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전쟁이야기

미 구축함과 일 전함의 처절한 육박전

구름위 2013. 9. 26.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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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구축함과 일 전함의 처절한 육박전

태평양 전쟁이 개전하면서 일본군은 미군의
과학 기술과 생산 경제력을
두려워했지만 전투에서 막상
맞 부닥치면 미군은 용맹함과  강인함은 
자신들 일본군을
압도하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다.


미 구축함 라피  DD-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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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은 자기들 무사의 나라 병사들처럼 죽음을 초개와 같이 알고
육박전이나 돌격전을 감행하는 것은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다.

 


이는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군과 전투해본 인상으로 백인종이란
뒤가 무르고
악착같지 못하다는 인상을 가진 것에서 비롯된것이다.

 


진주만 기습과 함께 말레이로 필리핀으로 몰고 들어가
영국군이나
미군들을 부수고 일방적인 승리를 거둔 일본군은
허망하게 패퇴하는 미영군을 보고 ‘ 그러면 그렇지 ---
제까짓 코쟁이들이’
하였었다.

그러나 미군의 반격이 시작되고 과달카날에서 미군의
해병대들과
대결을 해본 일본군은 그 생각을 깨끗이 버려야 했다.


미 해병들도 일본군 못지않게 총검 돌격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육박전도 사양하지 않았다.

 

일본군은 놀랄 수밖에 없었는데 예상치 않던 미군들의
용감성은 바다에서도
발휘되어 일본 해군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작년에 포스팅했던 글로서 전함들이 선도하는 적의 대함대의
기습에 혈혈
단신 돌격을 해서 희생을 하고 함대를 구한
에반스 함장의 이야기[CLICK!]를 기억하시는
분이 있을 것이다.

 


1600톤급의 구축함과 3만톤의 전함은 성인과 유치원생의
차이만큼의
전투력 차이가 있어서 대결이라던가 맞선다던가하는
용감한 행동은
상상하기도 힘든 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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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에반스 함장의 영웅적 전투가 있기 2년전
과달카날에서
일본 해군의 거함 히에이에게 육박해서
일 함대 사령관을 비롯해서 다수를
살상하고 큰 피해를 준
미 구축함이 있었다.

 


구축함 라피[Raffey-USS DD 459 함]다.
구축함 라피는 1941년 10월 31일 진수한 비교적 새 배얐다.


배는 나중에 크게 활약한 프레처나 기어링급 보다는 조금 작고
구형인 벤슨 급으로서 1620톤의 크기에 5인치 주포가
4문과 5문의 20mm 기관포가 있었다.

 

그래도 라피는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여러 전장에서 활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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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반격을 개시했던 과달카날 전역(戰役)에서 치열했던
육상전과
마찬가지로 해전도 자주 발생했었다.

 


1942년 11월 13일.

구축함 라피는 대니얼 캘라한 제독이 지휘하는
다섯 척의 순양함과
여덟 척의 구축함중의 힌척으로서
과달카날 섬과 사보섬의 중간 해역에 있는
초계선을 따라 야간 순항하고 있었다.

 


과달카날의 핸더슨 비행장을 야간 포격 임무로 내침하는
일본 함대나 과달카날 일본군 보급함대를 경계하는
초계 임무를 수행중이었다.

 


라피는 다섯 척의 구축함중 구축함 쿠싱의 뒤에,
그리고 스테렛 과 오배넌의 앞의 2번 위치였다.

 


자정 무렵 레이다 견시는 적함 출현을 보고했다.
후에 과달카날 해전이라는 이름이 주어진 해전이 내도한 것이다.


야간을 이용해서 내습한 일본 함대는 아베 히로아키 중장이
지휘하는
두 척의 전함, 한 척의 경순양함,
그리고 열 네 척의 구축함이었다.

두 일본 전함은 히에이[比叡]와 기리시마[霧島]였다.
[기리시마도 다음날 밤, 이차 과달카날 해전에서
 미 전함 와싱턴의 일제 사격으로 침몰하였다.]


