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적인 승리 살라미스(Salamis) 해전
다리우스는 군대를 재정비하여 1년 후 곧바로 재침하였다. 이 때 아테네는 단 7천명의 병력으로 마라톤 언덕의 지형이점을 최대한 살린끝에 2만 5천의 페르시아 병력을 격퇴할 수 있었다.
동서양의 대격전속으로
기원전 6세기 중엽부터 중동지역을 통일한 페르시아제국은, 그 힘을 서서히 아프리카와 그리스 지역으로 뻗치기 시작하였다. 특히 다리우스 1세에 의해 이집트와 리비아에 대한 원정이 마무리되자, 이제 남은 것은 에게해의 지배자인 그리스 한곳 뿐이었다.
그리스는 100여개의 크고작은 폴리스 연합으로 이루어졌지만, 사실상 아테네나 스파르타가 주축이된 양강 체제였다. 특히 아테네는 BC 5백년경 아시아지역에서 페르시아의 재배에 저항하여 일으킨 저항에 적극적으로 원조하였다.
그러나 이 모든 저항운동을 종식시킨 다리우스 1세는 그리스 세력이 페르시아의 질서에 위협이 될 존재라고 인식하였다. 그리하여 다리우스 1세는 BC492년 1차 원정을 단행하였지만, 엄청난 폭풍에 페르시아 해군이 괴멸되면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헤로도토스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페르시아군의 사망자는 6400여 명이었는데 비해 아테네 군의 피해는 불과 193명으로, 아테네의 승리임에 분명하였다.
마라톤에서의 전투는 그리스연합의 승리임에는 분명하였지만, 명백한 승리였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리스연합에겐 역사상 최대의 승리였지만, 페르시아로 볼 때는 그렇게 큰 의미를 가지는 패배는 아니었다. 더구나 페르시아의 해군은 여전히 건제하였기에, 군수물자만 확보되면 언제든 원정을 재개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마라톤 전투에 참여하였던 장군 중 한명이었던 테미스토클레스(Themistocles)은 해군의 중요성을 간파하였다.
‘만약 마라톤 전투 직후, 페르시아 함대가 아테네군보다 먼저 아테에 시에 상륙하였다면 과연 어떻게 됐을까?’
아마도 아테네시는 불바다로 변하였을 것이고, 폴리스 연합은 힘없이 패하고 말았을 것이다. 당시 아테네에서는 밀티아데스(Miltiades)가 실각하고, 테미스토텔레스(Themistocles, B.C. 527?-460?)와 아리스토티데스(Aristotides)가 공동 집정관으로 통치하고 있었다. 아리스토티데스는 마라톤 전투를 상기시키면서 언제가 다시 찾아 올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지상전 위주의 항전을 주장하였으나, 테미스토클레스는 해군의 양성을 포기하지 않았다.
아테네 함대의 발진
테미스토클레스의 이런 주장은 맹렬한 반대에 부딪혔는데, 우선 중장보병 계층들이 주축이 된 보수파가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나섰다. 테미스토클레스가 주장하는 200척의 함대를 운용하려면 대략 40,000명의 승조원이 필요하였는데, 도시국가인 아테네에서 이만한 규모의 병력을 충당하려면 당연히 중장보병으로 동원될 인력이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또 하나의 문제점은 재원(財源)이었다. 함대 건설안에 따른 군선 건조비용 은 물론이고 30,000명 이상으로 예상되는 노잡이들에게 지급해야할 인건비를 어떻게 해결할지도 고민거리였다.
그런데 BC 483년, 아테네 근교에 있는 라우리온의 은 광산에서 ‘은의 샘’이라 불릴 정도의 엄청난 광맥이 새로 발견됀 것이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은광개발에서 나온 이익을 시민들에게 골고루 분배하자는 보수파의 제의를 일축하고 그 돈으로 함대를 건설하자고 주장했다.
이듬해인 기원전 482년에 그의 정치적 라이벌인 보수파의 거두 아리스티데스가 아테네에서 추방되자 이제 ‘200척의 군선 건조’를 마침내 관철시킬 수 있었다.
[아테네의 외항 피레우스 항. 함대 건설 시작 전에 이미 해군을 위한 기반시설이 거의 완공되어 있었던 것도 아테네가 가진 이점이었다.]
험난한 해군 양성의 길
고대에는 바람을 이용해 운항하는 범선과 노에 의해 운항하는 갤리선이라고도 부르는 노선(櫓船)이 있었다. 범선은 운송능력은 크지만 바람의 변화에 행동이 좌우되는 일이 잦았으므로 주로 상선이나 수송선 용도로 사용되었고, 군사적 용도로는 바람이 약하거나 역풍이 불 때도 항해할 수 있는 갤리선이 주로 이용되었다.
