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어전쟁 (Boer War) 1
전쟁과 전쟁의 사이
보어 전쟁은19세기말 영국이 남아프리카의 보어인이 세운 트란스발공화국을 합병시키기 위해 일으킨 전쟁으로 남아전쟁(南阿戰爭)이라고도 한다.
보어 전쟁은 시기적으로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영국군과 싸운 제1차 전쟁과, 독립쟁취 이후 20세기 들어 전투를 벌인 2차 전쟁으로 나뉜다.
1차 전쟁은 1877년 트란스발의 재정적 위기와 독일의 개입을 두려워한 영국이 트란스발을 합병한데 반발하여 1880년 보어인이 봉기하여 일으킨 전쟁이다. 이 전쟁에 대해서는 이후 세계의 전쟁사 코너에 다루기로 한다.
아무튼 보어인들은1881년 마주바힐에서 영국군에게 승리한 것에 힘입어 같은 해 4월 프리토리아협정으로 주권을 회복했다.
그런데1886년 트란스발에서 대규모 금광이 발견되자 영국의 케이프식민지총리 C.J. 로즈는 합병을 계획하고 친구인 제임슨에게 명령하여 1895년 트란스발을 침입하게 되었다.
전쟁과 전쟁 사이에 있었던 소규모의 전투였지만, 이 전투가 영국과 남아공에 끼친 영향은 매우 중대하였다.
2차 보어전쟁의 원인을 제공한 세실 로즈( 1853~1902 ) 사업가라는 직함이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무자비한 정복자이기도 하였다. |
1895년 영국의 "세실 로즈"는 2년 전 맥심 기관총을 앞세워 마테벨란드를 개척해 막대한 토지를 손에 넣었던 쾌거를 다시금 이룩하기 위해 친구 제임슨과 함께 과거 줄루족의 영역이었던 남아프리카로 이동하게 된다.
하지만 이 지역은 그들이 그동안 상대해온 흑인들이 아닌 백인이 장악한 지역이었다. 바로 은코메강 전투 등을 통해 줄루족과 교전한 경험이 있는 네덜란드계 이주민의 후예인 보어인들의 영역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줄루족과의 전투를 통해 승리한 후 지금의 남아프리카 공화국 지역에 '오란예 자유국'과 '트란스발 공화국'을 세우고 정착하고 있었다.
문제는 세실 로즈와 제임슨는 이미 충분한 부를 축적할 수 있는 자본과 기반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보어인들이 보유하고 있던 금광을 포기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더구나 보어인들의 거주 지역에는 막대한 양의 금광은 물론이고, 금보다 더 가치있는 다이아몬도 광산이 있다는 사실은 세실 로즈와 제임스의 눈을 멀게 하기에 충분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곧바로 500명의 병력과 6정의 맥심 기관총만을 가지고 트란스발 공화국의 수도 "요하네스 버그"를 향해 진군하기 시작했다.
미국이 낳은 발명의 귀재 하이람 스티븐스 맥심과 그가 개발한 걸작 "맥심( MAXIM )" 중기관총. 개틀링이나 노르덴펠트 등의 수동식 자동화기가 주력이던 당시 유럽 각국에 충격을 안겨준 무기로 20세기 초엽 숱한 유럽인들의 정복 전쟁과 활동에서 빠짐없이 등장하여 원주민들을 살육하였다.
하지만 세실 로즈 일행은 이 기관총의 위력을 지나치게 맹신하고 있었다.
네덜란드 이주민의 후예인 보어 병사들. 당시 오란예 자유국과 트란스발 공화국을 세우고 풍성한 금광과 다이아몬도 광산을 보유하고 있었다지만 이들은 사냥을 주로 하던 민병대에 불과 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제대로 된 군사훈련이나 전술훈련을 받은일이 없었으며 제대로 된 군복이나 장비역시 없었다.
오직 이들에겐 사냥을 통해 얻은 오랜 경험많이 전부였다. 그리고 이들은 그러한 자신들의 강점을 최대한 살렸다. 매복작전에 의한 저격은 노련한 사냥꾼들의 주특기 였고, 세실로즈 일행은 덧없이 희생자만 늘어났다.
더구나 특정 고지나 진지를 지키는 기존의 방식을 탈피하여 저격후엔 즉각 모습을 감추고 민첩하게 현장을 벗어나는 치고 빠지기식 전술은 단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것이었다.