일본 전함 히에이 [比叡]-36,600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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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함대보다 압도적으로 강한 세력이었다.
미 함대가 누릴 수 있는 것은 단지 함들이 장비하고 있었던
레이다들 뿐이었다.

 


적이 포사격 거리에 이르자 즉시 교전이 벌어졌다.


조용한 해상을 포성이 구르고 각 함의 포에서 토하는
섬광과
서치 라이트 불빛이 난무했다.

구축함 라피도 전투에 뛰어들어 적함들에 포사격과
어뢰 발사를 되풀이 하였다.

 


이 치열한 전투 중에 적 기함 히에이가 갑자기
어둠을 뚫고
라피의 좌현 측방에 나타났다.


두 군함은 불과 몇 분 내에 충돌이 확실한 전방의 한 방향을
향하여 서로 가까워지며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었다.

 


전함 히에이와 구축함 라피는 불과 6미터 내로 육박했다.


충돌하면 장갑이 두꺼운 히에이는 무사하지만 라피는
침몰을 피치 못 할 것이었다.

 


그 때 라피의 위치는 절망적 처지에 있었다.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적 함대의 본진에 뛰어 든 것이다.

 


바로 뒤에 일본 전함이 있었고 다른 전함이 바로 좌현 쪽에
있었고
좌현 함미 쪽에서 일본 해군 구축함이 두 척이
항해 중이었다.

 


이제 방법은 없었다.
아수라와 같이 싸우고 혼란을 틈타서 도주 하는 수밖에 없었다.

 


라피는 회피 기동을 하면서 바로 지척에 산더미같이 거대하게
보이는 히에이에 가지고 있던 모든 화력을 집중했다

높이 보이는 함교가 주 목표였다.
여섯 문의 20mm 기관포가 일본 함대 지휘소인 함교를
비질하듯 두들겼다.

 


여기에 네 문의 5인치 주포도 거의 영(零)거리에서
히에이에게
불을 뿜었다.
아베 중장이 큰 부상을 입었고 참모장이 전사했다.


당황했던 히에이도 응전했다.
전함의 주포인 14인치 포탄 한 발이 라피를 때렸다.

 


라피에 이 거대한 탄의 충격에 휘청거릴 때 뒤에서 따라오던
일본
구축함 데루즈키가 부채 살처럼 여러 발 발사한 어뢰중
한발이
라피의 함미에 명중하였다.



일본 전함 히에이 - 쇼와 일왕이 제일 좋아해서 관함식때
자주 이용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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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미에는 탄약고가 있었다.
함장은 이미 항해 능력을 잃은 배를 버리고 탈출하라는
총원 퇴함의 명령을 내렸다.
퇴함 명령이 내리던 순간 함미의 탄약고가 대 폭발을 일으키며
라피는 두 조각이 나서 급속히 침몰했다.

 


승무원중 함장을 비롯해서 59명이 전사했고 116명
부상한채 구조되었다.


일본 구축함 데루즈키는 한달 뒤 과달카날 근해에서
미 해군 어뢰정 PT 37과 PT 40에게 뇌격을 당하고
역시 발화한 불이
폭뢰에 번져 폭발과 함께 침몰했다.

 



히에이의 공습 회피 기동--
과달카날에서 심한 손상을 입고 귀항하던 히에이는 날이 밝자
뒤 쫓아온 B-17의 폭격으로 항해 불능상태로 일 구축함에게
자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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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과달카날 해저에서 라피의 함체가 발견되었는데 후반부
삼분지 일은 흔적도 없었지만 전반부는 히에이의 주포에 맞은
함교 아래 부분의 커다란 파괴공을 제외하고 비교적
깨끗한 상태였다.

 


네 문의 주포와 기관포들은 모두 좌현으로 돌려져 있었다.

격침될 때까지 히에이에게 화력을 퍼부었던 사실을
증명해준 것이었다.

 


사지에 몰려서 필사적으로 발휘한 용감함이라지만
구축함 라피의 분전과 희생은 한 결과를 가져왔다.
이날 과달카날 해전에서 미 함대는 참패를 당했다.


