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세계사/중세유럽

7년 전쟁의 마감 | 7년전쟁의 모든 것 -8

구름위 2013. 6. 4.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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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 전쟁의 마감

후버투스부르크 조약의 체결

 

작소니의 후버투스부르크 궁전에서 7년 전쟁을 마무리하는 조약이 체결되었다. 7년 전쟁의 결론은? 전쟁 전에 비하여 사정이 달라진 것이 없다. 공연히 7년동안 죽어라고 싸움만 벌였다. 다만, 7년 전쟁의 결과로서 프러시아가 유럽의 맹주자리를 확고하게 차지하게 되었다는 점은 있다.

 

1763년 프레데릭 대제는 실레지아를 완전히 장악하고 내친 김에 오스트리아 북부로 진격하여 오스트리아 영토의 일부를 차지하였다. 한편, 프러시아에 대한 영국의 지원은 영국정부에 새로운 수상으로 뷰트(Bute)경이 들어서자 철회되었다. 표트르3세의 뒤를 이어 짜르에 오른 카테리나(캐서린)2세는 그동안의 오스트리아와의 동맹을 없던 것으로 돌리고 독자적으로 프러시아를 공격하였다. 오스트리아는 몇년에 걸친 전쟁으로 국력이 쇠약해져서 갈팡질팡하고 있던 때였다. 마침내 1763년 2월 15일 작소니의 후버투스부르크 궁전에서 후버투스부르크 조약이 체결됨으로서 유럽 중부를 강타했던 7년 전쟁과 프랑스-인도전쟁이 막을 내리게 되었다.

  

제정러시아의 캐서린2세 여제. 7년 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1763년 남편 표트르를 몰아내고 황제의 자리에 앉았다.

 

이야기의 순서가 조금 빗나갔지만 전쟁 중인 1757년 영국은 그 우수한 머리를 짜내어서 이른바 '디센트'(Descent)라는 작전을 구상하였다. 실상 디센트라는 말은 '몰락'을 의미한다. 디센트 작전의 요지는 프랑스 남서부의 대서양에 면한 항구인 로세포르(Rochefort)를 수륙양면에서 공격하여 점령하고 내친 김에 그 아래 쪽에 있는 샤랑트(Cahrente) 군항에 정박해 있는 함선들을 모두 불살라 버린다는 것이었다. 영국으로서는 프랑스의 해군력을 아예 뿌리채 뽑아 버리자는 심산이었다. 디센트 작전은 드디어 1757년 9월 8일 막을 올렸다. 영국은 육지에서는 보병으로, 바다에서는 함대로 프랑스의 군항들을 공격하였다. 영국은 우선 전략적 요지인 댁스섬(Isle d'Aix: 일 댁스)를 순식간에 점령하였다. 이어 목적지인 로세포르를 공격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지휘관들이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우물쭈물 하는 바람에 로세포르의 프랑스군은 전열을 가다듬고 철통과 같은 수비력을 과시하였다. 결국 영국군은 로세포르를 공격하지도 못하였다. 그리고 10월 1일에는 댁스섬도 그대로 놓아둔채 영국으로 퇴각하였다. 

 

프랑스 브리타니 지방의 항구도시인 로세포르. 서북방으로는 영불해협이다. 7년 전쟁 때에는 격전지였으나 지금은 한가로운 요트의 항구이다.

 

프랑스를 공격했던 영국군들이 후퇴하여 돌아와서 곰곰히 생각해 보니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윌리엄 피트 수상은 기왕에 말이 나온 김에 다시 한번 공격하여 대영제국의 체면을 살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이금해인 1758년 6월, 영국은 대규모 육군과 해군을 동원하여 프랑스의 브리타니 지방을 공격하였다. 육군운 말보로 공작인 챨스 스펜서가 지휘하였고 해군은 3명의 쟁쟁한 제독들이 합동으로 지휘하였다. 영국군은 브리타니의 요새인 생말로(St Malo)를 점령하고 항구에 정박해 있던 프랑스 함선들을 진짜로 불태웠다. 영국군이 승리에 도취되어 있을 때 프랑스군은 은밀히 영국군의 배후에 진을 치고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영국은 다시 후퇴할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영국은 프랑스에 대하여 강한 펀치를 한 대 먹여 섯불리 덤벼들지 못하게 하는 효과를 보았다. 그 이후에도 영국은 다시 한번 육군과 해군을 이끌고 프랑스의 생말로를 공격하였지만 갑자기 날씨가 나빠지는 바람에 서로 길이 엇갈려서 헤매게 되었다. 해군은 생캬스트(St Cast) 항구에 무사히 정박할수 있었지만 엉뚱한 곳에 상륙한 육군을 갈바를 모르고 우왕좌왕하게 되었다. 이에 1만명에 이르는 대규모의 프랑스 육군이 매복하여 있다가 일거에 영국 육군에게 사격을 가하여 추풍낙엽과 같이 쓰러졌다.  영국군은 혼비백산하여 서로 배에 오르려고 난리를 쳤다. 그 통에 영국의 더리(Dury)장군이 이끄는 후방병력 1천4백명이 프랑스군에 완전히 포위되었다. 결국 더리 장군을 비롯하여 750여명의 영국군이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다. 영국은 더 이상 프랑스를 괴롭히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다.

 

일 댁스 해변의 옛 요새. 7년 전쟁 중에 영국이 점령하고 기세를 올리다가 후퇴하였다.