아무튼 1895년 12월 29일까지 세실 로즈 일당은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요하네스 버그에서 불과 50km 떨어진 지점에 도달하는데 성공했지만, 이것은 세실로즈 일행을 목표지점까지 끌어들이기 위한 보어군의 유인작전이었던 것이다.
마치 좋은 먹이감을 놓고 큰 짐승을 덫으로 유인하는 사냥술과 같은 전략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철저하게 매복하고 있었던 보어군은 기습적으로 총격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그제서야 포위당한 사실을 안 세실 로즈 일행은 그들이 자랑하는 6정의 맥심 기관총을 난사하였지만 별다른 효과를 볼 수 없었다.
이미 보어군 줄루족과 수단군이 왜 많은 병력에도 불과하고 영국군에게 맥없이 전멸당하였는지 알고 있었다. 그들은 전통qkd식 그대로 자동화기 앞에 밀집형태를 유지하며 무리하게 진격하다가, 총알받이 신세가 되어 버렸던 것이다.
그에 비해 보어군은 사방에 산개하여 포위하였으며, 엄폐물을 충분히 활용하였을 뿐 아니라 탁월한 사격술을 이용해 정확한 저격을 퍼부었다. 이런 식으로 세실 로즈 일행이 하나 둘 쓰러져 가기 시작하였다.
거기에 유일한 중화기인 맥심 기관총는 치명적인 약점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당시 기관총은 과열을 방지하기 위해 물을 부어 가며 열을 식혀야 했지만, 가져온 물이 바닥이 나면서 급격하게 과열되기 시작하였다.
결국 맥심 기관총은 작동불량을 일으켰고 결국 이들은 보어군에 항복할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세실 로즈와 제임슨 일당은 결국 짧은 포로 생활 끝에 영국으로 추방당했다. 이것은 당시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불리우던 "대영제국"의 명예에 치욕적인 오점을 남긴 사건으로 기록되기에 충분하였다.
그리고 이 때 노획된 6정의 맥심 기관총은 모두 트란스발 공화국에 접수되어 수리를 거쳐 보어군에게 매우 유용한 장비가 되어 주었다.
전술적으로도 밀집 형태로 진격하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전술인지를 극명하게 보유주는 사건이었다.
보어전쟁 2
* 보어는 네델란드 어로 '농민'을 뜻한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현재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진출하여 트란스발과 오란예등을 세운 네델란드계 이주민을 뜻한다. 따라서 보어전쟁은 독립전쟁이라기 보다는 금광 채굴권을 두고 다투었던 백인들간의 전쟁이라고 보아야 한다.*
1895년 세실로즈 일행의 남아공 (당싱에는 트란스발 공화국) 원정은 실패로 끝났지만, 그 패배는 영국 정부를 자극하기에 충분하였다. 더구나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나오는 황금과 다이아몬드는 쉽사리 포기할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영국 정부는 19세기가 끝나가던 1899년 12월 이제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개칭된 트란스발 공화국을 침공하기에 이른다.
이로써 20세기 최초의 국제전이 시작된 것이다.
그런데 영국군이 앉고 있었던 가장 기본적인 문제는 세실 로즈 일행이 당하는 것을 보면서도 기존의 전술 체계를 유지했다는 점이다.
반면 영국의 침공에 대응해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오란예 자유국은 연합 보어군을 결성했지만 총병력은 35,000명에 불과했다.
따라서 그들이 채택할 수 있었던 전술은 세실로즈 일행에게 타격을 가했던 기습매복작전과 게릴라 전 밖에 없었다.
당시 영국군은 나폴레옹 전쟁 이래 은폐나 엄폐없이 밀집대형을 유지해 일제 사격으로 적을 제압하는 보수적인 전술체제를 유지하였다는 점이다. |
야포형 포가에 거치된 맥심 기관총은 전장에서 눈에 띄기가 쉬웠고 이는 탁월한 사격술을 자랑하는 보어인들에게 좋은 원거리 사격 표적이 될 수 밖에 없었다.거기에 보어인들은 영국의 침공이 임박하자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오란예 자유국은 1897년 연합 보어군을 결성했고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대통령 파울 크루거는 항전의 의지를 굳게 다졌다.
