후 수령청에 보관한다. 시험답안지는 1인당 1권이며, 추가로 인쇄해주지 않는다. 시험감독에서 중요한 것은 시험문제가 외부로 유출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며, 부정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시험당일, 시험에 참가한 시험생은 여명10분에 집합하고, 시험감독관이 점검한 후, 시험생들은 자리에 맞추어 앉는다. 만일 제 시간에 도착하지 못하면 시험자격을 박탈당한다. 시험생이 자리에 앉은 후, 조사관은 번호를 불러 상세하게 조사한다. 일단 좌석과 부첨의 내용이 불일치하는 것이 발견되면 즉시 시험장에서 쫓겨난다. 시험제목은 정대광명의 분류에 따라 내걸린다. 각류의 학생은 자기의 류별로 제출된 제목에 대하여 답안지를 작성하고, 자리에서 떠나서 시험문제를 베끼는 것도 허용되지 않는다. 매 문제의 답안작성시간도 규정이 있다. 답을 다 썼건 말건, 시간이 되면, 조사관은 번호대로 그 제목아래를 덮어버려서, 그 문제의 아래에 더 이상 답안을 쓸 수 없도록 조치한다. 모든 시험생은 규정된 시간에 동일적으로 답안지를 제출해야 하고, 연기를 받을 수 없다. 답안지와 글자에 오탈자가 있어서도 안되고, 글은 행서나 초서로 써서도 안되며, 지운 글씨가 100자가 넘어가도 안된다. 시험채점에서는 동그라미와 점으로 표시한다. 회고의 요구와 절차만 보더라도, 회고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알만할 것이다.
시험에 합격하는 것은, 의사에서 어의로 올라가는 첫걸음이다. 최종적인 어의선발은 태의원내에서 의술이 뛰어나고, 품행이 단정한 의사이상의 인원들 중에서 층층이 선발한다. 그리하여, 어의는 궁에 들어오기 전에 태의원에서 6년을 임직해야 하며, 일정한 이론적인 기초와 임상경험이 있어야 회고에 참가할 수 있고, 회고는 승진하는 주요한 근거이다. 회고에서 1등급, 2등급을 한 의사는 불량기록이 없는 한 승진할 자의 명단에 들어가게 된다. 일단 태의원에서 빈 자리만 나면 바로 보충되어 들어가는 것이다. 성적이 3등급인 의사는 계속 태의원에 남아서 일을 한다. 4등급이면 회고에 참가할 자격을 1회 상실한다. 불합격이면 바로 관직이 박탈된다. 다만, 계속 태의원에 남아서 일할 수 있고, 다음 번 시험에 참가할 수 있다.
이외에 청나라의 어의중 일부는 각성의 총독, 순무가 추천한 명의(名醫)이다. 옹정원년(1723년)에 일찌기 각성의 순무에게 명하여 각지의 의생을 시험쳐서 그중에 <<내경주석>>, <<본초강목>>, <<상한론>>에 정통한 의생을 선발하여 의학관의 교습으로 하며, 각성에 1인을 두고 3년의 녹봉을 주도록 했다. 이 기간동안에 근무를 성실하게 하고, 성품이 올바르면, 태의원으로 불려와서 어의가 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보통 의생은 최소한 10년을 들여서 뛰어난 의술을 익히고, 동시에 상당한 의학적 도덕품격을 갖추어야 비로소 어의가 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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