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중국 이야기

장정(長征)중의 사도적수(四渡赤水)

구름위 2013. 8. 23.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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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자: 삼지야(三支野)

 

전사쌍각주천하(戰士雙脚走天下)        전사의 두 다리는 천하를 다니고

사도적수출기병(四渡赤水出奇兵)        네번 적수하를 넘으면서 기이한 병법을 썼으니

모주석용병진여신(毛主席用兵眞如神)  모주석의 용병술은 정말 신과 같구나

 

1960년대 대강남북에 울려퍼진 노래가 있었으니, 바로 <<장정조가(長征組歌)>>이다. 그 중에 마국광이 부른 <<입운남(入雲南)>>에 나오는 위 구절은 노래가 힘이 있어 한번 들으면 잊혀지지 않는다. 그리고, 이 노래는 네번 적수하를 건넌 모주석의 신출귀몰한 용병술에 또 하나의 광환(光環, 오로라)를 더해주고 있다. 이 이야기는 드라마로도 만들어져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필자가 구해본 원시자료에 따르면, 당시의 모택동은 "사도적수"의 지휘자가 아닐 뿐아니라, 제안자도 아니었다. 오히려 일관되게 반대한 사람이었다. 모택동이 "사도적수"를 강렬하게 반대한 이유는 "사도적수"가 바로 군사맹목주의의 잔재였기 때문이다.

 

모두 알다시피, 준의회의(遵義會議)에서 모택동, 장문천, 왕가상등의 모의 아래, 중공중앙의 최고지도층이 개편되었고, 원래의 홍군지휘기구인 "삼인단"이 철폐되었다. 완고하게 자신을 변호하던 박고, 이덕은 찬밥신세가 되었다. 장문천은 소련과의 관계로 인하여 중공의 새로운 총책임자가 되었다. 그리고, 원래의 3인단의 구성원의 하나였던 주은래는 당내에서 군사적인 문제에 대한 최고의사결정을 위탁받은 사람이었다.

 

모택동은 그저 정치국에서 자리를 하나 다시 얻었을 뿐이다. 문혁기간중에, 임표가 소련으로 도망하다 몽고에서 비행기추락으로 사망한 후, 주은래는 기분이 좋아져서 약간 말을 편하게 한 적이 있다. 한 회의석상에서 장정 때 발생한 한 에피소드를 얘기한 바 있다. 바로 "이도적수(二渡赤水, 두번째 적수하를 건넌 일)"가 있은 후 다수의 홍군지휘관들은 금사현성(金沙縣城)이라는 보루를 공격하는데 동의하였다. 모택동만이 반대하였다. 장문천은 회의때 이 일을 표결에 부쳤는데, 결과적으로 모택동이 소수의견이었다. 화가난 모택동은 "나 안하겠다"고 일어섰다. 이 때 모두가 보인 반응은 "하지말려면 하지말라"는 것이었다. 그 말뜻은 모택동 한 사람이 반대한다고 하여, 여러 사람의 의견을 뒤집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모택동은 고집이 셌다. 주은래가 나중에 이렇게 말했다. "한밤중에, 주석이 등을 들고 나 있는 곳을 찾아오셨다. 그리고 나보고 다시 한번 생객해보라고 했다. 금사현성을 공격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하였다. 나도 주석의 의견에 동의하였고, 다음 날 아침 일찍 내가 여러 사람을 설득시켜서 그 계획을 포기하게 하였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압계회의(鴨溪會議)이다. 이후 홍군은 삼도적수를 거쳐 "계명삼성(鷄鳴三省, 닭우는 소리가 세 개의 성에 들린다)"이라는 마을(현재의 운남성 찰서현 경내)에 도착했다. 주은래의 제안으로 새로 만들어진 "삼인군사영도소조"는 군사행동을 과단성있게 처리하기 편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거수로 표결하는 형식으로 군사문제를 결정한다는 것도 웃기는 일이었다). 모택동은 이 "삼인군사영도소조"의 말석을 차지했다.(다른 두 사람은 주은래와 왕가상이다).

 

이상의 이야기는 많이 들었을 것이다. 당시의 모택동은 나중의 영명한 혁명원수 모택동이 아니다. 자그마한 의견마저도 다른 사람들의 동의를 받은 후에야 집행할 수 있었다. 삼국시대의 대권을 장악한 제갈량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그런데 어찌 자기 마음대로 홍군을 지휘하여 "사도적수출기병"의 일을 만들어 낼 수 있었겠는가? 소문에 의하면, 주은래는 장정조가의 "전사쌍각주천하...."의 구절을 듣기를 아주 좋아했고, 작은 목소리로 흥얼거리며 따라했다고 한다. 만일 우리가 '사도적수출기병'을 굳이 얘기해야 한다면, 그것은 반드시 '주총리용병진여신'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사도적수'의 모든 군사행동은 주은래가 지휘한 것이기 때문이다.