갤리선이 해전에 이용됨에 따라 <충각(Ram)>이 설치되고 내구성을 위해 점차 선체가 보강되는 한편, 추진력 증가를 위해 노의 숫자 또한 증가되기 시작했다.
[3단 노선(Trireme)의 구조. 후미에 설치된 2장의 노로 방향 조절한다.]
막대한 재정을 통해 우수한 갤리선은 충분히 건조할 수 있었지만, 문제는 우수한 노잡이들을 어떻게 양성할 것인가에 있었다.
아테네의 3단 노선은 정원이 200명이었지만 장교를 포함한 전투인원은 20명 내외에 불과하였다. 따라서 2백척에 탑승할 전투병력을 확보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러나 아테네 함대에게 있어서 주력은 어디까지나 돌격에 의해 적선을 침몰시키는 충각 전법이었다. 전투 병력은 충각 돌격 이후 갑판위에 남아있는 적을 섬멸하거나 적들이 아군의 배를 탈취하지 못하도록 하는 역할에 이었다.
즉 노꾼들이 지휘관의 명령에 따라 얼마나 훌륭하게 작전을 수행하고 전술을 펼칠 수 있느냐가 승패의 관건이었다. 갑판위의 전투병력이 아무리 우수해도, 적들에게 배의 측면을 잡혀 먼저 격파당하면 끝장이었다.
1척당 150명의 노잡이를 계산해도 2백척이면 3만명......
그러나 아테네를 비롯한 그리스반도는 3면이 바다이고, 오래전부터 해양활동을 매우 활발히 한 지역이었다.
따라서 잠정적인 인적자원은 부족한 편이 아니었다. 테미스토클레스의 함대 건설안이 통과되자, 어촌출신의 시민들을 주측으로 대대적으로 노잡이들을 모집하였다. 특히 당시 노동 일당에 해당하는 1드라크마의 돈을 지급하였기 때문에, 변변한 벌이가 없는 일반 노무자와 농어민들이 대거 지원하게 되었다. 아테네의 앞 바다에는 건조된지 얼마 지나지 않은 함대들이 날마다 훈련을 위해 집결하였고. 아테네 근교의 농부에서 도시의 빈민에 이르기까지, 뱃사람 출신인 간부 선원들의 지휘 하에 노련한 뱃사공으로 거듭되어 갔다.
이렇게 그리스가 페르시아의 재침에 대한 준비를 하고 있는 동안 다리우스 1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Xerxes)역시 이집트의 반란을 제압하고 BC480년까지 모든전쟁준비를 완료하였다.
[현대에 복원된 3단 노선 올림피아스(Olympias)호.
전초전
그리고 마침내 480년 봄이 왔다. 30만에 이르는 페르시아군이 그리스 반도를 향해 침공해 오자, 폴리스 연합은 육지에서는 테르모필레를 바다로는 살리마스 해협을 최후의 저지선으로 삼았다. 그런데 테르모 펠레 전투에서 레오니다스(Leonidas)가 지휘하는 300명의 스파르타군이 3일간의 저항끝에 전멸당하자, 7000여명의 폴리스 연합군은 싸워 볼 생각도 않고 모두 후퇴하고 말았다.
이제 남은 것은 해군뿐이었다. 아테네의 해군은 스파르타의 유리비아데스(Euribiades)를 함대 사령관으로 총 330여척(이 중 아테네 함대가 180척, 스파르타 함대가 10척)으로 구성되어 바다에서 페르시아 함대를 맞았다. 그러나 페르시아 해군은 총 1207척으로 아테네가 주축이 된 폴리스 연합해군의 4배에 이른다.
해전 초반에 페르시아군은 폭풍으로인해 400여척이나 파손되고 함대의 도착이 늦어져, 폴리스 연합에 다소 유리하였다. 이에 그리스측의 함대사령관인 유리비아데스는 페르시아 함대를 기습 공격하였지만, 숫적인 열세를 극복하기에는 부족하였다. 3일째인 8월 30일 페르시아 함대와 그리스 함대간에 아르테미지움(Artemisium) 해전이 벌어졌지만, 좀처럼 승부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전투 도중 테르모필레 패전 소식이 그리스 함대에 전해지자, 그리스 함대는 퇴로가 차단될 것을 우려하여 살라미스로 퇴각하였다.
바다위의 대반격 살라미스 해전
그리스 해군의 철수는 아테네군의 요청에 따라 이루어졌다. 그것은 테미스토클레스의 전략에 따라 살라미스에서 제2방어선을 구축하기 위한 것이었다. 8월 초에 이미 아테네 시민에게 모두 철수 명령을 내렸고, 모든 함대를 살라미스로 집결하도록 명령하였다. 덕분에 페르시아군은 손쉽게 아테네를 점령하였고, 페르시아 함대도 BC480년 9월 4일 아테네의 외항에 도착할 수 있었다.