 


식민지에서의 전쟁

[서인도제도]

 

서인도제도에 있는 과데루페 섬. 프랑스의 설탕 주산지였으나 7년 전쟁의 여파로 영국령이 되었다.

 

7년 전쟁은 유럽에서만 벌어진 것이 아니다. 인도, 북미, 카리비아 군도, 아프리카, 그리고 저 멀리 필리핀에서도 벌어진 전쟁이었다. 7년 전쟁의 선발선수들은 오스트리아와 프러시아였지만 전쟁이 확산되자 주인공들은 영국과 프랑스로 바뀌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식민지를 더 차지하기 위해 무던히도 싸웠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식민지에서의 전쟁으로 인하여 영국은 지구상에서 광활한 땅을 차지하게 되었고 프랑스에 대하여 더 큰소리를 칠수 있게 되었다. 영국은 1756년 지중해의 미노르카 섬을 프랑스에게 빼앗겼으나 1758녀에는 아프리카의 프랑스 식민지인 세네갈을 점거하였다. 1759년에는 영국 해군이 프랑스의 설탕 식민지인 과델루페(Guadeloupe)를 점령하였고 1762년에는 마리트니크(Martinique)를 차지하였다. 영국은 또한 1762년에 스페인으로부터 쿠바의 하바나와 필립린의 마닐라를 차지하였다. 스페인으로서는 뼈아픈 손실이었다.

 

카리브해의 마르티니크 섬. 프랑스 영토였으나 7년 전쟁으로 영국에게 빼앗겼다


북미에서의 전쟁

 

유럽에서의 7년 전쟁은 북미에서의 영-불 대결에서부터 비롯하였다는 것이 정설이다. 비록 유럽에서 오스트리아-프러시아의 갈등이 증폭되어 7년 전쟁의 불길이 치솟았다고 할수 있지만 실은 북미에서의 영-불간 대결이 촉매재 역할을 하였다. 당시 북미 지역은 지금처럼 캐나다와 미국으로 갈라져 있지 않았다. 영국 식민지역과 프랑스 식민지역으로 나위어져 있었을 뿐이었다. 여기에 아메리칸 인디언들의 차지하고 있는 독자적인 지역도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미국의 국부라고 하는 조지 워싱턴은 당시 영국군이 조직한 버지니아 민병대의 중령이라는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조지 워싱턴은 1754년 프랑스를 상대로 한 주몽빌(Jumonville)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이름을 떨쳤다. 하지만 펜실베이니어 주 화예트(FAyette) 군의 화밍턴(Farmington) 산상의 작은 요새인 네세시티요새(Fort Necessity)에서 프랑스군에 포위되어 항복을 할수 밖에 없었다. 조지 워싱턴이 평생에 처음으로 항복한 경우였다고 한다.

 

조지 워싱턴이 유일하게 항복했던 전투가 치루어진 포트 네세시티의 오늘날의 모습

 

이렇듯 영국과 프랑스가 북미 대륙에서 일진일퇴의 전투를 벌이고 있어서 소강상태에 들어간 듯 보였지만 1757년에 3년간에 걸친 오하이오 밸리(Ohio Valley) 전투에서 영국군이 크게 승기를 잡자 프랑스는 점점 밀려나기 시작했다. 프랑스는 전황을 뒤짚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여 캐나다 동쪽 끝에 있는 노바스코시아의 케이프 브레튼(Cape Breton) 섬에 있는 루이스부르그(Louisbourg: 루이부르)에서 영국군을 몰아냈으며 아울러 퀘벡으로 진격할 정도로 성공적인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3개월이나 끌었던 프랑스의 퀘벡 공성은 별무효과였다. 영국의 제임스 울프(James Wolfe)장군이 프랑스군을 퀘벡 교외의 아프라함 들판(Plains of Abraham)에서 물리치는 바람에 프랑스군은 몬트리얼로 퇴각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리고 프랑스군은 마침내 그해 9월 영국군에 중과부적이어서 항복하고 말았다. 하지만 제임스 울프 장군은 1759년의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아무튼 이로써 프랑스의 영향권 아래에 있었던 퀘벡 일대는 영국의 수하에 떨어졌지만 그로부터 프랑스계 주민들의 영국에 대한 반발과 독립요구는 자못 끈질긴 것이 되었다.

 

캐나다 노바스코시아의 루이스부르크. 옛 식민지 시대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1762년에 북미에서의 전쟁도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프랑스는 무슨 생각을 했던지 군대를 이끌고 뉴파운드랜드의 생잔스(St John's)를 공격하였다. 프랑스군은 생잔스를 일시 점령하고 인근의 영국 정착지들도 수중에 넣었으나 얼마후 영국군의 대대적인 공격을 받아 시그날 힐(Signal Hill) 전투에서 크게 패배하고 말았다. 만일 프랑스가 이 전투에서 승리했더라면 오늘날 캐나다의 역사는 상당히 달라 있을지도 모른다. 시그날 힐 전투는 북미에서의 7년 전쟁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전투였다. 이로써 영국은 북미의 동부지역을 모두 차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영국이 오늘날의 미국과 캐나다에서 주도권을 잡게된 발판이었다.

 

캐나다 생잔스의 교외에 있는 시그날 힐의 모습. 북미에서 영-불간의 7년 전쟁의 마지막 전투가 벌어진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