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제10군단의 인천상륙작전(1950. 9. 15∼16)
인천상륙작전은 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 방어선에서 북한군의 8·9월공세를 저지하고 반격으로 전환하여 전개한 작전으로서, 이 상륙작전을 지원하기 위하여 특별히 편성된 유엔 해군 제7합동상륙기동부대가 261척의 대함대를 동원하여 미 제10군단(미 제1해병사단, 미 제7사단, 국군 제1해병연대, 국군 제17연대)을 인천으로 상륙시킨 상륙작전이다. 이 작전에서 제7합동상륙기동부대의 제90공격부대는 인천을 방어하는 북한 인천경비여단과 제18사단 및 제31사단을 격파하고, 당일 월미도와 인천시가를, 다음날에는 인천해안 교두보를 확보하여 서울로 진격할 발판을 구축한 다음 미 제10군단장에게 인계하였다.
인천상륙작전은 7월 첫주에 맥아더 장군이 그의 참모장 알몬드(Edward. M. Almond) 소장에게 하달한 "서울의 적 병참선 중심부를 타격하기 위한 상륙작전계획을 고려하고 상륙지점을 연구하라"는 지시와 더불어 발전되기 시작하였다. 이 계획은 맥아더 장군의 작전참모부장 라이트(Edwin K. Wright) 준장이 이끄는 합동전략기획 및 작전단(JSPOG)에 의해 연구되었으며 블루하트(Blue Hearts)라는 암호명칭이 부여되었다. 연구된 상륙작전의 개략적인 개념은, 남부전선에서는 미 제24, 제25사단이 정면에서 반격을 가하고 이와 병행해서 해병연대 전투단과 육군부대가 돌격부대로 인천에 상륙하여 내륙으로 진출, 서울을 포위함으로써 적을 38도선 이북으로 구축한다는 것이었다.
7월 4일 맥아더 장군 참석하에 극동군사령부에서 가진 이에 관한 첫 작전회의에서, 공격부대는 해병 1개 연대전투단 외에 육군으로서는 주일(駐日) 미 제1기병사단을 운용하기로 논의하였고, 상륙일자는 합동작전으로서 준비과정을 고려하여 7월 22일로 정하였다. 이에 미 해병기지에서는 7월 7일 해병 제1사단 예하 제5연대를 주축으로 제1임시해병여단을 창설하고 제1기병사단이 훈련에 들어가는 등 지상군의 상륙준비가 진행되었다. 하지만 블루하트계획은 7월 10일 이 단계에서 포기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것은 국군과 이미 전장에 투입된 미군이 적의 남진을 저지하지 못함으로써 상륙작전보다는 현 전선을 안정시키는 것이 시급하게 되어 제1기병사단도 전선에 투입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북한군의 신속한 전진으로 블루하트계획은 취소되었지만, 맥아더 장군은 인천상륙작전에 대한 집념을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전선상황이 악화될수록 적의 후방에 대한 상륙작전의 필요성을 더욱 절감하고, 상륙지역으로 인천을 강조함과 동시에 다른 지역에 대해서도 그 가능성을 연구·검토하도록 지시하였다. 이에 따라 연구를 재개하게된 합동전략기획 및 작전단은 인천, 군산, 해주, 진남포, 원산, 주문진 등 해안지역을 상륙 대상지역으로 검토하고 크로마이트(Chromite)라는 이름 아래 인천상륙계획(100-B), 군산상륙계획(100-C), 주문진상륙계획(100-D) 등 3개 안을 작성하여 그 개략계획을 7월 23일 미극동군사령부의 관계참모부에 회람하였다. 이중에서 인천을 상륙지역으로 하는 계획이 가장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이 계획은 이미 미국으로부터 한국에 이동중에 있는 미 제1임시해병여단과 미국에서 일본으로 출발하도록 계획되어 있는 미 제2보병사단을 상륙공격부대로 운용하고 이들 부대의 상륙과 동시에 지상군이 남에서 반격으로 전환한다는 작전개념으로 되어 있었다.
맥아더 장군은 같은 날인 7월 23일에, 9월 중순경 이 계획대로 상륙작전을 실시하겠다고 육군성으로 통보하였다. 그러나 8월초, 북한군의 공세로 낙동강방어선의 서측이 붕괴직전에 이르자 상륙부대로 지정한 2개 부대가 도착과 동시에 낙동강 전선에 투입됨으로써 상륙작전계획의 실현은 어려운 실정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미 제1해병사단의 지원이 가능하다는 통보를 받게되자, 이 사단과 일본에 남아있는 마지막 사단인 미 제7보병사단을 가용부대로 하여 합동전략기획 및 작전단은 작전계획 100-B(인천상륙)를 완성하여, 8월 18일 예하 및 관련부대에 하달하였다. 이 계획은 본질적으로 그동안 추진되어 온 상륙작전의 기본개념과 동일하나 미 제1해병사단은 돌격상륙부대로, 인천-서울을 목표지역으로 결정하고 상륙부대와 낙동강전선의 미 제8군과의 협조된 작전을 동시에 실시한다는 것이 핵심이었다. 다만 이 계획은 후속 상륙부대가 아직 명시되지 않은채 극동미군사령부 예비병력이라고만 언급되었으며 잠정적인 상륙일은 9월 15일로 결정하였다. 또한 맥아더 장군은 8월 15일에는 계획된 상륙작전을 추진하기 위하여 러프너(Ruffnur) 소장 주도아래 '특별계획참모단본부'(Headquarters Group of the Special Planning Staff)라는 새로운 참모진을 구성하였다. 이 기구는 '크로마이트' 작전계획을 보다 구체화하여 극동미군사령부의 훈령을 작성, 하달하기 위한 작업을 전담하였으며 이들은 후일 미 제10군단사령부 창설시 핵심 참모요원이 되었다.