남아프리카 공화국군은 총 병력이 35,000명으로 영국군에 비해 열세였지만 병사 개개인이 사격술이 능했고 금광과 다이아몬드를 이용해 독일로부터 맥심 기관총과 파울 마우저의 소총들, 그리고 크룹사의 경야포 등을 소수 도입하여 무장하고 있었다.
1900년 6월 영국군은 트란스발에 침입, 점령하고 9월 트란스발공화국의 영국병합을 선언하였다. 오렌예자유국도 전쟁이 개시되자 트란스발 측에 가담하여 참전하였으나, 2월 영국군은 주력부대를 격파하고 5월에 오렌예자유국의 영국병합을 선언하였다.
이렇게 전쟁은 월등한 화력과 병력을 보유한 영국군의 압승으로 끝날것 처럼 보였다. 하지만 오렌병합을 선언한 이후부터 보어군의 길고도 공포스러운 게릴라 전은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보어군은 나폴레옹 전쟁 당시의 대형을 유지한 영국군을 맞아 매복 사격을 가한 후, 영국군이 추격을 시작할 무렵에는 재빨리 현장을 벗어나는 게릴라 전을 전개하였다.
특히 수십여명씩 조를 이루어 이동하는 보어군의 소부대를 뜻하는 "코만도 ━ Kommando"가 나중에 정예부대를 상징하는 단어가 될 정도였다 .
단위로 이동하면서 정확한 저격을 퍼부어 댔지만 그렇다고 이들이 명사수의 기량만 발휘하지는 않았다.
보어 전쟁은 세계 최초의 기관포인 "폼폼"이 실전 운용된 전쟁이기도 하다. 프랑스가 맥심을 37mm 호치키스 속사포의 탄환에 맞춰 구경을 넓힌 이 기관포는 영국과 독일에서 면허 생산되는 등의 성공을 거두었고, 독일은 이 기관포를 보어인들에게 판매했다.
영국군의 밀집대형에 대해 독일제 맥심 기관총을 이용해 막대한 피해를 입히는 것은 물론 세계 최초의 기관포인 "폼폼"을 이용해 영국군 1개 야전포대를 10분 만에 몰살시키는 전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하지만 워낙 덩치가 커 위치가 발각되면 영국군 포병의 사격에 의해 파괴되는 일도 적지 않았다.
아무튼 나폴레옹 전쟁의 상황에 익숙해졌던 영국군 지휘관들은 보다 못해 보어군의 거점이나 본거지를 향해 공세를 취했지만 이는 더욱 많은 인명피해를 요구했다. |
특히 보어군은 2년 동안 게릴라전을 전개하여 영국군을 괴롭혔으며, 오렌과 트렌스발 두 나라의 대부분을 다시 해방시키고, 영국령까지 진격하여 들어가기에 이르렀다.
그 동안 영국군의 복장이나 전술에도 큰 수술이 가해졌다. 나폴레옹 전쟁 시대야 지휘가 용이하도록 눈에 잘 띄는 붉은 코트를 착용했던 영국군은 이제 눈에 잘 띄지 않는 색상의 전투복을 찾기 시작했고, 맥심 기관총도 야포의 포가를 방불케하는 운반거에 거치해 운용하던 기존 방식 대신 삼각대를 이용하여 견고하게 엄폐된 진지에 거치해 사격하는 운용 방식을 적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전열을 재 정비한 영국군은 점차 전세를 반전시키기 시작해 마침내 1902년 4월 평화 협상이 시작되었고 5월 31일, 베레니깅 조약을 통해 보어전쟁은 영국의 승리로 끝났다.
하지만 영국은 , 인구 50만 명에 총동원 병력 약 7만 보어인을 정복하기 위하여, 45만 군인을 동원하여 보어인의 전답·가옥을 불사르고, 21만의 민간인들을 강제적으로 집단수용소에 집어 넣었다.이 강제수용소의 설비·대우는 최악의 상태로서 총 약 2만의 사망자를 내기까지 하였다. 이처럼 민족전멸의 위기에 봉착하자, 1902년 마침내 보어인은 영국에 굴복하고, 영국은 두 나라를 영국령 식민지로 함으로써 남아프리카를 완전히 정복하였다.
