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중세유럽

인도와 서아프리카에서의 각축전 | 7년전쟁의 모든 것 -9

구름위 2013. 6. 4.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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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와 서아프리카에서의 각축전

 

영국과 프랑스가 유럽대륙에서 기침을 하자 얼마후 인도에서는 감기가 걸렸다. 당시 프랑스도 인도의 여러 지방을 점령하고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유럽에서 영국과 프랑스가 열심히 싸우자 인도에서도 영국과 프랑스가 '놀면 뭐해!'라면서 이곳저곳에서 전투를 벌였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프랑스가 열세에 몰리게 되어 후퇴를 거듭하였으며 영국은 향후 190년 동안 동인도회사라는 간판을 내걸고 인도를 통치하였다. 인도에서 영-불간의 전투는 벵갈에서 시작하였으나 남쪽의 타밀지역으로 번졌다. 벵갈에서 로버트 클라이브(Robert Clive) 장군이 이끄는 영국군은 프랑스와 동맹을 맺은 무갈제국의 벵갈 총독인 시라즈 우드-다울라(Siraj ud-Daulah)를 무찌르고 캘커타를 점령하였으며 얼마후에는 플라씨(Plassey)전투에서 또 다시 승리하여 결국 시라즈 우드다울라를 왕좌에서 내려오게 만들었다. 플라씨 전투에는 인도 토후인 미르 자파르의 역할도 컸었다. 영국은 플라씨 전투의 승리로 인도와 벵갈에서 완전히 헤게모니를 잡아 향후 190년 동안 동인도회사가 인도와 벵갈을 통치할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1762년 영국의 클라이브 장군이 플라씨 전투 이후 인도 토후인 미르 자파르를 만나고 있다. 코끼리가 참으로 크다.

 

인도에서의 영-불 전쟁은 북쪽 벵갈지방에서 시작되었으나 남쪽에서 결판을 보았다. 처음에 프랑스는 인도 동남부 타밀지방의 산업도시인 쿠달로어(Kuddalore)를 점령하여 기세를 올렸으나 마드라스 공성에 실패한 이후로는 판세가 점점 기울어져갔다. 1760년 영국군은 완디와쉬(Wandiwash)전투에서 프랑스군을 크게 무찔렀다. 이후 영국군은 프랑스군을 북쪽으로 밀어내기 시작하여 벵갈만이 있는 곳까지 영향력을 확보하였다. 이로써 벵갈만 일대에서 프랑스가 차지하고 있던 북부 시르카르스(Northern Circars)일대는 완전히 영국군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1761년에 영국은 프랑스가 통치하던 폰디체리(Pondicherry) 지방의 수도를 점령하였으며 남부의 카라이칼(Karaikal: Karikal)과 마헤(Mahe)를 함락하여 인도 남부를 완전 장악하였다. 이로써 프랑스는 결국 인도에서 손을 떼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푸두체리의 거리. 힌두교 사원들을 볼수있다. 프랑스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으나 7년 전쟁 중에 영국이 장악했다.

 

한편, 미국의 상인인 토마스 커밍(Thomas Cumming)이란 작자는 1758년 영국 수상인 윌리엄 피트(1708-1778)에게 서아프리카 세네갈에 있는 프랑스 정착촌인 세인트 루이스(St Louis)를 공격하여 점령해 달라고 청원했다. 피트는 '뭐? 프랑스가 만든 마을이라고?'라고 반색을 하며 선봉부대를 보내 세인트 루이스를 점령했다. 이에 놀란 프랑스가 '당신들 뭐요? 여긴 왜 왔어?'라고 소리쳤지만 소용이 없었다. 영국군은 내친 김에 내륙으로 진군하여 결국 소규모의 부대가 세네갈을 집어 삼켰다. 영국은 세네갈에서 노획한 물건들을 모두 영국으로 가져갔다. 영국의 피트는 뜻밖에도 세네갈을 힘들이지 않고 차지하게 되자 한걸음 더 나아가서 감비아의 프랑스 무역항이 있는 고레(Goree)섬을 장악하였가. 프랑스는 아프리카에서 세네갈과 감비아를 영국에게 빼앗긴 이후 경제에 큰 타격을 받았다.

 

세네갈의 고레(Goree) 섬 포구 


7년 전쟁의 득실

 

영-불간의 적대관계는 1763년 파리조약으로 끝을 맺었다. 파리조약의 내용은 영국과 프랑스가 세계의 이곳저곳에 있는 식민지들을 상당히 복잡하게 주고 받는 것이었다. 평화스럽게 살고 있던 남의 땅을 무력으로 자기 것으로 만들더니 이제는 '너 이거 가져, 나 이거 가질께'라는 식으로 주고받기까지 하게 되었던 것이다. 가장 중요한 교환은 프랑스가 루이지애나를 스페인에게 양보한것, 그리고 영국에게는 오늘날 미국 남부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당시의 뉴 프랑스를 거의 모두 넘겨 준 것이었다. 프랑스가 그나마 간직한 영토는 생피엘 및 미켈롱(St Pierre and Miquelon) 섬뿐이었다. 프랑스는 뉴 프랑스를 포기할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카리비아해에 있는 섬들인 과델루페와 마르티니케를 포기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했다. 프랑스는 카리비아의 설탕을 잊지 못하여 뉴 프랑스를 포기하겠다고 선언했다. 당시 프랑스는 카리비아 섬들에서 생산되는 설탕으로 쏠쏠한 재미를 보고 있었다. 