함대 사령관 캐라한 제독과 차석 지휘관 스코트 제독도
전사했고 다량의 전투함을 상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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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뒤 온전하게 작전을 계속할만한 전투함은
중순양힘 헤레나와 구축함 한 척뿐이었다.
이에 비해서 일본 함대의 손실은 상대적으로 경미했다.


히에이가 세 척의 미군 구축함의 공격으로 피해는 입어
대파되었지만
기리시마와 경순양함 나가라, 그리고 네 척의
구축함이 온전해서
지척에 있는 과달카날 섬의 헨더슨
비행장을 포격할 수가 있었다.

[과달카날 섬의 해병들이 이날 밤 천지를 진동하는 해전의
포 사격소리로 잠을 이루지 못했었다.]

 


잔여 함대가 그대로 과달카날로 돌격하여 함포사격을 할
전력이 충분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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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라피의 돌발적인 공격으로 부상을 입고 자기 눈
앞에서 부하들이
피투성이가 되어 죽어간 것을 보고 간담이
서늘해진 함대 사령관
아베 제독은 작전 중지를 명하고
철수하고 말았다.

 


사가들은 아배가 평소 야마모토 이소로쿠[山本 五十六] 연합함대
사령관과 사이도 
안 좋았었고 과달카날을 사수하려는
해군 전략을 반대하고 있었지만
피투성이가 된 자신과
부하들의 피해에 그만 마음이 약해진 것이
큰 원인이었다고 평했다.

그가 좌승(座乘)했던 히에이는 귀항 중 미 항공 공격으로
침몰 당했고
그는 야마모토에게 해임 당한 뒤 삼개월 뒤
불명에 제대나
다름없는 강제 퇴역을 당했다.

두번째 구축함 LAFFEY DD724
비교적 장수하여 1975년에 퇴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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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피가 침몰한뒤 미 해군은 새로 진수하는 구축함에 다시
라피라는 이름을 주었다.[DD-724]

영웅 에반스 함장

  일본 야마도 함대에 맞선

        미 구축함 함장 에반스 중령

 

이 글에서는 필리핀에서 세계 최대의 전함 야마도가 지휘함인 거대 일본 해군 함대의 기습을 당해서 절대 절명의 위기에 몰린 미 함대를 홀로
적 함대에 돌격을 감행해서 함대를 구하고 자신의 목숨을 희생한
미 해군 어네스트 에반스 중령과 그의 구축함 존스톤의 영웅적인 전투를 소개하겠다.
  


 

 

 

1944년 맥아더의 오랜 숙원이었던 필리핀 레이테 만에서 대규모 미군 상륙 작전이 감행되었다.

이를 반격하고자 일본 해군은 보유하고 있던 모든 전투함을 총동원해서

반격에 나섰다.

이 레이테 만 해전은 이차 세계 대전뿐만 아니라 세계 역사에서

최대의 해전으로 꼽힌다.

전 일본 해군이 동원한  네 개의 함대들이 이 레이테 해전에
참전했으며
네 개의 해전으로 이루어졌다.

시부얀 해전, 수리가오 해전, 다른 하나가 산 베르나르디노 해전, 그리고 다른 하나가 사마르 해전이다.

글의 포거스가 된 사마르 해전은 네 개의 일본 함대 중에 중앙 함대이었던 구리다 다게오 제독이 지휘하는 일본 제국 해군 제 2함대와 미 해군 호위 항모 부대 사이에 벌어졌다.

.

일본 함대가 습격한 미 호위 함대에 에반스 중령이 지휘하는 구측함

DD-557함이 있었다.

총톤수 2700톤에 최대 속도 35노트에 5인치 포와 어뢰를 가진

플레쳐 급 구축함으로 어뢰를 장비했다.

승무원은 273명이고 2년 반전인 1942년 5월에 취역한 함정이었다.


존스톤은 1944년20일 부터 동부 레이테와 앞바다의 제공권을 마련하고

상륙부대 지원 임무와 대지상 공격의 임무를 띄고 작전 중인

호위 항모들을 호위하던 중이었다.