페르시아 함대는 아르테미지움 해전에서 상당한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피해를 복구하느라 약 3주간 전투를 전개하지 않았다. 이 동안에 그리스 함대에서도 응전 방법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만약 해전에서 패배했을 경우 살라미스 섬에서 철수하여 코린트 지방으로 쪽으로 후퇴한다는의견이 모아졌다.
그러나 테미스토클레스는 ‘살라미스에서 철수한다면 페르시아군의 진격을 쉽게 내줄 뿐만 아니라 아테네 시민과 영토를 포기하게 되며, 좁은 해역에서 우세한 적의 함대에 대응할 수 있는 이점을 포기하는 것’이라면 반대의사를 분명히 했다.
테미스토클레스가 워낙 완강하게 반대하자, 좀처럼 의견은 하나로 통일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테미스토클레스는 페르시아군을 좁은 살라미스 해전으로 유인할 수만 있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따라서 그는 페르시아 진영으로 ‘페르시아 함대가 공격하면 그리스 함대는 살라미스 섬에서 철수할 것’이라는 내용의 역정보를 흘렸다.
페르시아 함대는 이 역정보를 그대로 믿고 야간에 기동을 시작하여 새벽녘에 살라미스 협수로로 진입하였다. 이제 피할 곳은 없었다. 동서양 양대세력의 운명을 판가름할 기원전 480년 9월 28일의 새벽은 그렇게 밝아오고 있었다.
페르시아 함대는 선두에 페니키아와 키프로스 함대를, 중앙에는 이집트와 그리스 점령지 함대를, 그리고 왼쪽에는 이오니아와 갈리아의 함대를 배치하였는데, 총 750척에 이르렀다.
이에 대응한 폴리스 연합의 함대는 총 380척이었으나, 역시 절반도 안되는 숫적 열세였다. 따라서 조금이라도 전술상 오차라도 있게되면 곧바로 패배로 연결되고 말 것이다.
페르시아 함대의 전술은 대함대의 이점을 살리기 위해 그리스 함대를 유인하여 넓은 해역에서 싸우는 것이었다.하지만 페르시아 함대는 그리스 함선의 민첩한 움직임을 따라잡기 위해 너무 깊숙히 추격하고 말았다.
이때 대기하고 있던 아테네 함대가 페르시아 함대의 진로를 가로막았다.
결국 페르시아군 진영의 페니키아와 이오니아 함대가 그리스의 펠로폰네소스 함대가 충돌하고 말았으며, 충돌한 배는 암초역할을 하였다.
길이 7km, 너비 2km 인 살라미스 해협 사이에 곧 양측의 함대 700-800 척이 뒤엉키게 되었고, 숙련된 뱃사공들로 이루어진 그리스 해군은 뒤엉킨 틈 속에서도 훌륭하게 전술을 수행할 수 있었다.
결국 혼란에 빠진 페르시아 함대는 기동이 어렵게 되어 200척이 침몰되고, 4만명에 이르는 사망자가 발생하였다. 이에 반해 그리스 함대는 46척의 함선만을 잃어버리는 비교적 가벼운 피해를 보았다. 여전히 페르시아군은 총 6백척 이상의 함선을 보유하고 있어 334척의 폴리스 연합 함대보다는 두배정도의 숫적 우위를 가지고 있긴 하였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살라미스해전에서 보여준 그리스 군의 놀라운 전투력이었다. 이제는 설령 넓은 바다에서 해전을 한다고 해도 결코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다. 결국 페르시아의 잔여 함대는 다음날 헬레스폰트 해협 쪽으로 퇴각하고 말았다.
단 하루의 해전으로 20년에 이르는 페르시아 전쟁사에 전환점을 이루는 순간이었다.
이후 퇴각하는 페르시아군을 끝까지 추격하기엔 폴리스 연합의 부담도 컸기 때문에, 에게해의 주요 섬을 장악하고 페르시아의 해상원정을 차단하는데 주력하였다.
...살라마스해전, 이 해전은 폴리스연합과 페르시아가 벌인 20년간의 전쟁에 있어 가장 중요한 분수령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우연이나 기적에 의해서가 아니었다. 철저하게 준비된 그리고 계획된 전략에 의한 것이었다.
살라마스 해전은 적은 물론 아군의 전력에 대한 냉철한 분석이 얼마나 중요하며, 항상 유사시를 대비해 실전과 같은 훈련과 준비태세를 갖추는 일이 왜 중요한지를 분명하게 보여준 전투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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