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염숭년(閻崇年)
청나라의 최초 수도는 허투아라(赫圖阿拉)이다. 허투아라는 지금의 요녕성 무순(撫順)시 신빈(新賓)만주족자치현 영릉진(永陵鎭) 노성촌(老城村)이다.
일찌기 명나라 만력31년(1603년), 누르하치는 포아라(佛阿拉)에서 허투아라로 옮겼다. 포아라는 줘페이아라(作費阿拉)이라고도 쓰는데, 모두 만주어의 Feala의 한자표기이다. "Fe"는 만주어로 "오래된 것" 또는 "옛날 것"이라는 의미이고, "ala"는 만주어로 "언덕"이라는 뜻이다. 합치면, "오래된 언덕" 또는 "옛 언덕"이라는 의미이다. 한자로 번역해서 "구성(舊城)", "고성(古城)"이라고 쓴다. 누르하치가 포아라에서 허투아라로 옮겨갔으므로, 포아라는 옛날 언덕 또는 오래된 언덕이 되어버린 것이다. 포아라는 산위에 건설되어 있다. 여진에는 산성(山城)이 많은데, 이는 군사방어목적때문이다.
포아라성은 물론 지금은 없어졌다. 한문문헌에는 기재가 없는데, 조선의 신충일(申忠一)이 쓴 <<건주기정도기(建州紀程圖記)>>에 유일한 기록이 남아 있다.
포아라성은 3중성이다. 첫번째는 책성(柵城)인데, 나무로 성을 둘러쌌는데, 대체로 원형이다. 이는 금나라 태조인 아구타가 버드나무를 심어서 둘러싼 "황제채(皇帝寨)"에서 조금 진보한 것이다. 책성내에는 누르하치가 권력을 행사하고 주거하는 곳이 있다. 책성내에는 동서 두 구역으로 나뉘는데, 서구는 주로 6조로 건축되어 있다. 여기에는 고루(鼓樓), 객청(客廳), 행랑(行廊)등이 있다. 고루는 20여척의 높은 곳에 건축되어 있고, 1층누각의 형식으로 건축되었다. 누각의 지붕은 단청기와를 썼다. 객청은 5칸이며, 지붕에는 풀로 덮여 있다. 동구는 주로 9조의 건축으로 나누어져 있다. 1간이 지붕을 풀로 덮은 간단한 건물인데 반하여 나머지 8개는 모두 기와를 덮은 건물이다. 누르하치의 거실은 한가운데 있다. 3칸짜리 집이다. 지붕은 청기와로 덮었고, 바깥에는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다. 남쪽에도 건물이 하나 있는데, 10여척의 높은 곳에 세워져 있다. 북쬭에도 건물이 하나 있는데, 3칸이고, 기와로 덮여 있다. 동구와 서구의 사이에는 담장으로 갈라져 있는데, 가운데 문이 하나 있다. 책내의 누각과 방들은 모두 벽에는 석회를 발랐고, 기둥에는 그림을 그렸다. 두번째는 내성(內城)인데, 주위는 2리쯤된다. 성벽은 나무와 돌을 섞어서 쌓았다. 치첩(稚堞)과 망루(望樓)가 있다. 내성에는 주민 100여호가 살고 있는데, 누르하치의 "가까운 친척들이 거주하고 있다" 슈르하치의 집 대문에는 대련이 걸려 있는데, "적처청산, 신거녹림(迹處靑山, 身居綠林)"이라고 쓰여 있다. 성의 동쪽에는 사당이 있다. 세번째는 외성(外城)인데, 주위 약 10리이다. 성벽은 먼저 돌로 쌓고 다시 나무를 둘렀으며, 다시 돌로 쌓고 다시 나무로 둘렀다. 높이는 10여척이다. 내외에 진흙을 발랐다. 치첩, 사대(射臺), 호구(濠溝)는 없다. 성문은 나무판인데, 자물쇠는 없다. 문을 닫은 이후, 나무를 옆으로 걸어놓는다. 외성문위에는 적루(敵樓)가 있는데, 위에는 풀로 덮였다. 외성에는 300호정도가 사는데, 누르하치의 장수들과 그 가족들이 거주한다. 성안의 샘은 겨우 4,5군데 있어 물이 충분하지 못하다. 성안의 사람들은 겨울에는 강물을 길어서 성내로 옮겨오는데, 아침부터 저녁까지 줄줄이 계속된다. 아침과 저녁에 북을 세번 치며, 순경(巡更)은 없다. 책에는 또한 이런 내용도 기재하고 있다. 누르하치의 생긴 모습이 "뚱뚱하지도 않고, 마르지도 않았다. 몸은 강건하며, 코는 똑바르면서도 크다. 얼굴은 쇠와 같고 길다." 그는 머리에 담비가죽모자를 쓰고 있고, 목에는 담비가죽 위건(圍巾)을 둘렀다. 몸에는 담비가죽에 장식된 오채용무늬옷을 입었고, 허리에는 금사대를 둘렀고, 칼을 차고 있었다. 발에는 사슴가죽신발을 신고 있었다.
