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중국 이야기

북양군벌 최후의 마지노선: 죽어도 민족반역자는 되지 않는다.

구름위 2013. 8. 23. 17:42
728x90

1930년대, 일본인들이 중국을 침입했다. 그들은 아마도 중국의 '이이제이(以夷制夷)'전술을 배워서인지, 중국에서도 '이화제화(以華制華)'의 전술을 사용하려고 했다.

 

북양군벌의 우두머리들은 일본인들이 회유하려는 첫번째 대상이 되었다. 그런데, 일본인들의 예상과는 달리, 이들 무식한 중국군인들은 전혀 그들에게 회유되지 않았던 것이다.

 

서세창(徐世昌): 서세창의 이름은 아마도 그다지 낯설지 않을 것이다. 그는 몇년간 중화민국의 총통도 지낸 바 있다. 칠칠사변후에, 민족반역자 왕극민(王克敏)은 사제간의 인연으로 그를 찾아와서 만나고, 서세창을 끌어들이려고 한 적이 있다. 서세창은 문을 걸어잠그고 왕극민을 만나지 않았다. "나는 그런 제자를 둔 적이 없다". 그래서 그 다음에는 조여림(曹汝霖)을 내세워 그를 설득하려고 했다. 서세창이 만일 나서서 친일정권의 지도자가 되어주기만 하고, 일본과 친선조약을 맺어주면, 일본은 즉시 철군할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서세창은 자신이 나이가 많다는 것을 들어 완곡히 거절했다. 조여림이 떠난 후 서세창은 아랫 사람들에게 "다음에 조여림이 다시 찾아오면, 집에 없다고 말해라"고 하였다.

 

1938년에는 일본군의 사단장 반원과 특무기관장인 토비원이 서세창을 만나기를 원하였다. 서세창은 병을 이유로 만나지 않았다. 일본측은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다시 서세창의 두 제자를 보내어 설득하게 하였다. 그 중 김(金)씨성을 가진 제자는 스승을 설득할 이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서세창은 역시 나이가 많고 병이 있다는 이유로 고사하였다. 그리고는 화가나서 소리쳤다. "자네는 너무 어리석구나." 그러자 제자 김씨도 뒤지지 않고 이렇게 대꾸했다. '스승께서 어리석은 겁니다'. 서세창은 김의 말이 불손하자, 눈물을 흘리면서 상심하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가 이 나이가 되어서 이런 꼴을 당할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구나" 그리고는 바로 소매를 떨치고 일어나 위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단기서(段祺瑞): 단기서는 삼일팔참안을 일으켜, 노신으로부터 통박을 당한 바 있다. 구일팔사변후 일본군츤 그와 합작할 수 있기를 원했다. 일본인들은 이 중국의 예전 최고지도자급의 인물을 끌어들여서 화북에 친일정권을 세우고자 하였다. 당시 장개석은 이 영향력있는 전국가지도자가 일본군에 협력할 것을 우려해서 친필로 서신을 써서 남쪽으로 내려오시도록 요청했다. 69세인 단기서는 남경포구에 도착하였을 때, 남경의 소장이상의 군인들이 모두 집단으로 강을 건너와 영접하였을 뿐아니라, 장개석 본인도 친히 항구까지 나와 영접하였다. 그리고는 국빈급의 대우를 받았다.

 

단기서는 당시 기자들에게 "국난을 당하여 모두 노력하여야 하는 시기에 정부에서는 이미 전체적인 방침과 방법을 정했으니, 조야를 불문하고, 모두 함게 이를 지원해야 할 것이다. 본인은 비록 늙었으나, 역시 중국인으로서 그 뒤를 따를 것이다" 나중에 그는 남경에서 다시 상해로 이주한다. 기자가 방문하였을 때 그는 여전히 분명히 답하였다. "일본의 횡포는 이미 감정적으로나 이성적으로 참을 수 있는 정도를 넘어섰다. 우리나라는 상하가 일심동체가 되어 자구노력을 하여야 할 것이다. 옛 말씀에 '다른 사람에게 구하는 것은 자신에게 구하는 것만 못하다'는 말이 있다. 전국이 적극적으로 전투를 준비하고, 힘을 합해서 대응한다면 비록 10개의 일본이라고 하더라도 무서울 것이 뭐가 있겠는가?"