존스톤이 배속된 부대는 Taffy 3라는 부대로서 함대 사령관 스프레그 소장이 기함으로 삼은 펜쇼 베이(CVE-70)를 포함한 6척의 작은
미니 호위 항공 모함을 세 척의 구축함과 네 척의 호위 구축함이 엄호하는 부대였다.


스프레그 소장의 Taffy 3의 항모 부대뿐만 아니라 Taffy 1과
Taffy 2의 호위 항모 기동부대가 이번 상륙작전에 참가하고 있었다.


호위 항모는 지프 항모라고도 불리던 작은 항모다.

좀 과한 표현인지는 몰라도 일반 화물선에 이 착륙 간판을 얹은 배라고

보면 된다.


정규 항모가 30,000톤급이상인데 이 호위항모는 크기도 10,000톤 미만,

정규 항모가 100기 이상 항공기를 싣는데 이 지프 항공기도 15기에서

30기 정도의 소수의 항공기만 싣는다.

속도가 정규 항모가 30노트가 넘는데 호위 항모는
15-19노트 수준이다.


호위 항모 -- 빈약한 함교가 배의 규모를 말해준다.

원래는 영국에서 독일 U 보트로부터 선단을 호위하기 위해서 대잠
공격기를 싣고 다니던 용도로 개발한 것으로서 미 해군은 상륙전
지원 등 여러 용도로 썼고 여러모로 쓸모가 커서 전쟁 중에 122척이나
만들었었다.


이제 다시 존스톤 운명의 날인  1944년 10월 25일로 가보자.

구리다 다케오(栗田 健男)중장이 지휘하는 일본 해군 제2함대가

남 중국해에서부터 사마르 해안을 따라 레이테 상륙 교두보로 접근하던 것이 미군에게 알려진 것은 25일  새벽, 오전 6시 27분 미 뇌격기에
발견되고
나서 부터이다.

Taffy 3 호위 항모 부대에서 단지 17마일 밖에 안 떨어진 곳에서이었다.

미군 기록은 2함대를 중앙부대로 부르고 있다.

이때 이 다가오는 일본 함대에게 제일 두려운 대상인 미 항공모함

부대는  레이테 북쪽에서 접근해서 양동 작전의 유인책을 쓴 오자와

제독의 항모 부대에 속아서 이 해역을 떠나서 북쪽으로
달려간
터였다. 


미군 Taffy 3 호위 항모 부대는 비상이 걸렸다.


에반스가 속한 Taffy 3 호위 항모 부대를 향해 기습적으로 질주해
오고 있는 일본 2함대는 네 척의 전함, 일곱 척의 순양함, 열 두 척의
구축함으로 편성되었다.


미군 함대에게는 공포스러운 사실로 기습하는 일본 함대에는 세계 최대 거함 72,000톤의 전함 야마토가 기함으로 중앙에서 달리고 있었다.

장비한 9문의 함포가 구경만 각 460미리의 거포이니 미 함대에 난입해서 포탄을 쏟아 놓기 시작하면 미 함대는 끝장 날 것이었다.
어느 모로 보나 일본군의 대 함대는 미군의 미니 항모 부대를 압도하고
남음이 있었다.


거함 야마토- 7만 2천톤의 세계 최대 거함, 다음해 4월7일 오키나와에서 격침당함

기습한 일본 2 함대는 금방 함대 최외곽에 있던 구축함 존스톤과
조우했다.

구축함 존스톤은 6척의 호위 항공모함 군과 일본 함대사이의
운명적인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존스톤은 즉각 달려오는 일본 함대의 앞에서 지그재그로 달리며
폭 2,500미터의 연막을 뿌리기 시작했다. 


작은 전투함으로 대 함대에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방어 수단이었다.

그러나 존스톤이 해면위에 달리면서 연막을 뿌리자마자 일본 함대는

포사격을 개시했다.


거대한 포탄들은 지그재그로 바다를 달리는 존스톤

주위에 물보라를 일으키며 떨어졌다.

