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당지쟁(朋黨之爭)은 중국역사이래 계속 얘기되던 이슈이다. 동시에 세계역사상으로도 자주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청나라말기에 중국과 일본은 마찬가지로 붕당지쟁이 있었지만, 전혀 다른 결과를 나타냈다. 이것은 중국과 일본 양국이 하나는 흥성하고 하나는 쇠망하는 표시이며, 최종적으로 청일전쟁의 승패를 결정지었다.
고대중국에서 붕당지쟁의 가장 큰 문제점은 ‘노(奴)’를 중시하지 ‘재(才)’를 중시하지 않는 것이다. 부패가 극에 달한 청나라말기는 이것이 더욱 두드러졌다. 북양수군의 전멸이라는 결과는 당쟁과 관련이 있다.
청말에 가장 두드러진 붕당지쟁은 상회당쟁(湘淮黨爭)이다. 이홍장과 좌종당이 각각 우두머리인 상회양당은 외적이 위협을 가하는데도 불구하고, 내부투쟁에만 신경을 쏟았다. 그리하여 정여창, 섭지초와 같은 무능한 자들이 중요요직을 맡고 결국 본인도 망치고 나라도 망치게 되었다.
상회당쟁은 좌종당과 이홍장은 유한한 재능을 다 쏟게 만들었을 뿐아니라, 동시에 그들의 인재선발에서도 서로 기싸움을 벌이게 만든다. 우리 편이 아니면 아무리 재주가 뛰어나더라도 절대 기용하지 않는다.
세상에 백락이 있은 후에 천리마가 있는 것이다. 천리마는 항상 있지만, 백락은 항상있는 것이 아니다. 세상이 야생마는 무수히 많다. 그러나, 부적합한 인물을 부적합한 지위에 앉게 하면 이는 부하의 잘못이 아니다. 상사의 잘못이다.
청일전쟁에서, 이홍장이 중용한 2명의 장수는 해군총사령관 정여창과 육군총사령관 섭지초이다. 이들은 모두 무능한 자들이다. 정여창은 수군제독이라는 지위에 있었지만, 오로지 한 가지만을 신경썼다. 이홍장의 뜻에 따라 처리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북양수군은 ‘이가군’이 되어 버린다. 이 정여창은 이를 확실하게 해냈다. 그러나, 해전을 벌이는 능력은 형편이 없었다.
정여창은 이홍장이 중용한 장군이지만, 경천위지의 인재도 아니고, 세상을 흐름을 아는 신세대의 장수도 아니다. 그저 구식 봉건관리일 뿐이다. 그는 일찍이 태평군에 참가하고, 태평군의 대세가 기울었을 때, 상군에 투항한다. 그후에 회군으로 소속이 옮겨진다. 그리고 태평군과 전투를 하고, 관직이 제독에 오른다. 1879년(광서5년), 이홍장에 의하여 북양수군으로 옮겨진다.
해군출신도 아니어서, 정규해상훈련을 해본 적이 없다. 그저 ‘이홍장의 사람’이기 때문에, 회계(淮係)의 정여창은 육군에서 해군으로 전직한 후 해군을 이끌게 되는 것이다. 정여창은 이홍장의 말이라면 그대로 따랐다. 그 정도가 심하여 자신의 주견이 없다고 할 정도였다. 해군총사령관으로서의 자신감은 전혀 보이지 않았고, 마치 이홍장의 집안노복과 같았다. 해군총사령관이 전투에서의 공로를 추구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 인신을 의존하여 승진을 하고자 했다. 북양해군은 정여창의 지휘하에, 사실 ‘이씨집안부대’로 전락하고 만다.
이홍장에게 북양해군으로 옮겨지기 전 20여년동안, 정여창은 장강수군에 소속된 경력은 있지만, 신식해군훈련은 전혀 알지 못했다. 기본적으로 문외한이고, 수전경험은 전무했다. 하물며 해전은 말할 것도 없다.
북양해군으로 옮겨진 후, 청일전쟁이 발발할 때까지, 청나라 해군의 전선최고지휘관으로서 정여창은 어떤 일을 하였는가?