 

장정이 시작되었을 때 중앙홍군은 미리 정한 목표가 있었다. 즉, 상서로 가서 하룡, 임필시의 홍이군(紅二軍)과 회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은 국민당의 모사들에게 발각되어 상강에서 전투를 벌였으며, 홍군은 국민당이 미리 설치한 함정에 빠졌고, 8만6천여명의 홍군은 겨우 2만명이 남을 정도로 참패했다. 상서로는 갈 수 없게 되자, 급히 통도회의(通道會議)를 개최하여 국민당의 통치가 박약했던 귀주로 방향을 돌렸다. 귀주의 여평(黎平)에 도착한 후, 급히 회의를 개최하여 검북(귀주성 북부)으로 향했고, "준의를 중심으로 하는 소비에트신지구"를 건립했다. 그런데, 준의에 도착하여 보니, 땅은 척박하고, 백성은 가난하고, 인구도 희소했다. 더구나 국민당의 40만 중앙군, 지방군이 이미 사면에서 포위망을 좁혀오고 있었다. 도저히 홍군이 자리잡을 곳이 되지 못했다. 긴장된 "준의회의"에서는 다시 홍군을 이동시키기로 결정하고, 사천의 서북부로 가서 장국도(張國濤)의 홍사군(紅四軍)과 회합하여 힘을 키워 국민당으로부터의 강대한 군사적 압력을 견디기로 결정한다.

 

그렇다면, 어느 길로 가야 사천서북부로 갈 수 있겠는가? 궁현(弓玄)으로 가는 것이 직선거리로 가장 가까웠다. 준의에서 적수현성으로 가고, 그 후에 적수하(赤水河)를 건너 사천의 중심부를 통과하여 직선으로 사천서북부에 도달하는 길이다. 준의회의는 바로 이 노선을 확정했다. 그러나, 사실상 이 길로 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부대가 적수현성에서 10킬로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토평진(土坪鎭)에 이르렀을 때, 국민당 천군(川軍, 사천군)의 완강한 저지를 받는다. 토평에서의 전투는 아주 치열하였고, 홍일군의 주력단인 일단(一團)의 단장인 양신이 전사하였다. 이 전투는, 중국공산당이 나중에 설명한 것에 의하면, 천군의 곽훈기의 여단이 증원되어 온 것이었고, 홍군은 적극적으로 전장에서 벗어났다는 것이다. 승패는 따지지 않기로 하고, 어쨌던 적수현성에서 적수하를 건너는 것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래서 다시 길을 바꾸어 남쪽의 이랑탄(二郞灘)을 통하여 적수하를 건너게 된다. 홍군이 도하한 후, 국민당의 천군이 벌떼처럼 몰려들었다. 사천군벌 유상(劉湘), 등석후(鄧錫候)등은 첫째는 홍군이 사천으로 와서 사천을 적화시키는 것을 두려워했고, 더욱 두려운 것은 홍군을 추격하는 장개석의 중앙군이 기회를 틈타 사천에 진입하여 그들의 기반을 빼앗는 것이었다. 이미 귀주군벌인 왕가열은 사실상 중앙군이 귀주로 진입한 후 실권을 빼앗긴 허수아비가 되어 버렸던 것이다. 그래서 죽어라고 중앙홍군으로 하여금 사천경내에 진입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적수하를 건넌 홍군은 좌충우돌하였으나, 적군이 너무 강하여, 돌파할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후퇴하여 다시 적수하를 건넜다. 그리하여 다시 천험의 요새인 누산관을 다시 치고, 준의성을 두번째로 공격했다. 두번째 준의공격시, 홍삼군의 참모장인 등평이 총탄에 맞아 사망했다. 그는 장정때 희생된 최고위층의 홍군지휘관이다.

 

일도적수와 이도적수는 군사상의 맹목주의의 결과이다. 그렇다면, 삼도적수는 또 무슨 기묘한 성동격서의 전술이었단 말인가? 여전히 아니다. "준의회의"는 이미 사천서북부로 가서 홍사군과 회합하는 것으로 결정하였으므로 당연히 집행해야 했다. 그러나, 어디서 강을 건넌단 말인가? 적수현성에서 강을 건너려면 너무 드러나게 도고 저지하는 힘이 너무 클 것이며, 대가도 클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회할 수밖에 없었다. 더 남쪽에 있는 인회성(仁懷城)에서 도하했다. 이것은 중공 "압계회의"의 결과이다. 도하시의 측익안전을 보호하기 위하여, '금사현성'을 공격할 것인지 말 것인지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던 것이다. 모택동은 '금사현성'의 공격을 반대했다. 왜냐하면 그는 기본적으로 삼도적수에 반대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때의 모주석은 군사상의 의사결정권이 없었다. 그저 주은래를 설득할 수밖에 없었다. 금사현성전투는 모택동의 간섭으로 이루어지지 못한다. 그러나, 국민당 중앙군과 진군(운남군)은 이미 귀주서부에서 인회를 핍박해 들어오기 시작했다. 홍군은 측면안전을 보장하기 위하여, 인회의 노반장에서 국민당 중앙군의 주혼원(周渾元) 종대와 악전고투를 벌였다. 이 전투는 토평전투에 비하여 참혹하기가 못지 않았다. 30년후에, 인회성 지방정부는 이 장소에서 홍군열사의 유체를 발굴했는데, 확인가능한 시신이 400여구였다. 삼도적수에서 홍군은 비싼 댓가를 치루었던 것이다.