외국의 일부학자들은 포아라를 청나라의 첫번째 수도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 당시 누르하치는 아직 정권을 건립한 것이 아니었고, 최소한 연호를 쓰지도 않았다. 그래서 포아라는 건주위(建州衛)의 중심도시라고 하는 것이 적당할 것이다.
허투아라 : 청나라의 첫번째 수도
만력 31년 건주위의 정치중심은 허투아라로 이전한다. 허투아라는 만주어의 Hetuala의 한자표기인데, Hetu는 만주어로 "횡(橫)"이란 뜻이다. "ala"는 "언덕(崗)"이라는 뜻이다. 허투아라는 바로 횡강(橫崗)이라는 뜻이 된다. 명나라때는 이 곳을 "만자성(蠻子城, 오랑캐성)"이라고 불렀고, 조선에서는 "노추성(奴酋城, 누르하치성)"이라고 불렀다.
허투아라성은 수커수후(蘇克素滸)강과 자하(加哈)강의 사이에 있는 확트인 작은 평원의 언덕위에 있다. 중국고대에 산위에 건립된 최후의 수도이다. 허투아라의 위치는 장점이 많았고, 기후도 적절했으며 물도 적당했고, 형세가 뛰어났다. "여러 산이 둘러싸고 있고, 강물이 도도히 흘렀다" 풍수승지라고 할 수 있다. 고서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국가의 도성이 되려면 큰 산의 아래에 있으면 안되고, 반드시 넓은 강 위에 있어야 한다. 높이는 가뭄이 들지는 않으면서 물이 충분한 곳이어야 하고, 아래로는 물에 가깝지 않으면서 방어에 적절해야 한다. 고성은 규칙을 맞출 필요는 없고, 도로도 반드시 맞추어 만들 필요는 없다" 바로 너무 낮으면 수재가 우려되고, 너무 높으면 물부족이 걱정된다는 말이다. 허투아라는 3차의 대첩을 거치면서 이미 도성의 규모를 갖추고 있었고, 청나라의 첫번째 수도가 된다. 천명원년 즉, 만력 44년(1616년) 정월, 총예패륵 누르하치는 허투하라에서 황색옷을 입고 짐을 칭하며, 후금국을 세운다. 연호는 천명이라고 하고, 나중에 허투아라는 흥경(興京)으로 불리우게 된다. 그 뜻은 청나라가 흥기한 수도란 뜻이다. 허투아라는 후금에서 청까지 6년간 수도로 있다가, 나중에 요양으로 옮긴다.
요양(遼陽) : 청나라의 두번째 수도
천계원년 즉, 천명6년(1621년) 후금은 심양, 요양을 점령한다. 3월 21일, 천명한(天命汗) 누르하치는 요양을 점령하면서, 즉시 요양으로 천도할 것을 결정한다. 요양은 동경(東京)이라고도 한다. 요나라 태종 천현3년(928년)에는 남경으로 승격된 적이 있다. 회동원년(938년)에는 남경에서 동경으로 개칭된다. 금나라때도 여전히 동경으로 불리운다. 원나라때 동경을 요양로(遼陽路)로 개칭한다. 명나라때는 요동도지휘사사를 둔다. 관할지역은 "동으로는 압록강, 서로는 산해관에 이른다. 남으로는 여순해안에 이르고 북으로는 개원에 이른다" 나중에 요양에는 요동경락아문(遼東經絡衙門)을 둔다.
후금은 요양으로 천도한 후, 요양 신성(新城)을 축성한다. 누르하치는 요동성의 동쪽 5리의 태자하(太子河)변에 궁실을 건축하게 하고 그곳으로 옮긴다. 누르하치가 동경신성을 건설한 목적은 4가지였다. 첫째는 강을 장애물로 삼아 명나라군대가 동쪽에서 쳐들어오는 것을 막는다. 둘째, 안정되게 주둔하기 위하여 신성을 별도로 건설한다. 셋째, 만주족이 거주하는데 한인들이 반항하지 못하게 한다. 넷째는 한족과 만주족을 별도로 거주하게 하여 만주족의 한화를 막는다. 요양은 원래 남, 북 두 개의 성이 있었고, 남성에는 주요동도지휘하의 군사정치기구가 들어 있고, 북성에는 평민백성이 살았다. 후금관병과 그 가족들이 요양으로 들어온 후, 먼저 "요양의 관민을 북성으로 옮기고, 남성에는 여러 왕과 신하 백성이 거주했다" 신성을 건설할지 여부를 놓고, 누르하치는 여러 패륵과 논쟁을 벌인다. 누르하치는 이치를 들어 여러 패륵과 대신을 설득한다. 패륵과 대신은 전부 "좋다"고 하게 된다. 이로써 요양으로의 천도는 결정되었다. 이곳은 산과 평원이 결합된 곳에 건립된 도성이다.