존스톤도 상대적으로 미약한 화력이었지만 5인치 포문을 열어
응전했다.


존스톤은 이날 해전에서 연막 차장의 첫 번째 함이었고 포문을 연

첫 번째 함이었고 어뢰를 발사한 첫 번째 함이었다.


첫 20분간  존스톤은 적 함대의 전함과 순양함들이 쏟아 붓는 포격에

단신 고립무원의 상태로 맞서야 했다.

그러나 존스톤의 5인치 함포는 거포를 휘두르던 일본 함대에
미치지도
못했다.


이 순간 존스톤 함장 어네스트 에반스 중령의 투지가 불꽃처럼
폭발했다.

기함으로부터 아무런 지시가 없었음에도 그는 적 함대를 향하여
돌격을
명하였다.

존스톤은 그 때까지 취하던 방어 진형에서 튀어나와 적 함대를 향해

파도를 박차고 화살 같은 돌진을 시작했다.

함의 주변에서는 적함들의 포탄이 빗발처럼 떨어지고 있었다.


일본 함대는 선두에 일곱 척의 구축함이 앞서고 뒤에 한 척의 경순양함과 세 척의 중순양함이 따르고 그 뒤에 주력함들인 네 척의 전함들이
따르는
순서였다.

그리고 여기에 더해서 동쪽으로는 세 척의 순양함과 서너 척의
구축함들이 나타났다.


다행이었던 것은 이때까지 존스톤 주변에 빗발같이 떨어지는 포탄들이

아직 목표인 존스톤을 타격한 것이 한 발도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존스톤은 일본 함대와의 거리가 10마일로 단축되자 최 근거리에서

달려오는 일본 중순양함 구마노(熊野)를 향하여 5인치 포의 포문을
다시 열었다.

중순양함 구마노는 1만 2000톤의 중량을 가진 거함이었다.

몇 발의 포탄이 구마노에 명중하여 타격을 하는 것이 목격되었다.



동시에 존스톤 주변에 일본 순양함들이 발사하는 8인치 포탄이 바로
함의
현 밖으로 낙하하며 적색의 염색 액체가 존스톤의 포술장 로버트 헤이겐 대위의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일본 해군들은 탄착점을 쉽게 관측하기 위해서 해면을 물들이는

표시탄을 사용했었다.

그는 얼굴을 피투성이같이 만들어 버린 붉은 물감을 닦아 내며
사격 지휘를 계속했다.

 

 

존스톤은 계속 달리는 5분 동안 전력을 다해 200여발의
함포탄을 발사했다.




적 함대와 거리가 더욱 가까워지자 함장 에반스 함장은 벼락치듯
고함을 질렀다.

“어뢰 발사!”

에반스의 명령일하에 존스톤의 함체에서 열 발의 어뢰가 동시에
발사되어
물살을 가르고 순양함 구마노를 향하여 돌진해갔다.


어뢰 발사와 동시 존스톤은 그가 살포한 짙은 연막 안으로 몸을 피했다.

존스톤은 잠시 후 연막 지대 안에서 나와서 명중한 어뢰가 일으킨
맹렬한 화재에 휩싸인 구마노를 발견했다.

구마노의 함수가 완전히 날아간 참혹한 꼴이 되어 있었다.

구마노는 이 피해로 해전장에서 물러났고 마니라로 대피했다가
일본으로
돌아가던 11월25일 미 함재기들에게 격침되었다.


함성이 존스톤의 함내를 흔들었지만 적 함대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포격은 더욱 격심해졌다.
안개같이 깔린 연막을 뚫고 어마어마한 포성들이 해면을
구르며 천지에 퍼져 울렸다.  
그리고 존스톤의 운도 다했다.

전함 공고에서 발사한 세발의 거탄 14인치 포탄이 존스톤을

무자비하게 강타했다.


뒤따라서 세발의 6인치 포탄이 존스톤을 뒤흔들었다.

그 포탄들은 다른 경순양함에서 발사되었거나 먼 뒤의
전함 야마토가 발사한 것으로 추측되었다.