가노철학(家奴哲學)하의 북양수군의 주요목적은 대내자중이지 대외방어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정여창은 평소에 훈련하면서, 완전히 상사들이 좋아할 일만 했다. 실전을 하는 것이 아니라 형식과 모양에만 치중했다. 훈련장에서는 보기 좋을 수 있지만, 실전에서는 쓸 수가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북양수군의 사격훈련을 보면, 군함이 사격할 때, 목표물은 움직이지 않는다. 그 결과 군함에서는 거리를 계산한 후, 이 부표를 향해 포를 쏜다. 당연히 백발백중이다. 그러나 전쟁터에서 이렇게 쏠 수 있는가? 그리고 진형문제도 전쟁터에서는 천변만화해야 한다. 평소에도 오늘 훈련하는 것은 어떤 진형이다라고 하면 모두 사전에 알고 준비하게 된다. 그러나, 전쟁터에서는 깃발로 신호를 보내면 그것이 명령이고 바로 진형을 바꾸어야 한다. 어떤 진형으로 바꿀지는 전쟁의 상황변화에 따라 결정해야 한다. 평소에 전혀 그런 방식으로 훈련하지 않았다. 그래서 정여창의 해군은 실전성이 결핍되어 있었다.
문외한인 정여창이 북양수군을 지휘하니, 오히려 문외한이 전문가를 지휘하는 격이었다. 등세창등 젊은 장교들은 ‘영국에도 해전을 모르는 총사령관이 있을까?”라고 탄식하는 것이다.
이런 해군사령관이 있으면 해군을 망칠 뿐아니라, 자신도 망치게 된다. 결국 자신이 잘하지도 못하는 일을 하다가 목숨을 잃는 것이다.
무능과 기개는 별개이다. 비록 정여창은 청일전쟁의 마지막에 자살을 하였지만, 그의 ‘무능’을 덮어버릴 수는 없다. 해군은 위기를 구할 총사령관이 필요한 것이지, 한번 죽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무능한 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정여창을 선택한 것이 해전의 패배를 가져왔다면, 섭지초를 선택한 것은 조선과 동북지방을 모두 빼앗기는 결과를 가져온다.
청일전쟁이 발발하기 전에, 이홍장은 육군총사령관을 놓고 고민에 빠지낟. 그때 육군장군들 중에서 전투에 능한 노장들이 있었지만, 이홍장은 최종적으로 섭지초를 선택한다.
‘말솜씨’로 승리를 얻고, 거짓말과 주인에 대한 절대복종이 섭지초의 가장 큰 재주였다. 섭지초는 관료로서 전형적인 인물이다. 담량이 작고, 돈을 목숨처럼 아끼며, 명망은 전혀 없다. 그러나 그는 ‘회계(淮係)’출신이다. 그래서 이홍장의 적계이다. 그러다보니, ‘작은 인물’이 ‘큰 직위’를 맡게 된 것이다.
섭지초가 육군총사령관이라는 자리에 앉았다. 무능한 자가 직급이 수직상승하더라도, 재능이 수직상승하지는 않는다. 섭지초가 데리고 다니는 부하들도 모조리 관료기질이 몸에 밴 인물들이다. 아편을 흡입하고, 전쟁시에도 매일 술자리를 열고, 부하들을 돌보지 않고, 다가오는 대적을 신경쓰지도 않았다. 그들은 “배가 다리에 도착하면 자연히 곧게 선다(船到橋頭自然直)”
평양전투전에 섭지초의 소첩은 섭지초에서 서신을 하나 보낸다. 그에게 집안의 처첩을 생각하라고 얘기한 것이다. 원래 인걸이 아니었던 그는 평양전투의 중요한 순간에 성을 버리고 도망친다.
정여창, 섭지초는 실로 무능하기 그지없는 자들이다. 이 점에서 이홍장의 사위인 장패륜은 일찌감치 이홍장에게 일깨워준 바 있다. 그러나, 이홍장은 이리저리 생각하다가 결국은 그들을 기용한다. 바로 그들이 ‘회계’로 자신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정여창 본인은 해군의 일을 물랐다. 그의 부하들은 대부분 좌종당, 심보정이 세운 마미선정학당의 졸업생들이었다. 일부 정여창의 말을 잘 듣는 해군장교들은 그저 줄서기를 할 줄 아는 자들이지 전투를 할 줄 아는 자들이 아니었다. 일본의 해군과 상대될 리가 없다.
당쟁, 내분, 견제, 부패로 큰 돈을 주고 사온 전투함을 이들 해군장수들에게 맡기다니…탄식이 나오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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