성경(盛京) : 청나라의 세번째 수도
천명10년 즉 천계5년(1625년) 3월 1일, 누르하치는 요양에서 심양으로 천도할 것을 결정한다. 천도를 하여 수도를 정하는 것은 사직의 대사이다. 역사상 매번 수도를 정하고, 수도를 옮기는 일은 격렬한 논쟁을 수반했었다. 예전에 유방이 낙양 혹은 관중의 어디를 수도로 할 것인지를 정하지 못하고 있을 때, 군신들은 각자 자기의 주장을 펼쳤다. 장량은 "관중은 왼쪽에는 곡,함이 있고, 오른 쪽에는 농,촉이 있어, 옥토가 천리이며, 남으로는 파촉의 풍요가 있고, 북으로는 호원의 이로움이 있습니다. 삼면이 막혀 있어 지킬 수 있고, 물이 순조롭게 아래로 흐르니, 충분히 쓸만합니다. 이는 금성천리요, 천부지국입니다" 결국 유방은 장량의 의견을 채택한다. 그러나, 묘당에서 도성을 논의하는 것은 청태조와 한고조는 달랐다. 한나라는 신하가 임금에게 간했으나, 청나라는 임금이 신하에게 말한 것이다. 누르하치의 제2차천도는 요양천도와 마찬가지로 또 다시 군신간의 논쟁을 불러왔다.
<<청태조실록>>에는 이렇게 기재하고 있다. "황제가 여러 왕과 신하들과 의논하여, 심양으로 천도하고자 했다" 그러나, 누르하치의 의견은 여러 왕과 패륵들의 반대에 부닥친다. 여러 왕과 대신들은 "동경을 축성했고, 궁실이 이미 건설되었는데, 백성의 집은 아직 완비되지도 않았다. 지금 다시 이전한다면, 황량하게 되고, 다시 노역을 해야 할 것이니, 나라를 힘들게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즉, 동경(요양)의 관민들은 궁성을 짓느라고 힘들게 일했고 아직 완공되지도 않아서, 이미 백성들이 힘들어하고 있는데, 다시 천도해서, 백성들의 재산을 들이고, 일을 시키게 된다면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다는 것이다. 누르하치는 이에 동의하지 않으면서, 심양으로 이전해야 하는 이유를 역설했다.
"심양은 형세가 아주 뛰어나다. 서로는 명나라를 정벌할 수 있는데, 두얼비에서 요하를 건너면 길이 곧바르고 또한 가깝다. 북으로는 몽고를 정벌할 수 있는데, 2,3일이면 닿을 수 있다. 남으로는 조선을 정벌하는데, 청하로를 따라서 진격하면 된다. 그리고 혼하, 수커수후강의 상류에서 나무를 베어 쉽게 흘러내려오게 할 수 있어, 궁실을 지을 수 있고, 땔감이 무궁무진한 곳이다. 때때로 사냥에 나선다면 산이 가깝고 짐승이 많다. 강에는 물고기가 많아서 역시 잡아서 취할 수 있다. 짐은 이런 것까지 생각했는데, 너희들은 아직 생각하지 못했구나."
누르하치의 심양천도의 명은 99자에 달한다. 그리고 위치를 정한 이유를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그래도 누르하치는 여러 신하들을 설복시키지 못했다. 그러자, 누르하치는 최후로 이렇게 단언했다: "내가 이미 심사숙고하여 정해서 천도하고자 하는데, 너희는 왜 따르지 않겠다는 것이냐"
누르하치는 여러 신하들의 의견을 물리치고, 결연하게 천도한다. 즉 천명10년 천계5년(1625년) 3월 3일에 동경성을 나와서 호피역(虎皮驛)에 주둔한다. 4일, 심양에 도착한다. 이로부터 심양은 동북지방의 정치, 문화, 군사와 교통의 중심이 된다. 지금의 심양고궁은 주로 누르하치, 청태종 시기의 궁전이며,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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