그 타격은 작은 존스톤에게 치명적인 것이었다.


존스톤은 두 기의 엔진이 정지해버렸다.

세 개의 5인치 포탑들을 움직일 동력도 소멸되어 버렸다.

포격의 조준에 절대 필요한 자이로 콤파스도 작동 불능 상태가 되었다.


연막이 자욱하게 깔린 지옥 같은  전장에  열대성 스콜이 몰려와

소나기가 내렸다. 

존스톤은 몇 분 간 함을 가려준 소낙비 속에서 긴급수리를 했다. 

그러나 적 포탄이 작렬한 함교에서 전원 대피를 해야 했다. 


왼쪽 두 개의 손가락이 날아간 에반스 함장은 후부 함실로 이동하여

함의 지휘를 계속했다.

 

존스톤이 희생적인 분투는 적 거대함대의 출현에 떨던  Taffy 3 함대에

용기를 주었다.

존스톤의 활약을 본 함대 사령관 스프레그 소장은 자신 지휘 하에 있던

모든 구축함들과 호위 구축함들에게 일본 함대에 돌진하여 어뢰를 발사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러나 존스톤은 이미 어뢰를 다 쏘아 버렸고 엔진은 긴급 수리한

한 쪽만 겨우 가동하는 상태라 적 함대에 돌진하는 다른 구축함들과
같이
행동을 같이 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그러나 투지에 불타는 에반스는 만신창이의 존스톤을 적함을 향하여

돌격시키며 포격을 계속하였다.


바다 위에는 여러 구축함이 호위 항공모함 함대를 보호하기 위해서
뿌린
연막대가  여기저기에 산재했다.

존스톤은 이런 연막대 하나를 통과하여 돌진하다가 하마터면 동료 구축함인 히어만(DD-532)호와 거의 충돌할 뻔했다.

충돌 일보 직전에 두함은 급속 후진을 함으로서 겨우 수 미터 차이로

위기를 피할 수 있었다.

 

해면은 미 구축함들이 뿌린 연막이 자욱하게 퍼져 시계가 안개 속과

같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에반스는 포술장에게 적함이 선명히 보이지 않으면 포격을

자제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한 연막대를 벗어난 8시 20분 존스톤은 갑자기 나타난

30,000톤급 거대 전함 공고와 맞부딪혔다.


거리는 단지 7,000야드도 되지 않았다

전함 공고 급의 특징인 파고다 형 함교가 선명하게 나타났다.

공고는 특이하게도 영국제 전함이다.

일본이 영국과 사이가 좋던 1913년 영국 비커스 조선소에서 진수됐다.

오래되었지만 몇 번의 개장(改裝)을 거쳐 성능이 좋았다.

쾌속이 특징으로 속도 빠른 항공 모함의 기동 작전에 자주 참여했었다.


영국제 일본 해군 전함 공고


포술장 헤이겐 대위는 부하 수병들에게 중얼 거렸다.

“잘 보았으면 포격 개시!”

40초간 존스톤은 30발의 포탄을 퍼부었다.


비록 자이로가 고장난 상태였지만 명중률은 기적적이었다.  

발사된 30발 중 15발이 공고의 파고다 선상 구조에 명중했다.

전함도 몇 발의 14인치 거탄을 퍼부었지만 다행히도 모두 빗나갔다.


포격 교환 뒤 회피 기동 중에 에반스는 호위 항모 함대 기함

갬비어 베이(CVE-73)가 일본 순양함으로부터 포격을 받는 것을
발견했다.


갬비어 베이는 속도도 느렸고 무장도 5인치 포 한 문 밖에 없었다.

막강한 일본 순양함이 결심하고 덤벼들면 막을 재주가 없었다.


위기의 순간이었다.

에반스는 이 순간 비할 수없이 장렬한 명령를 내렸다.

“적 순양함의 포격을 존스톤으로 유도하라 !”


긴급한 실전 상황에서 전술적 가치가 자신들보다도 훨씬 큰

호위 항모를 자신들이 희생함으로서 항모를 보호해야 한다는
판단에서
나온 명령이었다. 