하지만 이 전쟁에서 영국군은 세계 여론의 공격을 받았고, 국제적으로도 ‘영광의 고립’ 정책을 버려야 하였다. 국내에서도 반전운동이 고조되어 자유당의 로이드조지는 이때에 제국주의 정책의 반대론자로 활동했으며, 노동당 결성이 촉진되었다. 또한 남아프리카에서도 보어인의 생활부흥을 위하여 300만 파운드의 보조금을 내주어야 하였고, 그들의 자치를 인정해야 했다.
이처럼 영국군은 보어 전쟁에서 이기고도 결과적으로는 진 이상한 전쟁이 되어 버렸다.
무기사 측면에서도 보어 전쟁은 전장에서 기관총의 역할이 서서히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한 전쟁이었다. 물론 각국이 대량의 기관총을 장비하기 시작한 시점은 1904년의 러·일 전쟁 이후지만 적어도 영국군만큼은 직접 그 위력을 몸으로 체험했으니 기관총을 대대적으로 장비해야 했다
독일제 맥심인 MG 08.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 기간 중 비록 프랑스의 경기관총인 쇼샤에 비해 많은 수는 아니지만 상당수의 맥심을 운용해 연합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그러나 보어 전쟁이 끝난 뒤 참전한 모든 여단장과 대대장급 지휘관들에게 벌인 설문조사에서 "기관총은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무기다!"라고 답한 장교가 10여명이나 나오는 등 영국군 내에서 기관총의 대량 장비에 대한 의견이 강한 편이 아니었고 결국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벌어진 솜므 전투에서 MG 08 기관총을 배치한 독일군을 향해 돌격하던 영국군은 이 보어 전쟁에서 당했던 피해를 고스란히 입어야 했다.
보어전쟁이 남긴 것
1900년 6월 영국군은 현재 남아공인 트란스발에 침입함으로써 보어전쟁이 발발하였다. 그리고 2년간의 치열한 전쟁끝에 1902년 마침내 보어인은 영국에 항복하고, 영국은 두 나라를 영국령 식민지로 함으로써 종결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영국의 희생도 매우 컸다. 영국은 이 전쟁을 통하여 세계 여론의 공격을 받았고, 국제적으로도 ‘영광의 고립’ 정책을 버려야 하였다. 국내에서도 반전운동이 고조되어 자유당의 로이드조지는 이때에 제국주의 정책의 반대론자로 활동했으며, 노동당 결성이 촉진되었다. 또한 남아프리카에서도 보어인의 생활부흥을 위하여 300만 파운드의 보조금을 내주어야 하였고, 그들의 자치를 인정해야 했다.
참조글:<두산 백과사전>
19세기말, 캐나다, 호주, 인도등 그야말로 5대양 6대주에 거쳐 식민지가 없는 곳이 없었던세계 초강대국이었던 영국.
영국은 보어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50만명이나 되는 대군을 동원하였지만 전쟁에서 이기지 못하였다. 영국군이 승리한 것은 순전히 네델란드계 이주민이었던 보어인들에 대해 무한 구속 작전을 계시하여 20만명 이상의 민간인들을 인질로 잡았기 때문이다.
전쟁의 명분도 없었으며 단지 남의 나라에서 발견된 금광이 탐이 나서 침략전쟁을 벌인 것은 영국의 도덕성에 상처를주었고, 대영제국의 쇠퇴를 알리는 전초적 사건이었다. 사실 돌이켜 보면 청나라에 일으킨 아편전쟁은 더한 수치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은 한마디로 아편과 마약을 팔아먹기 위한 전쟁이었으니까..하지만 영국은 그 전쟁에서 최소한 군사적인 승리는 거둘 수 있었다.
전쟁의 시작은 영국의 세실 로즈 일파가 영국인 중에서 범법집단을 군사적으로 조직하여 트란스발 공화국을 침공해, 정부를 타도하고 금광의 지배를 꾀한 제국주의적 음모사건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이 시도는 3일만에 보어 정부에 의해 진압됨으로써 '사악하고 탐욕스러운 영국 제국주의'라는 오명을 전 세계에 퍼뜨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1899년 10월 보어전쟁의 개전과 함께 영국은 불러 대장의 지휘 하에 3개 사단 8만명의 병력을 남아프리카에 파견하였는데 이는 워털루 전투에서 웰링턴 장군이 지휘한 영국군의 두배 이상 되는 병력이었다.