상륙작전의 기본계획을 확정한 맥아더 장군은 즉각 상륙군 부대의 편성에 착수하였다. 그는 상륙부대를 제10군단으로 편성하고 8월 26일에 참모장 알몬드 소장을 군단장에 임명하고 극동군사령부에서 차출된 참모장교들로써 군단사령부를 편성하였다.
군단에 편성된 주요부대로는 미 제1해병사단, 미 제7보병사단과 국군 해병 제1연대, 국군 보병 제17연대, 그리고 지원부대로 구성되었다. 상륙군 부대는 총 70,000여명에 달하였고, 상륙군의 기동개념은 해·공군의 포격 및 폭격으로 상륙지역의 적을 무력화 시킨 다음, 돌격부대인 미 해병 제1사단으로 하여금 인천시가지를 점령하고 해안교두보를 확보한 후, 가능한한 신속히 김포비행장을 탈환하고, 한강남안의 적을 소탕하며, 한강을 도하 서울을 탈환하고, 그 북쪽 고지군을 확보한다는 것이었다. 미 제7사단은 후속부대로써 해병사단의 우측방(남쪽)으로 기동하여 서울 남쪽 고지군과 한강 남쪽 제방을 점령하고 일부부대는 수원방면으로 진출하여 낙동강 전선에서 반격해 오는 미 제8군과 연결작전을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인천지역에는 북한군은 월미도에 제226독립육전연대 제3대대 소속의 400여 명과 제918해안포연대 예하부대가 방어임무를 수행하고 있었으며, 인천 시가지에는 신편 제9사단 예하 제87연대(연대장 대좌 김태모)가 8월 12일부터 인천지역 방어임무를 인수하여 담당하고 있었다. 이외에도 월미도 지역에는 제884군부대 예하 1개 대대가 방어하고 있었다. 또한 서울지역에서 경계중이던 제9사단(-)은 8월 12일에, 그리고 제18사단은 인천상륙작전 직전에 서울을 출발, 낙동강전선으로 이동하였다. 이때 서울지역의 적의 병력은 김포지역의 500명을 포함하여 약 5,500명이었고, 그밖에 9월 4일까지 추가로 증원된 2,500여 명을 합하면 서울-인천지역에서 활동중인 적의 총병력은 약 10,000여 명으로 판단되었다.
인천상륙일자가 다가오자 제7합동기동부대는 9월초에 부산, 일본의 사세보(佐世保), 고오베(神戶), 요꼬하마(橫濱)에서 상륙군 적재를 시작하여 9월 10일부터 인천으로 출항하기 시작하였다. 미 해병 제1사단(-)과 미 보병 제7사단은 각각 고오베와 요꼬하마에서 9월 11일에 출항하였으며, 도중에 부산에서 출항한 국군 해병 제1연대와 국군 제17연대 등과 합류하였다. 제7합동기동부대 사령관 스트러블 중장은 기함 로체스터호로 9월 12일 사세보에서 출항하였고, 맥아더 장군은 제10군단장 알몬드 소장, 그의 작전참모 라이트 준장, 태평양함대 해병사령관 세퍼드 해병 중장 등과 같이 제 90공격기동부대 사령관 도일 해군 소장의 기함인 마운트 맥킨리호에 승선하여 이날 밤 사세보항을 출항하였다. 이렇게 하여 모든 함정들이 9월 14일까지는 서해 중부 해상의 약정된 집결지인 덕적도 근해(Point California)에서 총집결할 수 있었다.
인천상륙은 9월 15일 새벽에 시작되었다. 02:00, 월미도에 상륙돌격을 감행할 미 제5해병연대 제3대대 상륙단의 선견공격대(先遣攻擊隊)가 인천수로로 진입하기 시작하여 얼마후 미 해군정보장교 크라크(Clark) 대위가 밝혀주는 팔미도 등대의 안내를 받아 무난히 인천항에 이르렀다. 이들은 05:00 고속항모부대의 함재기들이 월미도와 인천 내륙지역에 맹렬한 공중폭격을 실시하고, 이어 구축함과 로켓트포함에서 포탄을 퍼붓는 동안 상륙주정(LCVP) 7척에 분승, 제1파를 구성하여 해상에 설정된 공격개시선을 통과하였다.
이렇게 하여 미 제1해병사단은 D일 아침 만조시간에 맞춰 월미도를 탈취한데 이어, 오후 만조시간에 맞춰 인천시가지에 상륙하였는데, 이날 인천에 상륙한 병력은 약 13,000명에 달했으며 450대의 차량을 포함한 다량의 장비와 보급품도 양륙되었다. 해병 제1사단은 상륙한지 24시간만에 해안두보를 확보하였다. 해병 제1사단장은 사단지휘소를 인천시가지 동쪽에 설치하고 18:00시에 공격함대사령관으로부터 작전지휘권을 인수하였다.
이처럼 인천상륙작전이 성공을 거두자, 미 제10군단은 공격 다음날에 인천지역의 교두보를 확보하고 서울로 진격하여 9월 27일에는 서울을 점령하였다. 이 작전과 더불어 실시된 낙동강 전선에서의 반격작전도 순조롭게 진행되어 미 제7사단의 제31연대는 수원비행장을 확보하고 수원비행장 남쪽고지에 차단진지를 형성, 임무를 수행중 9월 26일 22:26분에 오산 북쪽에서 미 8군 제1기병사단 제7기병연대 린치(Lynch)특수임무부대와 연결을 이룸으로써 남침한 북한군의 전력을 일시에 무력화 시킬 수가 있었다.
이 작전은 개전 이후 그때까지 수세 일변도였던 한국군 및 유엔군의 입장을 공세적으로 전환시키게 된 획기적인 작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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