존스톤은 만신창이의 함체를 힘들게 돌아가는 엔진 하나로 움직여서

돌격 기동으로 들어가며 포격을 개시했다.

순양함과 주고받는 포전에서 존스톤은 네 발의 명중탄을 성공시켰다.


하지만 존스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호위 항모 갬비어 배이는

일본 순양함에 피격되어 격침되고 말았다.


그러나 더 가공할 장면이 전방 해면에 나타났다.


일본 함대의 구축 함대가 미군에 대형 함정이 없는 것을 알고 에반스가

했던대로 미군 호위 항모 함대에 전속으로 돌격해오고 있는 것이었다.


존스톤은 급속히 가까워지는 적 구축함대의 진로를 막고 
포문을 열었다.

포격은 단종진으로 다가 오던 선두 구축함에 집중하였다.


일본 선두 구축함이 손상되어 포격이 멎어지자 존스톤은 두 번째의

구축함으로 포격의 목표를 옮겼다.


일본 구축함들은 겁 없이 날뛰는 존스톤의 포격 사거리 밖으로

일단 물러나서 일제히 어뢰를 발사했다.

상어처럼 물속을 달려오던 일본 93식 산소 어뢰들은 모두 빗나갔다.

어뢰 발사가 실패롤 하자 일본 구축함대는 분풀이 하듯이 존스톤에게

포격을 집중하였다.


여기에 아까 존스톤과 교전을 하던 순양함이 합세하였다.

바로 이 운명의 순간 힘들게 존스톤을 움직여주던 한 개의 엔진도

죽어 버렸다.

존스톤은 모든 추력을 잃고 포탄 우박을 맞으며 속수무책으로
바다위에서
표류 할 수밖에 없었다.


적함들은 회심의 미소를 띠며 다리가 부러져 앉아있는
이 골치 덩어리를
처치하기위해서 접근해왔다.


포격은 더욱 거칠어졌다.

존스톤은 전방 포탑 하나가 날아가 버렸고 다른 포탑도 작동 불능

상태가 되었다.

적 포탄 한 발이 함교 근처의 40미리 기관포대에 있는 포탄 보관

락커를 파괴해 버렸다.

여기서 일어난 화재는 함교 일대를 통제할 수없는 불길로 휩싸 버렸다.


에반스 함장은 그의 지휘부를 하부로 옮기고 동력을 잃은 함을

수동으로 키를 조작하는 수병에게 계속 명령을 내렸다.


빈사 상태의 존스톤 함내였지만 수병들의 투지는 죽지 않았다.

한 40미리 포대에서는 사수들이 계속사격을 하며
“ 탄 더 가져와! 탄 더 가져와 ”
하며 지르는 고함 소리가 들렸다.


존스톤은 사력을 다해 포격으로 일본 구축 함대와 순양함이
호위 항모로
접근하는 진로를 막고 시간을 벌었다.


9시 30분 존스톤은 포탄도 다 떨어지고 출력도 없어져 물위에
유령선처럼 누워 있었다.

일본 구축함들은 존스톤을 반원형으로 둘러싸고 마치 서부 개척 때
평원에서 인디언들이 포장 마차를 들고 싸고 공격하듯이 다량의
화력을 퍼부었다.


동력과 화력을 전부 잃고 함은 물 위에 누워있는 상태인데 적함의
포격까지 격심해지자 용맹한 에반스 함장조차 더 이상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이제는 끝장이 난 것이다.


9시 45분

그는 비통한 어조로 명령했다.

“ 총원 퇴함!”

명령에 전원 바다로 뛰어 들었다.


10시 10분 존스톤은 한 쪽으로 기울며 침몰하기 시작했다.

일본 구축함이 1,000미터까지 다가와서 마치 확인 사살을 하듯

존스톤을 포격해서 격침 시켰다.


존스톤이 침몰하자 한 일본 구축함이 둘러보듯이 침몰 현장으로
달려왔다

침몰 지점 근처에 떠 있었던 존스톤 승무원들은 일본 구축함으로부터

기총 소사를 당할 각오를 했다.