 

조곤(曹琨): 조곤은 역사상의 명성은 아주 나쁘다. 총통이 되려는 마음으로 돈까지 써서 선거자들을 매수한 바 있었다. 그래서 "뇌물총통"이라는 악명을 얻었다. 1937년 노구교사건이후, 화북이 함락되었다. 조곤의 옛부하들은 계속 친일의 대열에 끼어들었고, 친일정권에서 요직을 맡았다. 일본군은 갖가지 방법으로 조곤을 유인해내려고 하였다. 나이많은 조곤은 유부인의 권고에 따라, '식은 죽을 먹을지언정, 일본인을 위해서 일하지는 않겠다'고 맹서를 한다. 일본인들은 당시 이미 '화북치안군'의 총사령관이 된 제원섭으로 하여금 조곤을 방문하게 하였으나, 조곤 부부는 그를 문밖에 세워두고 들이지 않았다. 이어서 하북성 성장인 고능위가 다시 일본의 지시를 받아 조곤을 방문했다. 조곤이 만나서 얘기를 듣자마자 얼굴색이 변하면서 소리쳤다: "너 바로 꺼져라. 앞으로 다시는 우리 조씨집안의 문턱을 밟지 말아라" 놀란 고능위는 온몸에 식은 땀을 흘리며 몇 사람의 시종의 도움을 받아 황급히 도망쳤다고 한다.

 

장작림(張作霖): 일본인들이 꼭 회유하고 싶었던 사람중에 동북왕 장작림이 일찌기 포함되어 있었다. 장작림과 관련하여 하나의 에피소드가 전해진다. 이 토비출신의 장작림이 한번은 일본인들과 술자리를 한 적이 있었는데, 술이 세 잔이 돌자 한 일본에서 온 명사가 장작림에게 여러 사람을 위해 글을 하나 써달라고 하였다. 그는 아마도 장작림이 녹림출신이어서 글자를 잘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장작림이 난감해 할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장작림은 붓을 들어서 "호(虎)"자를 썼다. 사람들이 모두 좋을 글씨라고 말들을 했다. 장작림이 글씨옆에 제관(題款)을 쓰는데, "장작림수흑(張作霖手黑)"이라고 쓰고는 붓을 내려놓고 자리에 돌아왔다. 그 일본명사는 장작림이 "수묵(手墨)"이라고 적어야 할 것을 잘못쓰는 것을 보고는 비웃는 웃음소리를 내었다. 그러자, 장작림의 시종도 장작림에게 "장군께서 쓰신 '수묵'의 '묵(墨)'자의 아래에 '토(土)'가 빠져서 '흑(黑)'이 되었습니다"라고 말해주었다. 그러자 장작림은 눈을 부릅뜨고 소리질렀다. "무슨 개소리를. 내가 '묵'자를 어떻게 쓰는지도 모를 줄 아느냐. 일본인들을 상대하려면 손이 검지 않고서야 되겠느냐, 이것이 바로 '촌토불양(寸土不讓, 조그만치의 땅도 양보할 수 없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자 그 자리에 있던 중국인들은 모두 웃었고, 일본인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대원수부(大元帥府, 장작림의 사무실)에서 전보처처장으로 일하던 주대문은 이렇게 회고한다. "1928년 5월 17일, 일본주중국공사인 방택겸길이 장작림을 만나겠다고 하였다. 장작림은 마침 거실에서 햇볓을 쬐고 있었는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일본인들은 기회만 있으면 협박하려 한다...나는 국가를 팔아먹을 권리는 없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매국노라고 욕하게 하고, 후손들이 모두 욕을 얻으먹지 않겠는가. 그건 안된다"

 

당시의 중국군인들은 이렇게 중국국민들과 역사에 최후의 답안을 내놓았다. 그리고 자신들을 위하여 마지막 영광을 남겨두었다. 인생에 잘한 것도 있고, 못한 것도 있다. 매국하느냐 아니냐는 큰 잘못을 저지르느냐 아니냐의 문제이다. 모든 사람에게는 최후의 마지노선이 있는데, 당시 북양군벌들에게는 적어도 민족반역자는 되지 않겠다는 것이 최후의 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