 

삼도적수후, 홍군은 여전히 사천을 들어가지 못했다. 그래서 다시 남으로 우회하여 운남의 찰서현으로 갔다. "계명삼성"의 이 곳에서 바로 "삼인군사영도소조"가 조직되며, 이 때에 이르러 비로소 모주석은 군사적 의사결정에 참여할 권한을 갖는다. 그러나, 홍군이 우회할 지방은 너무 적었고, 저지하는 군대는 너무 강했다. 이후 홍군은 할 수 없이 다시 적수하를 건넌다. 하나의 재미있는 현상은 제1, 제3차 도하는 부교를 만들어서 도하하고, 제2, 제4의 도하는 배를 이용하여 도하한다. 배를 사용한 것을 보면 도하가 매우 황급히 결정되었고, 준비가 충분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되돌아올 때는 급히 도망쳐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행히 겨울의 적수하는 강폭이 좁고 물이 얕아 건너기 어렵지는 않았다. 홍군의 사도적수후에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대군을 데리고 남하한다. 홍군은 더욱 큰 우회로를 택한 것이다. 사천의 중심부를 피해서 사천서북부로 간다. 이번에는 바로 모택동주석이 선택한 노선이다. 그러나, 돌아가는 길이 너무 멀었다. 먼저 모택동의 학생이라고 불리던 임표의 반대에 부딛쳤다. 홍군이 금사강을 건너고 회리(會理)에 도착한 후, 임표는 서신을 당중앙에 썼다. 대체적인 뜻은 모택동의 지휘를 할 줄 모른다. 궁현(弓玄)으로 가지 않고 궁배(弓背)로 가는 길을 택하였다. 가는 길이 너무 멀게 되었다. 얼마안가 부대가 다 무너지게 될 것이다. 모택동에게 군사권을 내놓고, 홍군의 지휘권을 팽덕회에게 넘기라고 요구하였다. 자신은 절대로 팽덕회의 지휘에 복종하겠다고 하였다. 이 서신은 모택동에게 한을 남겼다. 당시에도 그는 임표를 욕하여 "너같은 어린 애가 뭘 안다고 떠드느냐. 필요한 길이라면 그래도 가야 한다" 모주석은 이 때의 일을 잊지 않았다. 임표가 도망친 후 이것은 임표가 일관되게 모주석을 반대했었다는 근거중의 하나로 이용되었다.

 

평상심으로 얘기하면, 당시의 상황하에서, 모택동의 결정은 올바른 것이었다. 만일 진짜 준의회의의 결정대로, 혹은 임표의 생각대로, 직선노선을 택하여, 사천중심부를 지나 사천서북부로 갔다면, 홍군은 장강을 건널 때 또는 다른 곳에서 강대한 국민당 군대에게 상강전투에서와 마찬가지로 먹혀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임표의 말도 그대로 실증되었다. 홍군은 설산을 오르고, 초지를 지나서, 섬북에 도착했을 때 중앙홍군은 겨우 7천명 남았다. 홍군이 전멸하지 않은 것은 그저 기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사도적수는 무슨 기이한 병법은 아니다. 노원수들의 회고록을 살펴보아도 이것을 알 수 있다. <<팽덕회자술>>에서 사도적수는 언급조차 되어 있지 않다. 그저 누산관에서의 일전을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섭영진회고록에서는 얘기는 하고 있다. 섭영진은 홍1단의 정치위원이고 준의회의의 참가자이다. 중앙홍군의 최고지휘관중의 하나이다. 기괴한 것은, 그는 당시 사도적수가 무슨 기이한 병법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중에도 그렇게 느끼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도적수를 기이한 병법이라고 얘기하기 시작한 것은 장정에 참가조차 하지 않은 진의가 사도적수는 모주석의 군사지휘사상 가장 뛰어난 것이라고말하면서 부터이다.

 

결론은 이렇다. "사도적수출기병, 모주석용병진여신"  이것은 그저 문예작품에서 만들어진 모주석의 신성한 이미지에 의한 허구이다. 그것은 역사적인 근거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