그러나 다가온 일본 구축함은 기총소사를 하지 않았다.

일본 구축함 함장은 바다에 떠있는 미 수병들에게 엄숙히

경례를 하고 등을 돌렸다.

그리고 구축함의 함수를 돌려 일본 함대 쪽으로 돌아가 버렸다


이날 존스톤은 327명의 승무원중 186명을 잃고
141명만이 구출 되었다.

그러나 구출된 생존자 중에 에반스 함장은 없었다.

퇴함 후 그가  바다에 떠있는 것을 본 수병들이 많았는데
어느새 물밑으로
사라졌던 것이다.


이날 전투에서 존스톤을 따라서 공격에 가담했던 구축함 호엘(DD-553) 과 호위 구축함  사무엘 B.로버트(DE-413)가 침몰되었다.
두 전투함 역시 존스톤 못지않은 투지로 싸워서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존스톤 절반 크기의  작은 호위 구축함 로버트의 활약은 특히 대단해서 "전함같이 싸운 호위 구축함"이라는 호칭을 얻었다.
동영상에 로버트의 활약이 잘 소개 되어있다


그러나 존스톤이 앞장 선 반격은 호위 공모들에게 황금 같은
시간을 주었다.

생각지도 않았던 일본 2함대의 기습에 당황했던 Taffy 1,  Taffy2,  Taffy3 호위 항모 함대들은 존스톤이 이끄는 구축함들이 싸우는 동안 힘들게 모든 공격기들을 이륙시켰다.

이들 함재기들은 대형을 짜서 해전 내내 계속해서 상공으로부터
일본 함대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더구나 일본 해군의 오자와 항모부대에게 북방으로 유인되어
잘못
달려갔던 할제의 기동 부대가 함수를 돌려 전속력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엄호기가 한 기도 없는 일본 함대에게는 별로 반갑지 않은 상황이
되어가고 있었다.


스프레그의 사령관은 9시 20분 갑자기 구리다의 주력함인 야마도가
함수를 돌려 후퇴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
미 해군의 어뢰를 피하기 위한 회피 운동이었는데 야마도는 회피에는
성공했지만 그뒤 다시 돌아오지않았다.

구리다 부대는 다시 산 베르나르디노 해협을 통과해서 빠져 나갔다.


이날의 해전을 레이테 해전의 하나인 사마르 해전이라고 후에
기록된다.

이날 사마르 해전에서 몸을 던져서 호위 항모부대를 구하고 산화한
에반스 중령은 예전에 미국의 정식 주(州)도 아니고 인디언
테리토리라고 불리던
오크라호마에서 태어났다.


그는 혈통으로 따져 사분지 삼의 피가 인디언 코만치 족의 그것이었다.


그와 같은 인디언 혈통으로서 유명한 전공을 세운 해군 제독은  이차

세계 대전 때 유황도 공격 함대를 지휘했었고 한국 전쟁중  미 함대를
지휘했던 클라크 제독이 있다.


에반스는 차별을 극복하고 해군 사관학교에 들어가 1931년 졸업과

동시 임관하였다. 

그는 항상 인디언 혈통을 자랑했다고 한다.

부하들은 그를 서부 시대 백인에 맞서 싸웠던 시팅 불이나 크레이지
호스들의 인디언 지도자들이
불리던 호칭인 ‘추장’이라는 별명으로
불렀었다.

이날 그의 용전을 보면 그들 선조의 무공이 그에게서 살아 나는 것 같다.


전사한 그에게 미 의회로부터 최고의 무공 훈장인
명예훈장(Medal of Honor)이 수여 되었다.


일본 해군은 레이테 해전에서 만 명이 넘는 전사자를 냈다.
태반의 함정들도
침몰 되거나 파괴되어 연합 함대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 그 뒤 오키나와 상륙전에서 실시하였던 야마토의 
자살 공격을 제외하고는 미군에게 대항할 엄두를 못내고 항구에

 

 

 

 

 

 

묶여있다가  항복을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