 

세인트 루이스에서 바라본 미시시피 강.

 

프랑스는 또한 지중해의 미노르카 섬을 영국에 반환하였다. 스페인은 플로리다의 통치권을 영국에게 넘겨 주었다. 그러나 스페인은 프랑스로부터 미시시피 서쪽의 루이지아나 테리토리와 뉴 오를레앙스를 받았다. 이러한 교환에서 가장 득을 본 것은 물론 영국이다. 영국은 카리비아 해의 섬들로부터 이미 오래전부터 설탕을 생산하여 가져가고 있었기 때문에 설탕에는 별로 큰 관심이 없었다. 대신 뉴 프랑스를 받았고 플로리다를 얻었다. 이로써 영국은 사실상 북미를 총괄하는 세력으로 부상하였다. 물론 1774년 미국이 독립하기 전까지였다.

 

 뉴 오를레앙스의 부르봉 거리. 7년 전쟁의 여파로 영국은 프랑스로부터 뉴 오를레앙스를 받았다.

 

인도에서 영국은 북부 시르카르스를 확보하였다. 하지만 프랑스가 가지고 있던 무역항구는 모두 돌려주었다. 한편, 파리조약에 의하면 프랑스는 인도에서 어떠한 정착촌도 만들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 만일 정착촌 건설이 진행되고 있는 곳이 있으면 파괴해야 했다. 다만, 무역항구 보호를 위해 최소 인원의 수비대는 둘수 있도록 했다. 최소 인원이기 때문에 병영이나 진지가 될수는 없었다. 인도에서 프랑스 세력이 종말을 고하게 된 또 다른 큰 이유는 프랑스와 동맹관계를 맺고 있던 벵갈이 패배한것도 있지만 인도 최대 도시중의 하나인 하이데라바드가 프랑스를 배반하고 영국 편에 서게 된것도 큰 이유 중의 하나였다. 실로 하이데라바드가 영국편이 된 것은 향후 영국이 인도를 지배할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해 준 것이었다.

 

하이데라바드의 샤르미나르(네개의 미나렛을 가진 모스크). 7년 전쟁 중에 하이데라바드는 프랑스 편에 있다가 영국 편으로 돌아섰다. 이로써 인도에서 영국의 영향력이 확고하게 되었다.

 

앞서도 언급하였지만, 유럽의 국경선은 후버투스부르크 조약(1763. 2)에 의해 거의 모두 전쟁 전의 상태로 되돌아갔다. 그리하여 프러시아는 실레지아를 계속 소유하게 되었다. 프러시아는 신성로마제국의 희생을 발판으로 하여 유럽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나라가 되었다. 프러시아가 강대해 진 것은 현대독일의 탄생을 가속화시켜 준 것이었다. 프러시아는 유럽에서 대영제국과 막상막하의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다. 프레데릭 대왕이 처음에 오스트리아를 공격하여 7년전쟁이 막을 올리게 되자 사람들은 프레데릭을 전쟁광으로 보고 비난하였으나 결과적으로는 유럽의 세력판도를 바꾸어 놓은 것이 되었으며 특히 프러시아의 괄목할 만한 도약을 이루게 해준 것이었다.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자는 별로 큰 손실을 입지 않고서도 리더쉽을 강화할수 있었다. 마리아 테레자의 시대는 오스트리아의 최대 번영시기로서 이 때에 보헤미아, 폴란드, 유고슬라비아, 헝가리, 이탈리아 북부 등이 오스트리아의 영향아래에 들어오게 되었다. 7년전쟁에서 가장 큰 피해를 본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프랑스였다. 7년 전쟁의 패배로 프랑스는 1792년의 프랑스 혁명을 마지할수 밖에 없었다.

 

1792년 8월 프랑스 혁명 중에 튈러리 궁전을 공격하고 있는 장면. 7년 전쟁은 결과적으로 프랑스 혁명에 도화선을 붙여 준 것이었다. 

 

미국의 피츠버그는 7년전쟁에서 두드러진 활동을 보여준 영국의 윌리엄 피트를 기념하기 위해 붙인 명칭이다. 마찬가지로 프레데릭 대제를 기리기 위한 지명도 많이 생겼다. 예를 들면 펜실베이니아주의 '킹 오브 프러시아'(King of Prussia)와 버지니아주의 프레데릭(Frederick)이다. 레씽의 '바른헬름의 민나'(Minna von Barnhelm)은 7년 전쟁의 주제로 삼은 것이다. 제임스 쿠퍼의 소설 '모히칸 족의 최후'(The Last of the Mohicans)는 북미에서의 7년 전쟁을 무대로 삼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