20세기 들어 첫 전쟁인 보어전쟁은 공교롭게도 미국이 사상 처음 패한 베트남 전쟁과 같은 게릴라전이었는데, 보어군의 기습적인 반격과 매복공격에 의한 영국군의 패배는 영국을 충격으로 몰아 넣다.
영국 육군 최고의 명장이었던 불러는 경질되었고, 수 많은 제국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70세의 로버츠 원수가 지휘를 맡게 되었다.
그러나 실제의 지휘는 49세의 참모장인 키치너가 장악하게 되었는데, 그는 거대한 조직에 의한 총동원 체제를 지휘하였다.
키츠너는 조직화된 병력의 집중 배치와 계통적인 보급체계를 중시하여 압도적인 화력으로 정면돌파를 실시하는 세계대전형 군인이었는데, 훗날 1차대전에서는 징병제를 도입해 거대육군을 창설하고 총력전의 선두에 서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전략은 1차대전의 솜 전투나 파센텔의 대량전사라는 결과로 연결되고, 영국군의 궤멸적인 손실을 초래하게 된 전략의 시작이기도 하다. 영국군은 보어군에 대한 민중의 지원을 차단하기 위해 농촌의 부녀자들을 일정한 공간에 한사람씩 수용하는 콘센트레이션 캠프(concentration camp)에 강제 수용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영국 엘리트 중 양식 있는 사람들의 커다란 환멸과 반발을 일으켜 '제국의 이상'에 대해 깊은 회의를갖게 하였으며, 역사학자 골드윈 스미스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이 전쟁은 체임벌린과 세실 로즈 말고는 그 누구에게도 불필요한 전쟁입니다. 이 전쟁으로 인해 영국은 전 세계로부터 거대한 증오를 사고 있습니다. 저는 영국이 백년전쟁에서 잔 다르크를 불 태워 죽인 이래 이만큼 도덕적으로 잘못된 일을 저지른 적인 없다고 확신합니다.
당시 보어인들을 강제로 수용하였던 집단 천막시설
보어 전쟁은 영국군 5만명의 사상자와 보어군의 4천명의 전사자를 내었으며, 강제 수용소에서 2만명의 부녀자가 희생되었고, 2억 3천만 파운드(1900년 국민 총소득은 17억 5천만 파운드)의 전비를 들인 끝에 3년만에 끝이 났다. 전쟁이 결과로 보아도 명백한 영국군의 군사적 패배임이 분명하였다. 영국은 결국 이 군사적 패배를 민간인들에 대한 대량 강제 수용으로 만해 하였고, 이것은 홀로코스트의 전초가 되었다.
역사가 테일러는 보어 전쟁의 결과 보어인의 독립이 무산된 것 이상으로 영국인의 '제국에의 신념'에 대한 정신적인 권위가 실추된 것이 더 큰 의미를 가진다고 하였다.제국주의에 대한 환멸은 제국 지배에 대한 정당성이나 도덕적 확신을 흔들리게 하였고, 국민의 정신적 활력의 쇠퇴를 가져와 제국의 종말을 앞당기게 되었다는 것이다.
19세기 영국의 전성기인 빅토리아 여왕의 '빅토리아 시대'(Victorian Age)에 이은 20세기 영국의 쇠퇴기인 에드워드7세의 '에드워드 시대'(Edwardian Age)는 너무나 확연한 차이를 드러냈다.
중후하고 성실하며 확신에 찬 빅토리아 시대와는 대조적으로 무책임하고 허무주의적이며 향락적인 에드워드 시대는'마음의 상처'와 '자기 확신의 상실'을 초래한 보어전쟁을 기점으로 갈린 것이다.
'전쟁..... > 전쟁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1차 세계대전 사상 최악의 혈전 솜전투 (0) | 2013.09.26 |
---|---|
전설적인 승리 살라미스(Salamis) 해전 (0) | 2013.09.26 |
미 구축함과 일 전함의 처절한 육박전 (0) | 2013.09.26 |
5천대 전차부대의 격돌 카데쉬 전투 (0) | 2013.09.26 |
해상의 대학살 - 1943 비스마르크 해전 (0) | 2013.09.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